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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화 (216/319)

189화

38. 천적이란

율리아는 두렵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두려운데, 두렵지 않았다. 이 마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몰랐다.

이번 삶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면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빨라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봐 불안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건 싸우는 건 두렵지 않았다. 아무리 힘세고 교활한 자가 나타난다고 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율리아는 자신의 과거를 믿었다. 여덟 번의 죽음과 아홉 번의 삶. 그녀는 매번 최선을 다해 그 삶을 살았고, 시도했고, 부딪쳤다.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한 채 별안간 죽어야만 했던 대적자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녀의 과거가 더 값졌다.

데네브라가 아무리 무서운 여자라고 해도 아홉 번째의 율리아 아르테에게 비할 바는 아니다.

율리아는 스스로 다짐했다.

데네브라는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감았던 눈을 떴다. 황비의 곁에는 젊은 시녀가 다소곳이 앉아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데네브라가 율리아에게 물었다.

“너도 시녀라고 들었는데.”

“레위시아 왕자 전하의 수석 시녀입니다.”

“손을 내밀어.”

데네브라가 자신의 시녀에게 명령했다. 그게 저를 향한 명령인 줄 몰라 우물쭈물하던 시녀가 뒤늦게 눈치를 채고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봐라.”

율리아의 시선이 시녀의 손에 닿았다.

익숙한 반지가 눈에 띄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첫 번째의 율리아 아르테에게 보물이었던 반지.

저게 왜 저기에 있나.

율리아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분명 블라이스 백작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는데.

“블라이스 백작이 크리스틴보다 먼저 제 존재를 알렸나 보네요.”

“블라이스와 가까이 지냈더냐?”

“그럴 리가 있나요.”

율리아가 반지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미련이라곤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은 눈으로 데네브라를 바라보았다.

“저는 남의 것은 탐내지 않는 주의라서요.”

데네브라가 또 한 번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가까이서 마주하고 보니 황비는 제대로 웃을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진심으로 웃는 법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얼굴을 살필 마음의 여유가 없어, 웃음이 웃음이 아니게 된 줄도 모르는 사람.

“블라이스가 내 것이니까 탐내지 않겠다는 말은 놈이 내 것이 아닌 경우엔 냉큼 주워 가겠다는 말이렷다.”

“글쎄요. 제가 나서서 줍지 않아도 눈뜨면 발아래 엎드려 있을 것 같은데요.”

“하!”

데네브라의 눈에 비친 율리아 아르테는 목숨이 여러 개인 양 막돼먹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계집이었다.

데네브라가 율리아를 잡아먹을 듯 사납게 노려보았다. 시녀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녀를 정신 나간 사람 보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율리아 아르테의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녀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는 말은 도발에 가까운데 행동은 예의 바르기 그지없고, 말투는 다정한데 눈빛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오르테가의 평민 백작. 데네브라는 남부로 향하는 배 안에서 율리아 아르테에 관한 소문에 대해 들었다.

어떤 여자인지,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 누구에게 충성하고 있는지.

카루스와는 왜 엮이게 되었는지.

“율리아 아르테.”

데네브라가 물었다.

“카루스가 네게는 다정하더냐?”

많은 의미가 함축된 질문이었다. 황비의 시녀가 손끝을 오므리고 시선을 떨구었다. 마차에서 탈출하고 싶어 하는 시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율리아는 데네브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자는 세상 모든 인간을 벽걸이 촛대나 의자 손잡이처럼 보는 이다. 때로는 지나가는 오리 떼를 보듯 보기도 하고, 내게는 미소 한 번 지어 준 적이 없어.”

“처음엔 저에게도 그러셨습니다.”

“이제는 아니란 말이구나.”

“카루스 님은…….”

율리아가 말을 고르는 동안 데네브라의 시선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황비는 율리아를 사납게 노려보면서도 자기 안에 깃든 열망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데네브라는 수치를 모르는 여자였다. 황제를 남편으로 맞이한 아내이면서, 그의 부하를 사랑한다는 걸 아무에게나 스스럼없이 드러내었다.

율리아는 그 점을 눈여겨보았다.

“가여운 자에게 가여운 분입니다.”

“뭐?”

“사나운 자에게는 사납고, 가여운 자에게는 가여운 분이에요.”

“네 말은, 내가 그의 관심을 받을 만큼 가엾지 않았다는 뜻이냐?”

“아니요. 황비 전하, 당신의 사랑이 가짜라는 뜻이었습니다.”

데네브라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그녀는 화를 내는 것도 잊은 채 율리아를 노려보았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감히, 누구도 그녀에게 이딴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가짜라니. 방식은 잘못되었을망정, 데네브라의 사랑은 진짜였다. 그녀는 만인지상의 권좌마저도 버리려 했을 만큼 카루스 란케아를 원했다.

그런데 이 건방진 계집이 데네브라의 사랑이 가짜라고 말했다.

데네브라가 율리아에게 손을 뻗었다. 긴 손톱과 손가락이 거미 다리처럼 율리아의 긴 머리카락을 휘감았다. 두 여자가 서로를 노려보며 짧게 숨을 삼켰다.

