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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화 (224/319)

196화

바이칸 북부 산악지대의 점성술사들은 악마에게 선택받은 자들을 가리켜 ‘날개를 잘린 나비’라는 표현을 쓰곤 했다.

나비의 날개 일부를 잘라내면 그 나비는 한동안 파닥거리다가 죽게 되는데, 악마에게 홀린 자들의 모습이 그와 같다며 붙인 별명이었다.

블라이스는 자신이 그 나비와 같다고 생각했다.

“데네브라 님을 만나고 왔어?”

감옥 안으로 들어오는 율리아의 모습은 어린 시절 그가 상상하던 악마를 떠올리게 했다.

겉모습은 지독하게 인간을 닮았지만, 그 안에 깃든 영혼은 소름 끼치게 낯설어 자꾸만 시선을 빼앗기게 되는.

율리아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황제의 끄나풀인가요?”

“왜 그렇게 생각해?”

“황비의 곁에 황제의 끄나풀이 여럿 기생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 묵인했으니까.”

“벌써 그것도 알아냈어?”

블라이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신에게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율리아를 보며 의자를 권했다.

“앉아서 얘기해. 금방 보내고 싶지 않으니.”

“일어나세요.”

“응?”

“대화를 나눌 사람은 제가 아니고, 당신은 그분 앞에서 앉아 있어선 안 돼요.”

율리아가 블라이스를 흘깃 쳐다보곤 감옥 앞에서 두어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율리아가 서 있던 자리에 멈춰 섰다.

레위시아였다.

율리아가 엄숙하게 말했다.

“블라이스 백작, 오르테가의 국왕 전하께 무릎을 꿇으세요.”

복도에서 흘러든 불빛이 레위시아의 그림자를 감옥 안까지 길게 늘어뜨렸다. 블라이스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그 그림자에 다가갔다.

“거기서 무릎을 꿇어요.”

율리아의 목소리가 선연히 울렸다. 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멈춰 선 곳은 아슬아슬하게 레위시아의 그림자가 닿지 않는 위치였다.

“두 손을 바닥에 대고, 그 위에 이마를 올려요.”

“하하…….”

“남부의 별, 오르테가의 새로운 국왕 전하께 인사를 드리세요.”

레위시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블라이스의 신경은 온통 율리아에게 쏠려 있었기에, 그는 레위시아가 어떤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기 싫다면?”

“무력을 쓰겠죠.”

“그건 너무 수치스럽네.”

블라이스는 복종했다. 율리아가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바닥에 댔다. 그러곤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데네브라에게 매일 하던 짓이니까. 그 상대가 왕이 아니라 거리의 비렁뱅이였어도 사실 수치심 같은 건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레위시아가 감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닿을 듯 말 듯했던 그의 그림자가 블라이스를 덮을 기세로 크게 다가왔다.

레위시아가 블라이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선왕께서 네 앞에 무릎 꿇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어?”

“재미있었지요.”

“샤트린을 죽이려 한 건 데네브라 황비가 시킨 짓인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누구의 명령인지 말해라.”

“다 제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짓입니다.”

블라이스의 목소리엔 여유가 넘쳐 흘렸다. 데네브라가 장담했던 대로였다. 그는 여기서 진실을 말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레위시아가 율리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율리아가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물론 엎드린 채 머리를 조아린 블라이스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블라이스 백작.”

레위시아가 블라이스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그에게 바짝 다가가 두 눈을 마주하고 말했다.

“우리는 지난해부터 바이칸의 북부 패전국 연합에 은밀히 전쟁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어.”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지.”

“그 안엔 너의 고향도 포함되어 있지.”

“그러니까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냐는 말입니다.”

“북부는 승리할 거다.”

레위시아는 단언했다.

블라이스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승리라니, 어떻게? 약해 빠진 북부가 무슨 수로 정복자인 황제를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북부가 연합이 되었대도 마찬가지였다. 블라이스는 황제의 정복 전쟁을 직접 겪은 자였다. 그의 고향은 불에 타 재만 남았고, 그는 전쟁에 참여했단 이유만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곳은 지옥이었다.

“국왕 전하, 제가 언제 처음으로 남 앞에 무릎을 꿇었는지 아십니까?”

“모른다.”

“전쟁터에서…… 항복할 테니 제발 살려 달라고, 바이칸 말단 병사의 군화에 매달렸을 때입니다.”

블라이스는 그때 살기 위해 고향에 대한 정보를 팔았다.

“죽기 직전까지 맞아도, 죽기 직전까지 굶어도…… 그 전에는 한 번도 무릎 같은 건 꿇어 본 적 없습니다. 자존심이 더럽게 강한 애새끼였거든요.”

“살기 위해 한 짓이란 걸 안다.”

