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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화 (217/319)

190화

* * *

“당신은 카루스 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분을 블라이스 백작처럼 수집해 놓고 지배하며 자랑하고 싶은 게 아닌가요?”

“어디 한번 계속 지껄여 보아라.”

“전형적인 폭군의 방식이잖아요. 우리가 흔히 아는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폭군과 그에게 사로잡힌 포로. 집착과 폭력을 사랑이라고 포장하곤 되레 피해자인 척, 가증스럽게 선전하죠.”

“너 지금 나를 화나게 하려는 거냐?”

“아니요.”

“이상하게 구는구나. 나를 화나게 해서 네가 얻을 수 있는 게 뭐지? 난 지금 당장이라도 크세노에게 사람을 보내 오르테가를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할 수도 있어.”

“그건 블라이스 백작이 이미 했을걸요. 황제가 정한 황비 전하의 역할은 그게 아닐 거예요.”

“뭐?”

“설마 블라이스 백작이 진심으로 황비 전하께 충성한다고 믿고 계신 건 아니겠죠.”

“놈은 내 것이다. 네 말대로, 내가 수집하고 지배하며 자랑으로 삼았지.”

“아뇨. 그는 기회주의자예요. 누구보다 전하께서 잘 아시잖아요. 그런 사람이, 통일 대륙을 눈앞에 둔 위대한 황제를 놓고 고작 불륜을 꿈꾸며 황족의 권위를 버리겠다는 전하에게 충성할 리가 없잖아요.”

블라이스의 뺨에 긴 상처가 생겼다. 데네브라의 팔찌에 긁힌 자국이었다. 쓰라린 통증과 함께 붉은 핏물이 배어 나와, 블라이스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데네브라 님, 왜 이렇게 화가 나셨습니까.”

다짜고짜 그에게 손을 휘두른 데네브라가 던지듯 몸을 움직여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있는 곳은 오르테가의 왕비가 머물던 왕비궁이었다.

데네브라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네 자리로 와.”

블라이스가 곧장 움직였다. 그는 황비의 발아래 발끝이 머무는 그 자리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개처럼 엎드렸다.

“블라이스.”

“말씀하십시오, 데네브라 님.”

“율리아 아르테에게 놀아났느냐?”

“예?”

“그 계집의 수작질에 빠져 등신처럼 놀아났느냐고 묻는 거다. 말해 봐라. 뭐라고 속살거리더냐. 황비 데네브라는 크세노 황제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니, 빨리 정신 차리라고 말하더냐?”

“그런 적 없습니다. 저는 지금 데네브라 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는…….”

“닥쳐라!”

데네브라가 한 번 더 손을 휘둘렀다. 블라이스를 때린다기보다는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찌 그 계집이 네가 나 모르는 사이에 주인을 바꾸었다고 지껄이는 거야! 내가 그깟 빤히 보이는 이간질 따위에 넘어갈 사람이라고, 어찌 함부로 여기느냐는 말이다! 네놈이 얼마나 얕보였으면! 얼마나 등신처럼 굴었으면!”

블라이스는 바닥에 이마를 댄 채 공손히 엎드려 있었다. 언젠가 그가 오르테가의 국왕에게 요구했던 그 자세 그대로였다.

그는 머리 위로 쏟아지는 데네브라의 고함을 들으면서, 율리아를 생각했다.

악마 같은 여자. 악담도 이런 악담이 없었다.

율리아가 데네브라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던 건 부두에서 왕궁으로 오는 마차 안이 전부였을 것이다. 한데 그 안에서 그 짧은 사이에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눈 건지, 데네브라가 블라이스의 배신을 입에 담고 있었다.

“네놈은 내가 잘 알아. 너는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 못하지.”

“데네브라 님, 당신은 제 모든 것입니다.”

“그래, 내가 네게 생명을 주었어. 복수할 기회를 주고, 권력을 주었어. 네 모든 건 전부 나로 인해 존재하는 거야.”

데네브라의 목소리엔 감출 수 없는 노여움이 깃들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잠시 평정심을 잃었던 블라이스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크세노 황제는 제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데네브라 님, 저를 의심치 마세요.”

“그래, 너는 나를 사랑하지.”

데네브라가 길고 깊게 심호흡했다. 블라이스를 후려치다 반쯤 부러진 손톱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손톱 끝에 달린 둥근 고리 모양의 장식을 이리저리 비틀어 빼냈다.

그러곤 블라이스에게 물었다.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는 어디에 있느냐.”

“예?”

“돌이킬 수 없는 사랑 말이다. 네게 선물로 주었던 그 브로치, 그걸 가져오너라.”

“전하, 그것은…….”

“율리아 아르테가 말하였다. 네가 그 보석을 크세노에게 돌려주었다고. 그래서 황제가 나를 의심한 나머지, 남부로 보내 놓고 첩자를 붙여 감시하고 있다고!”

“아닙니다!”

“뭐가 아니라는 거야! 당장 가져와라! 결백을 증명하려거든 보석을 가져와!”

블라이스가 머뭇거리자 데네브라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변덕스럽게 휘몰아치는 그녀의 분노에 결국엔 블라이스도 다급한 변명을 쏟아 낼 수밖에 없었다.

