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5화 (222/319)

195화

샤트린의 잠옷으로 갈아입은 레위시아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감추고 가발을 뒤집어썼다. 그러곤 코코에게 얼굴을 맡겼다.

“최대한 비슷하게.”

“알았으니까 입 좀 그만 움직이세요.”

“샤트린은 나보다 못생겼으니까 평소보다 더 진하게 그려야 해. 알았지? 주근깨도 여기랑 여기에 그려 넣고, 쟤는 얼굴에 점도 여러 개 있으니까 잊지 말고.”

“두 분 사이가 나쁜 건 전하 탓이에요.”

“뭔 소리야. 쟤가 성질이 더러워서 그런 거지!”

평소 같았으면 같이 고함을 지르며 싸웠을 샤트린이 웬일로 조용했다. 그녀가 율리아에게 조용히 물었다.

“율리아.”

“네.”

“쟤 저거 처음 아니지?”

“뭐가요?”

“여장하는 거.”

대답할까 말까. 망설이던 율리아가 샤트린에에 몸을 기울였다. 그러곤 그간 레위시아가 ‘티타니아’라는 신원 미상의 귀부인이 되어 귀족들의 은밀한 사교 모임을 들락거리면서 정보를 모으고 비밀을 파헤쳤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샤트린은 어이없어 했다가 기가 막혀 웃고, 다시 어이없어 했다.

“어쩐지 너무 자연스럽더라니…….”

화장을 마친 레위시아는 언뜻 샤트린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닮은 데라곤 하나도 없는 두 사람인데 묘하게 헷갈리는 구석이 있었다. 키가 비슷해서 그런가, 실루엣에는 그리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어차피 습격은 캄캄한 밤에 이뤄질 테니 숙련된 암살자라고 해도 달빛만으로 두 사람을 구별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샤트린이 레위시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넌 딸로 태어났어야 해.”

“닥쳐.”

“자매였으면 적어도 지금보단 사이가 좋았을 텐데.”

“닥치라고.”

레위시아가 단단한 부츠를 신은 채 샤트린의 침대에 누웠다. 샤트린은 그 몰골을 보곤 질끈 눈을 감았다.

율리아와 코코가 공주궁의 시녀들과 함께 침실과 응접실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꾸미기 시작했다.

“왕위를 포기한 공주님께서 실의에 빠져 술 없이는 잠들 수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꾸며 주세요. 레위시아 님이 근신 명령을 내렸으니 촛불은 최소한으로, 나머지는 평소와 같아야 해요.”

“알겠어요.”

“측근 시녀 두 분과 하녀, 호위 기사 분들까지 평소와 똑같이 배치해 주세요. 평소에 잠그던 문은 다 잠그고, 열었던 건 다 열고요.”

“네, 그런데…….”

공주궁의 시녀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레위시아를 바라보았다. 샤트린인 척하다가 왕자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뜻이었다.

레위시아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 카루스 왕자님이 날 지켜 줄 거야.”

카루스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하…… 하하하하!”

상황 파악이 끝난 뒤, 블라이스는 자신이 이토록 엉성한 속임수에 당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웃었다. 레위시아와 샤트린을 보며 웃고, 쓰러진 부하들을 보며 더 크게 웃었다.

그러다 카루스와 눈이 마주치자 별안간 웃음을 멈추고 그에게 물었다.

“날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카루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털었다. 숙련된 암살자 여섯을 단번에 쓰러뜨리고도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그를 보며 레위시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루스가 블라이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죽이고 싶지만.”

“그러시겠죠.”

“너는 데네브라의 번견이기에 가치가 있다고, 누가 그러더군.”

그게 누군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율리아. 나는 그럼 율리아의 포로가 되는 건가. 블라이스가 녹을 듯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그 꼴이 보기 싫었던 카루스가 혀를 쯧 차더니 다시 주먹을 말아 쥐고 블라이스의 얼굴을 후려쳤다.

* * *

바이칸의 황비 데네브라가 수족인 블라이스 백작을 시켜 샤트린 공주를 은밀하게 살해하려 했다.

경쟁자였던 레위시아 2왕자에게 왕위까지 양보한 마당에 이런 식의 보복이라니, 이는 오르테가가 바이칸의 속국 취급을 받는 곳이라 해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레위시아는 이 일을 정식으로 바이칸 제국에 항변하겠다고 공표했다. 오르테가는 신의를 지켰으나 돌아온 건 황비의 만행이었다며, 크세노 황제에게 보낼 길고 긴 항의 서한을 작성했다.

물론 그 서한을 쓴 건 율리아였다.

덕분에 샤트린은 하루 만에 근신이 풀렸다. 한때 왕위 후계자였으나 이제는 2인자가 된 공주가 원로들과 함께 본궁에 나타나 레위시아에게 왕의 관을 건넸다.

즉위식은 임시로 진행되었다. 돌아가신 국왕을 애도하는 기간에 연회를 열 수 없다는 이유를 들며, 레위시아는 연회를 무기한 연기해 버렸다.

최근 거의 매일 큰 사건이 터져 어안이 벙벙해진 귀족들이 본궁에 가득 찼다. 우애 좋은 남매인 양 바짝 붙어 서서 대화하는 레위시아와 샤트린을 보며,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식을 거행하라!”

이날 레위시아는 흰 예복에 은은한 녹색 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의 청초한 얼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원로들이 차례대로 다가와 그에게 왕관과 망토, 왕의 인장과 두툼한 문서를 건넸다. 그러곤 큰 소리로 선언했다.

“오르테가를 비추는 남부의 별, 레위시아 오르테가 국왕 전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

“푸른 산호와 티타니아의 바람, 남부의 풍요와 왕국의 긍지가 새 주인을 맞았습니다!”

“레위시아 국왕 전하, 만세!”

“오르테가여, 영원하라!”

말뿐인 충성이었으나 그들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본궁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우렁차, 레위시아는 제법 훌륭한 가면을 뒤집어쓸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