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5-2화 (223/319)

40. 악마여, 한 번만 웃어 주면 까짓 영혼쯤은

“블라이스를 어찌하였느냐.”

“그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긴 하세요?”

율리아가 되물었다. 질문한 건 데네브라였는데, 원하는 걸 듣기도 전에 또 입을 열어야 했다.

“블라이스를 사로잡아 봤자 너희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어. 그는 내 충성스러운 노예이니까 절대 자백하지 않을 거야.”

데네브라는 자신만만했다.

황비는 블라이스를 아주 긴 시간 동안 길들였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은 다 그녀가 준 것이었다. 그는 이제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조차 그녀의 의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믿었다.

율리아가 다시 물었다.

“블라이스 백작이 정말 황비 전하의 명령을 수행하려 했다고 생각하세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 네 말버릇은 너무 고약해서 대답하고 싶지 않아. 너는 그냥 네 영리함에 취해 있을 뿐이야. 안타깝게도 나는 너 같은 사기꾼들하곤 길게 대화를 나누지 않는단다.”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기 위해 아예 대답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 말대로, 데네브라는 블라이스가 샤트린을 죽이려다 사로잡혔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당황하거나 걱정하는 것 같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율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블라이스 백작이 전하께 꽃을 선물한 적이 있나요?”

“글쎄다.”

“그가 전하께 여름 복숭아를 바구니째 가져다준 적이 있나요?”

“너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블라이스 백작은 샤트린 공주님을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요. 그걸 알면서도 침입한 거예요.”

“그가 왜?”

“당신을 외톨이로 만들려고요.”

블라이스는 오래 지나지 않아 자백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황제가 붙여 놓은 끄나풀에 의해, 남부에서 고립된 채 누구의 위로도 받지 못한 채 고립될 것이다.

율리아는 블라이스가 오르테가에서 저지른 짓들을 천천히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가 누구와 손을 잡고 누구를 적으로 삼았으며, 그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혼란을 부추기려 일으킨 싸움들이 결론적으로 누구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그건 모두 저를 위한 거였어요. 그는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고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

“당신에게 길들지 않았거든요.”

블라이스 백작은 데네브라 황비의 노예가 아니다. 그가 충성하는 대상은 원하는 싸움터로 데려가 줄 폭군일 뿐, 그게 꼭 데네브라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충성스러운 번견이 아니라 여전히 주인 없는 들개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 네 말이 모두 사실이라 해도 나에겐 아무렇지 않은 일이야. 내가 부리는 이가 그놈 하나뿐인 줄 아느냐? 권력자의 좋은 점이 뭔지 가르쳐 줄까? 인간을 도구처럼 계속 바꿔 쓸 수 있다는 거란다.”

“맞아요.”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블라이스가 감옥에 갇혀 영원히 벌을 받게 된다고 해도 데네브라에겐 그리 큰 손해가 아닐 수 있다.

“당신의 황제도 그렇게 생각하겠죠.”

하지만 그건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제에겐 황비 전하 역시 언제든지 바꿔 쓸 수 있는 도구에 불과할 테니까요.”

“너는 상대를 화나게 하는 데에 아주 도가 텄구나.”

데네브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손에 잡힌 테이블보가 와락 구겨지며 그 위에 놓인 식기를 와르르 무너뜨렸다.

“돌아가라. 더는 너와 대화할 생각이 없으니.”

“제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거든 황비 전하의 곁을 맴도는 황제의 감시인부터 제거하세요.”

데네브라가 율리아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녀의 노란 눈에서 거센 분노가 출렁거렸다. 한마디만 더 하면 달려들어 후려칠 기세였다.

그러나 율리아는 그동안 데네브라와 같은 권력자들을 너무 많이 상대해 왔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인사했다. 그러곤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분간 남부 함대 제독인 카루스 란케아 님께서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 블라이스 백작에 대한 심문이 끝날 때까지 전하께선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뭐라고? 누구 맘대로!”

“카루스 란케아 님께서 공언하셨습니다.”

국왕 레위시아는 데네브라 황비를 감시하라며 오르테가의 병사들을 보내지 않았다. 그가 도움을 요청한 건 카루스 란케아였다.

카루스는 레위시아의 청을 흔쾌히 수락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를 남부 함대의 제독으로 임명한 황제 폐하께서는 오르테가를 비롯한 남부의 안정과 평화를 원하셨다.’”

율리아는 카루스가 한 말을 데네브라에게 그대로 들려주었다.

“‘이 일이 데네브라 황비의 사주로 밝혀진다면, 나는 황제 폐하의 명령을 우선하여 행동할 것이다.’”

황제는 카루스에게는 안정을, 블라이스에게는 혼란을 명령했다. 데네브라는 그 가운데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며 떼쓰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러니 황제가 직접 개입하지 않는 이상, 이 싸움의 승자는 정해져 있었다.

율리아가 데네브라에게 물었다.

진짜 ‘도구’는 누구인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