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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화 (219/319)

192화

39. 때로는 죽은 왕이 낫다

율리아가 가장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거침없이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샤트린이 그 뒤를 쫓았다. 병사들이, 시녀들이 달리고 있었다.

왕이 죽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근래 국왕의 병이 깊어 침대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긴 했으나, 그게 죽음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율리아는 머릿속을 뒤져 왕이 이토록 빨리 죽었던 과거가 있었는지 떠올려 보았다.

없었다. 왕은 대체로 계속 살아 있는 편이었다. 율리아가 음지에서 활동할 때는 왕궁에 관심이 없어 그의 건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지 않았고, 코코와 가까워진 뒤에는 멀리에서 소문을 접하기만 했다.

어쨌거나 왕은 그때도 살아 있었다. 여덟 번째의 율리아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던 것도 지금의 왕이었다.

“샤트린!”

율리아는 본궁 앞에서 레위시아와 코코를 만났다.

샤트린이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레위시아도 지금 막 도착했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궁 안으로 들어가 왕의 침실로 달려갔다.

그 안에는 울며 소리치는 레위시아의 어미가 있었다.

평생 불행했으나 서로를 놓지 못해 집착하던 연인.

레위시아의 어미는 죽은 왕을 향해 온갖 원망과 애원의 말을 늘어놓았다. 그녀의 울음은 죽음 직전의 짐승을 닮아 있었다. 늙은 시녀가 매달리다시피 끌어안고 달래었으나 아무 소용없었다.

의사들이 모두 엎드려 있었다. 침대에 모로 누운 채 죽은 왕과 왕의 시신을 끌어안고 절규하는 애첩, 그리고 바닥에 이마를 댄 채 엎드려 왕을 부르는 시중인들.

샤트린과 레위시아는 그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율리아는 그들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코코가 율리아의 손을 잡고 들어가지 말라는 뜻으로 살짝 고개를 저었다.

“네가 연회장으로 가자마자 본궁에서 사람이 나와 왕께서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했어. 레위시아 님은 혼자 늦게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코코.”

율리아가 코코에게 속삭였다.

“병으로 죽은 게 확실해요?”

“쉿.”

코코가 작게 경고하더니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폈다. 레위시아의 어미가 워낙 큰 소리로 울고 있어, 두 사람의 대화에 귀 기울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안심한 코코가 율리아에게 말했다.

“몰래 심어 둔 의사한테 물어봤어. 누군가 왕을 해치고 싶어 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아니래. 나도 믿기지 않지만…… 병으로 죽은 게 확실한 모양이야.”

“정말요?”

“1왕자가 죽은 뒤부터 지독한 무기력증에 시달렸대. 식사는 거의 하지 않고 술로 배를 채우고, 매일 밤 악몽과 통증에 시달려 갈수록 독한 약을 찾았고.”

“마음의 병이라고 했잖아요.”

“마음의 병이 깊어져 몸의 병이 된 거지. 마조람 후작을 숙청하는 과정에선 그가 정말 반역이라도 일으킬까 봐 노심초사해서 재판하는 내내 잠을 못 잤다고 하더라고.”

의사들은 마약성 진통제까지 몰래 들여가며 왕의 병을 숨기려고 했다. 아마도 왕의 명령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 코코가 염려 가득한 시선으로 레위시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율리아도 그를 바라보았다. 레위시아는 석상처럼 굳어 그저 서 있기만 했다.

“전하께서 충격이 크겠네요.”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고 해도 아버지니까. 게다가 평생 미워하기만 하다가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누지 못했어. 차라리 다 포기하고 미워할 수 있는 악인이면 모르겠는데, 늘 이도 저도 아닌 태도였으니.”

레위시아가 마침내 굳은 몸을 움직였다. 곁에 멍하니 서서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리는 샤트린의 어깨를 감싸 안은 그는, 그녀를 왕의 침대로 이끌었다. 그러곤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게 했다.

“샤트린, 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드려.”

“아…… 아버지…….”

샤트린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죽은 왕의 손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레위시아는 우두커니 선 채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그의 어머니는 미친 사람처럼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울었다. 그렇게 울면 왕이 죽었다는 현실에서 달아날 수 있다는 듯이.

“들어라.”

레위시아가 말했다.

“국왕께서 서거하셨다. 종탑에 사람을 보내 비보를 알리고, 원로들을 불러 왕의 장례식을 준비케 하라.”

이후엔 며칠 동안 정신없이 보냈다. 율리아는 레위시아의 수석 시녀였기에 왕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내내 많은 업무에 시달렸다.

후작 부인을 살해한 죄로 감금당한 왕비를 대신해 원로들이 달려 나와 왕의 시신에 기도하고 왕가의 무덤을 열었다.

샤트린은 무너지고 있었다.

왕비를 감싸고 그녀의 비밀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샤트린은 이 모든 비극을 씩씩하게 이겨 낼 힘이 없었다. 치열한 왕위 경쟁에 더불어 바이칸 제국의 눈치를 보느라 한동안 살벌한 긴장 속에 살아야 했던 탓도 컸다.

