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 * *
“샤트린 오르테가를 죽여라.”
데네브라가 명령했다.
황비는 그리 화가 나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평소처럼 패악을 부리며 채찍을 휘두르겠거니 하는 생각에 단단히 마음을 먹고 왔는데, 외려 너무 차분해서 낯설기까지 했다.
블라이스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샤트린 오르테가…… 공주 말씀입니까?”
“그래. 죽여라.”
“황비 전하께 아무 도움 되지 않는 일입니다.”
“네놈이 그 짧은 사이에 남부의 물을 먹더니 이제 내 말에 토를 다는구나. 언제부터 노예에게 그런 권한이 생겼더냐. 너는 내가 죽이라고 하면 죽이고, 죽으라고 하면 죽어야지.”
데네브라의 목소리에 잔 떨림이 느껴졌다.
블라이스는 그녀가 화가 나지 않은 게 아니라, 너무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르는 상태라는 걸 알아챘다.
그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데네브라의 치맛자락을 쥐고 그 끝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당신의 명령을 받듭니다.”
“그 건방진 계집을 죽이고 2왕자에게 뒤집어씌워라. 마침 그 계집이 양위니 뭐니 하는 거짓 연극을 하고 있으니 잘되었어. 왕위를 놓고 두 짐승이 다투다가 하나가 하나를 죽인 것으로 하면 되겠지.”
“하지만 순서가…….”
블라이스가 순서를 지적했다. 샤트린은 이미 양위 선언을 했는데, 이제 와 죽이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데네브라가 블라이스를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이라며 웃었다.
“양위니 뭐니 하는 건 전부 거짓말이다. 양위했다고 해서 용서하고 더불어 산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야. 이 대륙의 긴 역사 어디에도 그런 왕족은 존재하지 않아. 결국엔 다 죽이고 배신하기 마련이야.”
맞는 말이었다. 블라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궁에서 보낸 자객이 공주를 죽인 것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서둘러라.”
이게 바로 데네브라의 무서운 점이었다.
만약 율리아나 코코, 혹은 죽은 마조람 후작 부인이었다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일을 두려움 없이 터뜨리는 것.
일이 잘못될지도 모른다거나 후에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 같은 건 데네브라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녀는 바이칸의 황비였다.
자신의 숙소로 돌아온 블라이스가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아무런 장식 없이 새카맣고 활동적인 옷이었다. 그는 그 위에 오르테가의 병사들이 입는 가벼운 여름용 갑옷을 걸쳤다.
블라이스와 그의 부하들은 그동안 오르테가 왕궁에 존재하는 모든 샛길과 암행 경로, 각 왕궁에 존재하는 사각지대를 파악해 외웠다.
공주궁에 들어가 샤트린을 죽이는 건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은 일이었다.
어려운 건 샤트린을 죽이고 난 뒤에 아무 흔적 없이 몰래 빠져나오는 일이었다. 공주는 사랑받는 왕족이었다.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그래도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샤트린은 근신 중이었다.
근신 중인 왕족에겐 많은 제약이 있었다. 블라이스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으리란 걸 알았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새벽이 오길 기다렸다.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다 잦아든 깊은 새벽, 그는 부하들과 함께 귀빈궁을 빠져나와 공주궁을 향해 움직였다.
병사들의 눈을 피해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엔 하녀들이 다니는 복도를 이용했다. 인기척이 느껴지면 미리 파악해 둔 사각지대로 들어가 숨었고, 잠긴 문은 보육원 시절 배웠던 도둑의 기술로 열었다.
샤트린은 공주궁에서 가장 큰 방을 침실로 쓰고 있었다. 침실 안에 응접실이 하나, 바깥에는 그보다 더 큰 응접실이 있었다.
측근 시녀와 전속 하녀들, 그리고 호위 기사들이 그 앞을 철통같이 지켰다.
블라이스는 복도를 통해 침입하는 걸 포기하고, 공주의 침실 바로 아래에 있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창문을 열어 바깥벽을 기어올랐다.
기회는 한 번, 샤트린이 비명을 지르기 전에 죽여야 한다.
침실은 캄캄했다. 커튼이 제멋대로 휘날려 달빛마저 어른거렸다. 최대한 기척을 죽인 블라이스가 발코니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서 은은한 술 냄새가 났다. 그토록 원하던 왕좌를 포기했으니 공주도 술이 없이는 잠들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뒤를 이어 여섯 명의 암살자가 소리 없이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블라이스는 그들에게 수신호를 보내 입구를 차단하고 도주로를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그러곤 품에서 단도보다 조금 긴 칼을 꺼냈다.
공주는 드레스처럼 긴 잠옷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반투명한 커튼이 살짝 휘날렸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이불 위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블라이스는 발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움직여 공주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칼을 휘둘렀다.
“……!”
“누구냐!”
술에 취해 잠든 줄 알았던 공주가 침대 위에서 빠른 속도로 몸을 굴려 칼을 피했다. 그 후엔 블라이스의 손목을 발로 차 칼을 쳐내기까지 했다.
공주는 딱딱한 굽이 있는 부츠를 신고 있었다. 힘이 세고, 몸도 쓸 줄 알았다. 꼭 잘 훈련된 병사를 보는 것 같았다.