“아뇨. 날 전쟁터에 내보낸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꿇은 겁니다.”

블라이스는 자신의 선택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때 항복하지 않았다면 그가 정복 국가 바이칸의 귀족, 백작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데 레위시아가 그게 아니라고 말했다.

“너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거야. 같은 입장이었다면 나도 너와 똑같은 행동을 했을 거고.”

“당신이?”

“그래. 그래서 언젠가 목표했던 자리에 올랐을 때 제국을 배신하고 고향을 위한 선택을 하겠지.”

블라이스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레위시아를 바라보았다. 욕심 없고 우유부단한 줄 알았던 왕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저는 북부 패전국 연합과 아무 상관없는 자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겐 두 번 죽여도 시원찮을 배신자 새끼죠. 북부가 바이칸을 상대로 이길 리도 없거니와, 만에 하나 그렇다 해도 저는 계속 데네브라 님의 노예로 살다 죽을 겁니다.”

“아주 대단한 충성심이야.”

이번에는 레위시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더니 율리아를 한번 보고, 다시 블라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런 사람이 내 시녀를 위해 그런 짓을 벌여? 마조람 후작과 그 파벌이 무너지는 데에 네 영향이 컸다는 걸 우리가 모를 줄 알고? 데네브라 황비에게 충성한다면 너는 마조람 후작을 도왔어야 해.”

“그건 그냥 오르테가에 내전이 일어났으면 해서.”

“내전을 일으킬 생각이었다면 샤트린과 죽은 1왕자가 서로에게 칼을 겨누도록 만들었어야지. 그게 훨씬 쉬웠을 텐데.”

당시 1왕자의 위치가 공고했다고는 하나, 샤트린은 충분히 그의 대항마가 될 수 있었다.

“너는 데네브라의 노예가 아니야.”

레위시아는 확신하고 있었다.

“황제의 끄나풀이면 모를까.”

“국왕 전하.”

“황제가 너를 진심으로 신임하게 되었을 때, 그를 배신하려고 숨을 죽이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상상력이 지나치십니다.”

“그러니까 율리아에게 그런 제안을 할 수 있었던 거고.”

“제가 무슨?”

“함께 바이칸으로 가자고 했다면서.”

블라이스가 그런 것까지 털어놓았냐며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자,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가 아르테 백작에게 한눈에 반하는 바람에.”

레위시아가 블라이스와 비슷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곤 율리아에게 말했다.

“율리아, 우리끼리 할 말이 있으니 밖에서 기다려 줘.”

“알겠습니다, 전하.”

율리아가 감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블라이스는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걸 본 레위시아가 힘없이 의자에 앉아 말했다.

“정신 차려. 율리아가 네 마음에 응답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무혈 제독과 율리아의 관계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야. 두 사람은 뭔가 알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으로 강렬하게 묶여 있어.”

“그러니까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내가 왕의 자리에 오르고도 율리아를 욕심내지 못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겁쟁이니까.”

“결과를 빤히 알기 때문이다, 이 멍청한 새끼야. 마음을 고백하면 율리아의 삶이 더 힘들어질 거란 걸 알기 때문이라고.”

레위시아가 의자에 앉아 블라이스를 내려다보았다.

“누구의 사주인지 자백해.”

“독단이었습니다.”

“넌 내가 정의롭고 마음 여린 국왕이라고 생각하지.”

블라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위시아가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웃었다.

“널 고문하거나, 죽이고 나서 자백서를 위조할 수도 있어.”

“저런…… 무서워라.”

“그런데 내 시녀가 더 좋은 생각을 떠올렸지.”

블라이스는 데네브라의 노예가 아니다. 율리아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코코와 카루스를 불러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코코의 못된 상상력과 카루스가 가진 정보를 바탕으로, 율리아는 꽤 괜찮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레위시아가 미소 지었다.

“네 이름으로 북부에 지원금을 보낼 거야. 전쟁 용병도, 바이칸 정복군에 대한 정보까지. 그리고 그걸 황제에게 흘릴 생각이다. 그는 네가 변절했다고 판단하겠지.”

“……그게 무슨 소용이라고.”

“그런 뒤엔 황비를 찾아가 네가 황제에게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고 있었다고 말할 거야. 황비도 너를 의심하겠지.”

“그런 정도로는 제 입을 열 수 없을 겁니다.”

“끝까지 들어.”

레위시아의 시선이 감옥 밖 복도를 살피고 다시 돌아왔다.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널 몰래 탈출시켜 주마.”

진심으로 율리아를 사랑한다면, 앞으로 네가 뭘 해야 할지는 말 안 해도 알고 있겠지. 레위시아가 낮게 속삭였다.

“블라이스, 황비를 버려.”

블라이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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