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왕궁이 부산스러웠다. 갑작스레 연회를 요구한 데네브라 황비 때문이었다.
병상에 누워 있는 국왕을 생각해 2, 3일 뒤에나 환영 연회를 열려고 했던 샤트린은 반항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끌려 나와 연회 준비를 시작했다.
율리아 역시 명령과도 같은 초대를 받았다.
“무혈 제독 카루스 란케아 님과 동행하라는 명령이셨습니다.”
“황비께서 직접 말씀하셨나요?”
“그렇습니다.”
“꼭 참석하겠습니다. 초대에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세요.”
황비의 시녀가 물러간 뒤, 율리아가 방으로 돌아와 말했다.
“제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카루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진심인가?”
“그럼요.”
“데네브라가 네 입을 찢어 버리겠다고 했다며? 그게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할 소리라고 생각해?”
“마음에 안 드는 상대에게 아끼는 시녀까지 보내서 연회에 초대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특별히 마음에 안 드니까 그러는 거겠지.”
“사랑의 저편에 있는 건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저한테 관심이 아주 많아 보이는데 잘됐네요.”
율리아가 드레스 룸의 문을 열었다.
“힘센 어린애가 놀아 달라니까, 관대한 어른은 놀아 줘야죠.”
물론 그게 그녀가 원하는 관심은 아니겠지만.
연회장엔 꽤 많은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이칸의 권력자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려는 귀족들과 어떻게든 황비의 눈에 들어 몰락한 파벌을 일으키려는 자들, 그리고 샤트린과 그녀의 측근이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건 기회였다. 샤트린은 며칠 전부터 측근들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왔던 말을 떠올렸다.
“전하, 최근 레위시아 왕자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마조람 파벌의 숙청 이후, 그 모든 게 왕자의 공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오르테가엔 새로운 사상과 신념을 가진 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바이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반제국파는 모두 왕자에게 빌붙었으니, 우리는 남아 있는 자들을 모두 흡수해 저들이 공주 전하의 후계권에 도전하지 못하게 쐐기를 박아야 합니다.”
“데네브라 황비의 마음을 손에 넣으십시오. 황비가 공주 전하를 지지한다면, 병상에 누워 계신 국왕 전하의 지지보다 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지긋지긋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오르테가는 크나큰 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몰라 왕국의 명운을 하늘에 맡기자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돌았다.
왕위 후계자라곤 하나 자신의 위치가 불안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샤트린은 알았다.
무혈 제독 때문이었다. 카루스 란케아가 노골적으로 레위시아의 편을 들면서 여론이 눈에 띄게 바뀌고 있었다.
만약 샤트린이 데네브라 황비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그녀는 지지 기반이 부족해 아무 힘도 없는 반쪽짜리 왕이 될 수도 있었다.
오르테가는 너무 약했다. 약해서 강한 왕이 필요했다.
“황비 전하.”
샤트린이 데네브라의 곁에 다가가 말을 걸었다.
“연회는 마음에 드세요?”
“난잡하고 지루해.”
“하면 원하는 것을 말씀하세요. 오르테가는 바이칸의 벗이니, 황비 전하를 성심껏 모시도록…….”
“그런 식으로 애쓸 것 없다. 오르테가가 왜 바이칸의 벗이라는 거야, 잠재적 원수지. 너희는 언젠가 반드시 크세노의 뒤통수에 칼을 꽂으려 할 텐데, 내 앞에서 가증스럽게 굴어 봤자 아무 소용없어.”
“저희는 절대 바이칸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절대로’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말렴. 내가 비록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절대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을 믿으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지.”
“크리스틴 마조람이 전하께 어떤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는지는 모르나, 반역자의 딸입니다. 황비께서 오해하는 바가 있다면 마땅히 풀어 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넌 내가 여기 왜 왔는지도 모르는구나.”
데네브라는 샤트린이 자꾸 말을 걸어서 짜증이 나 있었다. 연회장을 한 바퀴 휘 둘러본 황비가 샤트린에게 물었다.
“왕이 되고 싶으냐?”
“저는…… 부왕께서 선택한 왕위 후계자입니다.”
“후계자가 왜 후계자인 줄 아니? 왕이 되지 못했으니까 후계자인 거야.”
데네브라가 웃으면서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남부의 왕이 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을 하나 알려 줄까.”
“그게 무엇입니까?”
“왕을 죽이고 내 남편과 결혼해.”
샤트린의 몸이 고장 난 마차 바퀴처럼 덜컥 멈추었다. 그녀는 데네브라가 내뱉은 말을 이해하지 못해 한동안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왕을 죽이고 황제와 결혼하라니.
데네브라가 뭘 그렇게 놀라느냐며 샤트린을 비웃었다.
“공주 네가 크세노와 결혼하기만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남부의 왕이라 불리게 될 거야. 내가 내 고향 땅에서 왕이라 불리는 것처럼. 황제에게 결혼은 전략적 동맹의 계약서 같은 거니까.”
“그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도와 달라 애걸하고 싶어서 이렇게 내 곁에 거머리처럼 붙어 있는 주제에, 그 정도 강단도 없어서 무슨 왕이 되겠다고.”