왕의 장례식을 이끌어야 할 후계자가 공주궁에 틀어박혀 온종일 울기만 하자, 장례식을 준비하는 자들은 절로 레위시아를 찾게 되었다.

“시녀님!”

장례식 당일 아침이었다. 율리아는 아무 장식 없는 검은 원피스에 베일을 눌러쓰고,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왕궁 기사 하나가 다급한 얼굴로 율리아를 찾았다.

“시녀님, 큰일 났습니다.”

“또 무슨 일이 있나요?”

“데네브라 황비가 남부 함대 기지 앞으로 뱃놀이를 간다면서 몇몇 귀족들을 초대했다고 합니다.”

“……네?”

되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가 기사에게 다가갔다.

“뱃놀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면서 뱃놀이를 가겠다고요?”

“그게…… 본 적도 없는 신하가 죽을 때마다 왕이 장례를 핑계로 걸음을 멈추면 나라가 돌아가겠냐면서, 자신은 왕의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으니 너희는 너희 의무나 다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미쳤구나. 율리아가 중얼거렸다.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그걸 비밀에 부칠 수는 없나요?”

“이미 공주궁과 본궁, 원로원까지 소식이 전해진 것으로 압니다.”

안 돼. 율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레위시아는 괜찮았다. 그는 철없어 보이지만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샤트린은 아니었다. 공주는 지금 너무 불안한 상태였다.

“당장 공주궁에 사람을 보내서 샤트린 전하가 데네브라 황비에게 가지 못하도록 조치하세요. 이 일은 되도록 왕궁 내 비밀로 묻되, 뱃놀이에 동참하는 귀족 가문은 반드시 숙청당할 거라고 경고하시고요.”

빠르게 지시하는 율리아에게, 코코가 다가와 말했다.

“늦었어.”

그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샤트린 공주가 데네브라 황비의 머리채를 잡았어.”

* * *

샤트린이 데네브라를 폭행했다. 머리채를 잡은 것으로도 모자라 뺨을 때리고 욕설까지 퍼부은 것으로 전해졌다.

뱃놀이를 간다면서 외출을 준비하던 데네브라는 샤트린에게 한차례 얻어맞은 후, 크게 노하며 공주를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이날은 왕의 죽음을 기리는 엄숙한 날이었다. 그러나 왕궁 어디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샤트린 공주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 거야. 저 황비가 보통 황비인가? 우린 이제 다 죽었어!”

“그럼 왕좌엔 누가 앉게 되는 거야?”

“알 게 뭐야. 다 죽을 텐데. 애꿎은 백성들이 제일 먼저 죽어 나가겠지.”

“황비 정도 되는 사람을 쥐어 팼으니, 샤트린 전하도 벌을 받게 되는 건가? 황족 모독죄로?”

술렁거리는 소리가 무덤까지 이어졌다. 왕가의 무덤에 왕의 시신을 안치한 뒤, 레위시아는 남은 행사를 원로들에게 맡기고 데네브라를 찾아갔다.

그러곤 그녀에게 깊이 머리를 숙였다.

“용서해 주십시오.”

데네브라의 몰골이 엉망이었다. 손이 맵기로 유명한 샤트린이 전력을 다해 두들겨 팼는지, 황비는 아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가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원하는 건 뭐든 다 해 드릴 터이니, 샤트린 공주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가라고 하였다. 나가라, 나가!”

“오르테가에 하나뿐인 공주입니다. 한 번만 눈감아 주시면 반드시 보은하겠습니다. 이런 일로 전쟁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네 진정 오르테가가 불에 타 지도에서 사라지는 꼴을 보고 싶은 것이냐?”

데네브라는 화를 풀 생각이 없었다. 감히 약소국의 공주가 황제의 아내에게 손찌검하다니. 이곳이 만약 바이칸이었다면 샤트린은 이미 처형당해 죽은 시신이 되어 있을 것이다.

레위시아는 고민하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두 손을 바닥에 대고 머리를 조아렸다.

“용서를 청합니다.”

이날, 레위시아가 샤트린을 위해 황비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다는 소식이 은밀히 퍼져 나갔다. 코코는 혀를 차면서도 잘했다며 그를 칭찬했고, 율리아는 이 상황을 타개하려 머리를 싸맸다.

방법이 없을까. 코코는 샤트린이 황비의 눈 밖에 나서 이대로 죽는다면 레위시아가 저절로 왕이 되니 이득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코코의 표정도 좋지만은 않았다.

레위시아는 샤트린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고 말했다.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율리아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샤트린 전하.”

샤트린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녀의 몰골도 엉망이었다.

율리아는 감옥으로 내려와 창살 앞에 섰다. 그러곤 간수에게 눈짓해 문을 열게 시켰다.

율리아가 가져온 건 간단한 식사와 웬 문서였다.

“공주궁의 시녀들이 걱정합니다. 식사라도 좀 하세요.”

“할 말 없으니까 나가.”

“샤트린 전하.”

율리아가 다시 말을 걸었다. 작고 낮은데, 귀에 착 달라붙도록 선명한 목소리였다.

“레위시아 전하께 양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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