“이런…… 밖으로 나가!”
블라이스는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하들과 함께 서둘러 몸을 피하려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끄아아아아!”
그와 함께 침입한 암살자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검은 옷의 남자가 호위 기사들과 함께 나타나 그들의 팔을 비틀어 부러뜨리고, 목을 움켜쥔 채 벽에 머리를 박았다.
곳곳에서 비명과 함께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졌다. 피거품을 물고 정신을 잃은 자도 있었다.
상황은 금세 정리되었다. 암살을 들킨 순간 실패는 기정사실이었다.
블라이스는 달아날 수조차 없었다. 그가 모든 걸 포기하고 팔을 늘어뜨렸다.
그러자 침실에서 응접실로 통하는 문이 열리더니 샤트린이 걸어 들어왔다.
“진짜네.”
샤트린은 붉은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붉은 가운이라니. 침대 위에서 본 건 흰 잠옷이었는데. 기가 막혔던 나머지, 블라이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신이 죽이려 했던 흰 잠옷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길고 구불거리는 적갈색 머리카락. 나이보다 성숙해 보이는 이목구비. 어둠 속에선 샤트린과 그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한 모습이었다.
“누구지?”
“누굴 거 같냐.”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였다. 그가 머리카락을 쥐고 확 끌어당겼다. 툭 소리와 함께 작은 핀이 떨어지더니, 가발이 벗겨지면서 길고 옅은 금발이 흘러내렸다.
레위시아였다.
샤트린처럼 화장하고, 샤트린의 잠옷을 입고, 샤트린의 머리카락과 똑같은 가발을 쓴 레위시아가 블라이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일은 카루스의 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블라이스를 주시해야 해.”
카루스는 이럴 때일수록 놈의 행동을 잘 지켜봐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놈은 데네브라의 명령이라면 왕족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자야.”
데네브라가 어떤 미친 명령을 내릴지도 모르거니와, 놈이 그간 오르테가 왕궁에서 얼마나 많은 정보를 빼돌렸는지 이들은 알 방법이 없었다.
율리아는 데네브라가 블라이스를 이용해 샤트린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공주궁에 암살자를 보내거나, 직접 쳐들어올지도 몰라요.”
레위시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럴 리가. 그건 너무 극단적인 추측 아냐?”
“오르테가는 조만간 바이칸의 식민지가 될 거라고 말했다면서요. 그 말이 무슨 뜻이겠어요. 어쩌면 황비는 샤트린 전하와 레위시아 전하를 모두 죽일 마음으로 여기 왔을지도 몰라요.”
다들 그럴 리가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양위 각서에 서명한 이상, 공주는 죽을 이유가 없었다. 만약 데네브라가 이 일을 계속 물고 늘어진다면 무례를 사죄하며 왕좌까지 포기한 가엾은 왕족을 지나치게 핍박한 셈이 된다.
레위시아가 말했다.
“황제가 아무리 무도한 자라 해도 그렇게까지 정신 나간 아내를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지는 않은데?”
“여긴 바이칸이 아니잖아요.”
율리아는 데네브라가 그렇게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아니란 점에 집중했다.
데네브라는 카루스에게 지나치게 집착해, 그가 주둔 중인 오르테가 왕국을 탐낼 수도 있었다.
그러려면 샤트린을 죽이고 그 죄를 레위시아에게 뒤집어씌워 두 명의 왕족을 모두 무너뜨린 뒤에, 보호 동맹국의 황비인 자신이 섭정이 되면 된다.
“오르테가를 차지하고 카루스 님을 자신의 수족으로 만드는 거죠. 제가 만약 데네브라 황비라면 남부로 올 때 그 정도는 목표로 잡았을 것 같은데요.”
“그렇군.”
카루스가 가장 먼저 율리아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는 코코가 데네브라 황비의 측근과 일행을 감시하는 동안, 자신은 그녀와 함께 블라이스의 움직임을 주시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대화를 나눈 지 고작 하루 만에 코코는 블라이스가 데네브라에게 불려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카루스는 블라이스가 데네브라를 만나고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몰래 몇 명의 수하를 불러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 일을 곧장 율리아에게 알렸고, 모두 함께 은밀히 공주궁으로 갔다.
샤트린은 어처구니없어 했다.
“그 여자가 날 왜 죽여?”
“그럴지도 모르니까 함정을 파겠다는 거야. 넌 다른 방으로 꺼져. 오늘은 내가 여기서 잘 테니까.”
“미쳤어? 레위시아, 네가 왜 내 침대에 누워!”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빨리 잠옷이나 가져와. 기본적인 보호구 정도는 해야 하니까 발목까지 내려오는 품이 넉넉한 옷으로. 가발은 코코가 최대한 비슷한 걸 준비했으니까 됐고…….”
“세상 어떤 멍청이가 너랑 날 헷갈려? 너 미쳤어?”
“야! 가져오라면 좀 가져와!”
레위시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샤트린은 이러다 네가 죽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도 측근 시녀를 시켜 자신의 잠옷 중에서 가장 치렁치렁하고 품이 큰 것을 챙겨 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