“그건 황제가 아니라 율리아 아르테에게 주었습니다!”

“……뭐?”

데네브라가 조용해졌다. 사납게 쏟아지던 말들도 우뚝 멈추었다. 심호흡하는 것조차 잊은 그녀가 책을 읽듯 딱딱하게 물었다.

“율리아 아르테에게 주었어?”

“전하.”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을? 네가 날 사랑한다면서 모든 걸 바치겠다고 맹세하기에 어여뻐 상으로 주었던 그 귀한 것을, 그 계집에게 냉큼 주었어?”

“그것이 크세노 황제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면, 그건 필시 저와 전하를 농락하려는 율리아 아르테의 계략일 것입니다. 전하, 분노를 가라앉히고 제 말을…….”

“그 계집을 사랑해?”

“전하, 아닙니다!”

“그 계집이 탐나느냐? 네가 네 품에 그 계집을 안겨 주길 바라? 그랬으면 좋겠어?”

“오해이십니다. 제게는 오직 당신뿐입니다.”

“이제 알겠다.”

데네브라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몸을 숙여 블라이스의 눈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에게서 망가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는 크세노의 것이 된 게 아니라, 율리아 아르테의 것이 되려 하는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데네브라 님의 충실한 번견입니다.”

“아직은 그렇지.”

붉은 입술에 비틀린 미소가 맺혔다. 데네브라는 블라이스를 향해 연민을 가득 담아 말했다.

“블라이스, 너는 나를 닮았어. 내가 카루스 란케아를 손에 넣을 수 없어 미쳐 가듯, 너도 그 계집을 손에 넣을 수 없어 미쳐 가는 거야.”

“데네브라 님!”

“영악한 계집이구나. 우리 둘 사이에 분란을 만들어 봤자 무슨 소용인가 했더니, 미끼를 마구 던져 놓고 구경하려는 셈이었나.”

“조심하셔야 합니다. 영리한 여자입니다.”

“영리한 건 그리 대단한 장기가 아니란다. 블라이스, 이 세상엔 남들보다 영리하다는 이유로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 그 계집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빠르게 몸을 일으킨 데네브라가 손을 흔들어 시종을 불러들였다.

“오르테가의 왕위 후계자에게 가서 전해라. 오늘 저녁, 왕궁에서 가장 큰 연회장에서 환영 연회를 열어야 할 것이라고.”

“알겠습니다.”

“나는 바이칸의 황비다. 오르테가는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데네브라가 쉬겠다며 준비된 방으로 들어간 뒤, 바닥에 네 발로 엎드려 있던 블라이스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손가락으로 뺨에 난 상처를 훑었다. 쓰라린 통증마저 반갑게 느껴질 만큼, 그는 몹시 들뜬 상태였다.

“후…….”

블라이스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자칫 잘못하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숨을 고른 뒤엔 입술을 꽉 깨물어야만 했다.

블라이스는 율리아를 생각했다.

마차 안에서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모르나, 율리아는 데네브라를 잔뜩 뒤흔들어 놓는 데에 성공했다.

황비는 평소와 같아 보였지만, 평소와 같지 않았다.

바이칸 황궁 안에서 데네브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제국의 모든 것이 황비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녀는 짜증이 난다는 이유로 아무나 죽일 수 있었고, 매일 연회를 열어 수많은 사람 속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오르테가였다.

“누가 이길까.”

데네브라와 율리아의 싸움. 생각만 해도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데네브라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이었으나 크리스틴 마조람 같은 미숙아는 아니었다. 그래서 블라이스는 율리아의 천적은 데네브라처럼 종잡을 수 없는 광인일 거라 믿었다.

어쩌면 율리아는 좌절할지도 모른다. 데네브라는 수치를 모르기에 솔직하고, 때로는 순수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율리아의 방식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나의 여신, 나는 당신이 승리하길 바란다.

블라이스가 데네브라와 율리아, 두 사람 중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 * *

세상엔 자신 안에 자신이 없어서 그 빈 자리를 타인으로 채워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관심이나 사랑, 그게 안 되면 동정이나 미움으로라도. 타인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자.

율리아는 데네브라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율리아는 자신 안에 자신밖에 없어서 타인에게 내어 줄 빈자리가 없던 사람이었다. 그녀 마음의 감옥 안엔 오래도록 율리아 아르테뿐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천적이 될 수도 있었다.

“여덟 번째의 제가 데네브라 황비를 만났다면 필패했을 거예요. 저는 적에 대한 이해가 승리의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죽은 후작 부인을 이해했듯이.”

카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의 너였다면 데네브라를 이해할 수 없었을 거란 말이군.”

“네,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아홉 번째의 율리아는 이제 데네브라마저 이해할 수 있었다.

“저는 데네브라 황비를 고립시킬 거예요.”

그리하여 그녀가 타인의 관심을 모두 잃고 외로움과 슬픔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도록 하겠다. 강해 보이려고 미친 척하는 사람이 얼마나 추하고 애처로운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

“황비는 진짜 사랑이 뭔지 몰라요.”

율리아는 확신했다.

“그걸 깨닫기엔 이미 너무 늦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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