“내 마음이 가짜라서 그가 관심을 주지 않는 거라고?”

“당신은 그분을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네가 그걸 어찌 알지?”

“솔직하게 말해 보세요. 소유하고 괴롭히고 싶잖아요. 서로에게 고통뿐인 감정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겠어요. 사랑은 쟁취하는 게 아니에요. 카루스 님은 전리품이 아니고요.”

“그 입을 찢어야겠구나.”

“제 입을 찢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데네브라가 율리아의 머리카락을 꽉 쥐었다가 천천히 놓았다. 가늘고 긴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하면 네 마음은 나와 달리 진짜라서 그가 네게 진심이라는 말이냐?”

“아니요.”

“말장난은 그만두어라.”

“뭔가 착각하고 계시네요. 구애하는 쪽은 제가 아니에요.”

율리아가 빙그레 웃었다. 단정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악의 어린 미소였다.

데네브라 황비를 태운 마차가 오르테가 왕궁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 카루스는 그 마차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말을 달리고 있었다.

오르테가의 병사들에겐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던 바이칸의 기사들도 무혈 제독 앞에선 순한 양처럼 굴었다.

카루스는 자꾸만 마차로 향하려는 신경을 애써 붙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마차 문을 잡아 뜯어서라도 저 안에 있는 율리아와 데네브라를 떼어 놓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는 게 화가 났다.

해적선을 나포할 때도, 전쟁터에서 사투를 벌일 때도, 황제와 심리전을 벌이면서도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기분이 들었다. 불쾌하고 불안했다. 심장이 거꾸로 뒤집혀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었다.

율리아는 그에게 자신을 믿고 기다리라고 말했다. 데네브라 황비가 어떤 사람인지 나름대로 파악할 시간을 달라는 뜻이었다.

카루스는 그녀의 말대로 했다. 바다까지 마중을 나왔고, 황비의 집요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한껏 태연하게 굴었다. 데네브라가 율리아를 향해 표독스러운 눈빛을 쏘아 보내도 애써 못 본 척했다.

광장을 지나 왕궁 입구에 들어섰을 때였다. 미리 나와 있던 샤트린 공주와 레위시아 왕자가 황비의 행렬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나팔수가 길게 나팔을 불었다. 걸음을 멈춘 말들이 투레질하는 사이, 마차 문이 열리며 데네브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새카만 머리카락을 장식처럼 늘어뜨린 채 마차에서 내려 똑바로 섰다. 함께 있던 젊은 시녀가 도망치듯 황비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율리아는 마지막으로 발을 내렸다.

미묘하게 헝클어진 머리카락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루스의 시선은 오직 율리아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녀는 데네브라의 곁에서 마치 황비의 벗이라도 되는 양 가까이 붙어서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데네브라는 율리아가 내민 손을 기꺼이 잡았다.

본래는 왕위 후계자인 샤트린과 인사를 나눈 후 레위시아의 손을 잡고 입궁할 예정이었으나, 그런 과정 따위엔 아무 관심 없다는 얼굴로 율리아의 손을 잡고 왕궁 안으로 들어섰다.

바바슬로프가 슬그머니 다가와 카루스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나도 몰라.”

“복덩이가 마차 안에서 무슨 마법이라도 쓴 거 아닙니까? 푸른 바다의 환초가 주인으로 선택한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마법이라도 쓸 수 있대요? 저 미친…… 황비가 왜 우리 복덩이의 손을 저렇게 덥석덥석 잡고 다니냐고요?”

“나도 모른다니까?”

카루스도 답답했는지 말투가 사나웠다. 그는 찰나의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율리아와 데네브라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닫고 말았다.

율리아는 웃고 있었다. 담담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어떤 미소가 스치듯 지나갔다.

초조해하는 건 오히려 데네브라였다. 율리아의 손을 잡고 억지로 당당한 척하고 있었으나, 황비에게 오랫동안 시달렸던 카루스는 그 미세한 차이를 알아챌 수 있었다.

마차 안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그 짧은 사이에 율리아는 데네브라가 카루스가 아닌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잡힌 손이 아팠다. 할퀴듯 손바닥을 긁는 황비의 긴 손톱 때문이었다. 작은 손톱에도 뭔가 장식물이 많았다. 그 무겁고 복잡한 장식 때문에 손가락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고 무거웠다.

샤트린과 지루하고 긴 인사말을 나눈 데네브라가 레위시아의 환영 인사를 받아 줄 때였다.

율리아는 왕궁 안에서 데네브라를 마중 나온 블라이스를 보았다.

그가 상당히 충격받은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데네브라가 꽉 잡은 율리아의 손에, 그리고 두 사람의 가까운 거리에 머물렀다.

데네브라도 뒤늦게 블라이스를 발견하곤 크고 깊게 심호흡했다.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율리아가 블라이스를 똑바로 노려보며, 황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는 당신의 노예가 아니에요. 황제의 것이죠. 가서 확인해 보세요.”

율리아의 말이 뱀처럼 데네브라를 휘감았다. 그녀는 블라이스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적과 아군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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