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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화 (220/319)

193화

양위하세요.

율리아의 말이 샤트린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어깨가 무거웠다.

샤트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싫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나. 왕이 되는 건 샤트린의 오랜 꿈이었다. 1왕자가 살아 있을 때조차 왕이 아니게 되는 자신의 모습은 상상하기 싫어 나쁜 생각이 들 때마다 애써 부정하곤 했었다.

하물며 그녀는 지금 왕위 후계자였다. 돌아가신 부왕께서 직접 선택한, 정당한 후계자.

샤트린이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율리아.”

이를 악다물고 눈물을 참아 내는 공주의 모습에 율리아가 조금 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말씀하세요.”

“거절하면 날 어떻게 할 건지 냉정하게 말해 줘.”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율리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데네브라 황비는 샤트린 전하를 용서할 생각이 없어요.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몰라요. 전쟁이란 게 그리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만, 절대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려우니까요.”

“내가 이대로 왕이 되면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거야?”

“모르겠어요.”

“하…… 네가 모르는 일도 있어?”

“제가 황제라면 안 해요. 제가 황비라도 안 해요. 하지만 그들은 제가 아니잖아요. 황제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황비는 종잡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대비해야 한다. 율리아는 코코가 했던 말을 샤트린에게 그대로 들려주었다.

샤트린이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난 참을 수 없었어. 시간을 돌린다 해도 똑같이 행동할 거야. 데네브라, 그 미친년의 머리카락을 죄다 뽑아 버렸어야 했는데! 그 입을 찢어 버렸어야 했어!”

샤트린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데네브라의 머리채를 잡은 채 계속해서 뺨을 후려갈기고, 온갖 상스러운 욕을 퍼부었지만 그래도 속이 시원하지 않다고 했다.

“약소국이라고 해도…… 한 나라의 왕이 죽었어! 내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고! 어떻게 황비라는 인간이…… 바이칸이란 거대 국가를 대표하는 여자가 그렇게까지 파렴치할 수가 있어!”

샤트린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그래도 공주는 울지 않고 독하게 눈물을 참았다.

“공주님.”

율리아가 샤트린에게 말했다.

“제 눈엔 다 똑같았어요.”

“뭐?”

“제가 아는 오르테가의 권력자들도 다 똑같았어요.”

마조람 후작 부부와 바실리, 그리고 크리스틴. 마조람을 필두로 더럽게 얽혀 있는 수많은 귀족과 눈먼 왕.

법은 해적을 증오하는데 귀족은 그들의 금화를 사랑하고, 평민은 빵 하나만 훔쳐도 손가락이 잘리는데 왕족은 사람을 죽여도 칭찬받았다.

“너 지금…….”

“다르다고 생각한 사람은 레위시아 님뿐이에요.”

“착각하지 마. 그 녀석이라고 뭐가 다를 것 같아? 왕족으로 태어나 왕족으로 자란 건 그 녀석이나 나나 마찬가지야. 우린 너 같은 사람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그것도 마찬가지야!”

“맞아요.”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살짝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그래도 그분은 멀게 느껴지지 않아요.”

레위시아는 다르다. 그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던 율리아가 이렇게 말했다.

“벽이 높은 사람에게는 먼저 다가와 주고, 미움이나 복수심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도 공감해 줘요. 몰이해를 부끄러워하고, 먼저 사과할 줄도 알아요. 결핍이 많은 만큼 풍요의 소중함을 알아요.”

“나는 아니었어?”

“전하는 긍지 높은 왕족이세요.”

샤트린이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괘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칭찬은 칭찬이 아니고, 허물은 허물이 아니었다.

율리아는 불과 며칠 전에 샤트린의 마음을 단단하게 했던 칭찬으로 그녀를 질책했다.

양위하세요.

율리아의 말이 자꾸만 어깨 위에 짊어진 짐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무거워서 더는 짊어지고 있을 수 없는, 너무 무거운 짐.

샤트린이 시선을 떨구었다.

율리아가 둥근 쟁반을 샤트린에게 밀었다.

황금색 테두리에 반짝이는 유리 장식, 접시 끝엔 색색의 꽃잎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온갖 모양의 과일과 디저트가 예쁘게 놓여 있었다. 빵은 버터가 잔뜩 들어가 부드러웠고, 얇은 햄과 두툼한 치즈가 보였다.

포크와 나이프마저 예쁘게, 흰 레이스 냅킨 위에 나비 모양의 리본으로 묶어서.

“……내 시녀들이네.”

샤트린은 누가 이 음식을 준비했는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음식을 만든 건 요리사겠지만, 이걸 하나하나 고르고 장식한 건 공주궁의 시녀들일 터였다.

샤트린이 사랑하고, 샤트린을 사랑하는 시녀들.