샤트린은 데네브라의 조롱을 견딜 수 없었다. 왕족인 그녀는 이렇듯 노골적으로 천박한 자가 저보다 훨씬 고귀한 황족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데네브라는 손가락으로 과일을 집어 먹다가 그 손을 술에 씻고, 노예를 불러 그걸 마시게 했다. 그녀에겐 그 모든 게 일상이었다.
“너무 애쓰지 말렴.”
데네브라가 술에 젖은 손가락으로 샤트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너희 작은 나라는 조만간 바이칸의 식민지가 될 거란다.”
“왜…….”
“그런 곳에 왕이 무슨 소용이야. 너무 애쓰다가 꽃다운 나이에 죽어 썩지 말고, 그냥 인생을 즐겨. 너도 왕족이니까 알잖아? 정복 국가의 백성들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안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문제였다.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지 말란 소리야. 왕족이 왜 왕족인 줄 알아? 백성이 다 죽고 불에 탄 땅만 남아도 그곳을 국가라 부를 수 있는 선택받은 존재이기 때문이잖아.”
“저는 오르테가를 사랑해요.”
“웃기네. 오르테가가 아니라, 오르테가의 왕족인 너 자신을 사랑하는 거겠지.”
“저는…….”
“됐어. 재미없구나. 꺼져라.”
연회가 길어질수록 샤트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는 이 자리가 불편하고 꺼림칙해 어쩔 줄을 모르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연회를 등지고 자신의 궁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녀는 국빈을 맞이할 의무가 있는 왕족이었다.
율리아는 그때 나타났다.
남부의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짙푸른 드레스에 새카만 허리띠.
율리아는 연회장에 들어오자마자 데네브라와 시선을 맞추었다.
“율리아 아르테.”
데네브라가 그녀를 불러들였다.
연회장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율리아의 모든 것을 샅샅이 헤집었다. 드레스와 구두, 장신구와 걸음걸이에 이르기까지. 그들 중 일부는 평민 출신 귀족을 어떻게든 흠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데네브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신기한 일이지 않으냐. 저 계집이 나타나자마자 이 난잡하고 지루한 연회장이 재미있어졌다.”
“율리아…… 말씀이신가요?”
“그래, 카루스 란케아의 연인이라지?”
샤트린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데네브라를 화나게 하지 않으려면 아니라고 부정해야 하는데, 그러면 거짓말을 한다고 더 화를 낼 것 같았다.
율리아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샤트린은 율리아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와 주기를 바랐다.
“그래, 공주. 이건 어떠냐.”
그때 데네브라가 샤트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 계집을 지금 내 앞에서 죽여라. 그러면 내일 아침에 너를 왕으로 만들어 주마.”
데네브라는 이상했다. 목소리는 낮은데 비음이 섞여 있고, 말투는 권위 있으면서도 어린애 같았다. 그러니 황비의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샤트린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황비의 미친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전보다 조금 단단해진 목소리가 샤트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율리아는 연회장의 문을 열자마자 데네브라와 눈을 마주쳤고, 그 옆에서 화를 꾹꾹 눌러 담고 있는 샤트린의 얼굴을 보았다.
샤트린의 불같은 성미도 데네브라 황비 앞에선 인내 가능한 것이었나. 그녀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귀족들의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율리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보육원 평민 출신 왕궁 시녀가 공신 백작이란 지위까지 손에 넣었으니,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화제에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연회장은 화려했다. 샤트린이 데네브라의 환심을 사려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척 노력했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연회장을 채우고 있는 오르테가의 귀족들은 들뜬 얼굴로 한껏 치장을 뽐내고 있었다.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건 오히려 바이칸에서부터 황비를 따라온 사람들이었다.
독한 술이 풍기는 알싸한 향과 무르익은 과일의 달콤한 냄새. 율리아는 그 사이를 유유히 걸었다.
그렇게 걸어 황비와 공주 앞에 도착한 율리아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황비 전하와 공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샤트린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데네브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율리아.”
데네브라가 말을 꺼냈다.
“내가 방금 공주에게 너를 이 자리에서 죽이면 왕으로 만들어 준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를 죽이고 싶으세요?”
“너라면 열 번, 스무 번도 더 그렇게 하고 싶지 않겠어?”
“괜찮습니다. 샤트린 공주 전하는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거든요.”
“그걸 어찌 아느냐.”
“저희 공주 전하께서는 긍지 있는 왕족이십니다.”
율리아의 말투는 가벼웠다. 그러나 그걸 받아들이는 샤트린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공주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율리아를 바라보다, 질끈 눈을 감았다.
긍지가 있는 왕족. 샤트린이 좁은 가슴에 긴 숨을 불어넣었다.
그때였다.
데네브라가 율리아에게 왜 카루스와 함께 오지 않았는지 캐묻고, 귀족들은 세 사람의 대화가 궁금해 춤을 추면서도 귀를 기울이던 그 순간, 여름밤이 무색하게 오싹한 기운이 연회장을 덮쳤다.
샤트린의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율리아가 연회장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상했다.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온 세상이 축축한 안개로 뒤덮인 것만 같았다.
멀리서 비명이 들렸다. 비명은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연회장 앞에 다다랐고, 곧 울음이 되었다.
활짝 열린 문밖에서 병사들이 절규하고 있었다.
“국왕 전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