율리아가 빵을 잘라 샤트린에게 건네었다.

“끼니를 거르면 변덕이 심해지는 분이니까 꼭 하나라도 입에 넣는 걸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이왕이면 배가 부를 때까지 드시라고.”

“…….”

“제게 머리를 숙였어요.”

율리아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왕국의 공주를 앞에 두고서도 한 치도 냉정함을 잃지 않던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공주궁의 시녀들은 샤트린을 닮아 오만하고, 최고의 왕족을 모신다는 긍지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다. 율리아와 사이가 나쁘진 않았으나 그녀를 평민 이상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한데 그 자존심 높은 시녀들이 율리아에게 머리를 숙였다. 다 함께 모여 서서 샤트린 공주님께 이걸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또 뭐라고 했는데?”

“그냥 그게 다였어요. 굶지 말고, 잠을 푹 주무시라고.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만 했어요.”

제발 샤트린을 살려 달라거나 감옥에서 나오게 도와 달라는 부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건 공주궁의 시녀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긍지였다.

우리 공주님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요. 율리아는 그들이 그렇게 외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샤트린도 마찬가지였다.

내내 꾹 눌러 참았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샤트린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울고 있었다. 그녀의 평소 성격을 생각해 보면 울 때는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엉엉 울 거라 여겼는데, 그렇지 않았다. 소리도 없이 눈물만 뚝뚝 떨어졌다.

율리아는 샤트린의 손에 냅킨을 쥐여 주고, 조용히 몸을 움직여 창가로 가서 섰다.

샤트린은 그리 오래 울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눈물을 삼키고 시녀들이 보내 준 음식을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율리아.”

“말씀하세요.”

“넌 지금까지 내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 줬는데, 이번에도 그럴 참이야?”

“레위시아 님이 원하니까요.”

“만약 내가 네 제안을 거절한다면…… 내 어머니의 불륜과 4왕자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떠벌리겠지?”

샤트린이 물었다. 공주를 등지고 서 있던 율리아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왜?”

“그건 샤트린 전하의 잘못이 아니니까요.”

담백한 대꾸였다. 샤트린은 그 외에도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 버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을 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볼게.”

“네.”

“레위시아가 날 살리려고 데네브라 황비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게 사실이야?”

“그러셨어요.”

“그렇구나.”

샤트린이 아주 길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난 왕이 되기 위해 레위시아를 죽이려고 했는데, 그 녀석은 날 살리려고 원수 앞에 무릎을 꿇는구나.

누가 왕이 될 자인가.

결심을 마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이 갑자기 사라져 등에 날개가 돋아난 것만 같았다.

나이프와 포크를 감싸고 있던 나비 모양의 매듭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샤트린이 말했다.

“양위하겠어.”

오르테가는 너무 약하다. 약한 나라엔 강한 왕이 필요한 게 아니라, 현명하고 다정한 왕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국왕의 죽음 이후, 왕위 후계자인 샤트린 오르테가 공주가 2왕자 레위시아에게 왕좌를 양보했다.

그녀는 사적인 감정으로 바이칸의 황비를 폭행해 양 국가 간의 우호적 관계에 해악을 끼친 죄를 물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고 커다란 긍지를 내놓겠다고 했다.

데네브라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샤트린이 갇혀 있는 감옥으로 쳐들어가 공주를 직접 처형하겠다고 난동을 부렸으나, 발 빨리 움직인 레위시아가 샤트린을 용서하고 공주궁으로 보내 근신을 명령함으로써 두 사람의 접촉을 막았다.

그날 밤 코코가 노크도 없이 율리아의 방문을 열었다.

“찾았어.”

“정말요?”

그녀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네브라 곁에 크세노 황제의 끄나풀이 적어도 셋 이상, 그것도 황제에게 직접 연락할 수 있는 자들인 것 같아. 데네브라가 머무르고 있는 왕비궁에 카루스 님이 말했던 황제의 새들이 드나들고 있어.”

“이제 됐네요.”

율리아가 환하게 웃었다.

카루스와 코코는 데네브라의 환영 연회가 있던 날부터 왕궁 안에 숨겨 둔 첩자들과 함께 은밀하게 움직였다. 데네브라가 묵고 있는 왕비궁은 코코가 심어 둔 첩자들로 이미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황비의 모든 말과 행동, 바이칸에서 온 황비 일행의 모든 말과 행동이 두 사람에게 보고되었다.

율리아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크세노 황제는 데네브라를 남부로 보내 놓고도 완전히 믿지 못해 그녀를 감시하고 억제할 사람을 여럿 붙여 놓았다.

“그리고 하나 더.”

코코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데네브라가 조금 전에 블라이스를 불러들였어.”

그렇구나. 율리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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