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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화 (215/319)

188화

“어째…… 왕궁에 활기가 도네요.”

율리아가 마차 창문을 열었다.

왕궁 정원에서 정면으로 마주친 레위시아와 샤트린이 각자 마차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삿대질을 하면서 싸우고 있었다. 두 왕족의 싸움에 마부와 시녀, 기사들이 어쩔 줄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그들의 싸움은 가까이에서 모시는 자들에겐 크나큰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한 걸음만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 이보다 재밌는 일이 있을 수가 없었다.

마조람 파벌의 숙청 이후, 왕이 병상에 드러누운 기간이 길어지면서 왕궁에 오래된 우울감이 자리 잡았다. 왕궁 전체가 비극적인 소식에 만성이 되어 한없이 침울했다.

그런 와중에 레위시아와 샤트린이 사춘기 어린애들처럼 꽥꽥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 볼까.”

율리아와 함께 마차를 타고 있던 코코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마차 창문 밖으로 머리를 쑥 내밀었다. 위험하다고 말려도 소용없었다.

그러더니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으흐흐흣……!”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네 눈으로 좀 봐.”

코코가 율리아를 창가로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얼굴이 작은 창문에 나란히 붙었다. 그들은 저만치 앞서가던 레위시아의 마차와 그 앞을 가로막은 샤트린의 마차를 바라보았다.

레위시아가 마차 창틀에 한쪽 팔을 걸친 채 다른 한쪽 손으로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야, 이 천하의 똥고집아! 너는 그 못된 성질머리 때문에 친구가 하나도 없는 거야! 생각을 좀 해 봐라. 너 같은 애랑 누가 친구가 되고 싶겠냐! 어? 돈 주고 사는 친구가 진짜 친구인 줄 알아?”

“네까짓 게 어디서 친구 타령이야! 시녀들 치마폭에 싸여서 칭얼거리는 애새끼 주제에!”

“그 애새끼를 제물로 바치려던 폭군이 누구더라?”

샤트린이 마차에서 몸을 일으켜 창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그러곤 레위시아를 향해 있는 힘껏 짜증을 냈다.

“레위시아, 넌 애정 결핍에 피해 의식 덩어리야! 질투하려거든 좀 왕족답게 하시지! 네가 그러고도 왕족이야? 사춘기가 너처럼 뒤늦게 오면 골치 아파진다는 걸 일찍 깨달았어야 했는데!”

“뭐야? 또 자기소개 하냐?”

“야, 이 개……!”

“개 뭐? 말해! 개 뭐? 뭐냐고! 더 말해 보라니까? 샤트린 공주가 욕한다! 나한테 욕한다고! 다들 잘 들어라!”

레위시아가 언성을 높일수록 샤트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공주는 말로는 그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마차 안으로 쑥 들어가 악을 쓰며 비명을 질렀다.

율리아가 창가에서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못 말려…….”

그런데 코코는 굉장히 흡족해하는 얼굴이었다. 입을 가리고 있던 손수건을 떼자 코코 특유의 못된 고양이 같은 얼굴이 튀어나왔다.

“좋아요?”

“뭐가.”

“레위시아 님이 이겨서 좋냐고요.”

“이기는 건 당연한 거고.”

코코가 창문을 탁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10년을 가르쳤는데 저 정도도 못 하면 어떡해. 난 내가 키운 애가 밖에서 지고 들어오는 꼴은 못 봐.”

“가정 교육이 이래서 중요해.”

“너도 마찬가지야.”

“네?”

율리아가 그게 무슨 소리냐며 눈을 깜박였다.

코코가 웃는 얼굴 그대로 율리아를 응시하더니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러곤 율리아의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귀에 꽂아 주며 말했다.

“내가 가르쳤다고 했지.”

“그건…….”

“그럼 내가 얼마나 악랄한 사람인지 잘 알겠네.”

“알죠.”

“율리아, 너보다 강한 상대를 쓰러뜨릴 때는 정공법 같은 건 쓰지 마. 정의와 명분 같은 것도 굳이 챙기려고 하지 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야.”

“명심할게요.”

“하고 싶은 대로 해. 수습은 우리가 할 테니까.”

지금 너한테 가장 중요한 건, 이 삶에 후회를 남기지 않는 거야. 코코가 툭 던진 말이 율리아의 가슴에 새겨졌다.

레위시아는 격렬하게 반발한 끝에 데네브라 황비의 마중 인원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샤트린이 며칠간 자신의 궁에 틀어박혀 온갖 패악을 부렸다는 소문이 돌자, 그는 오히려 상쾌한 얼굴로 공주를 찾아가 ‘아프다며? 문병 왔어.’라는 말로 한 번 더 시비를 걸었다.

물론 그 후에는 카루스 란케아와 율리아 아르테가 직접 데네브라를 마중할 거라는 말로 샤트린을 진정시켰다. 바이칸에서 황족이 오는데, 바이칸의 제독이 마중을 나가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왕족은 아니지만, 무혈 제독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와병 중인 국왕이 기어 나가는 것보다 훨씬 더 괜찮은 환대였다.

한결 마음을 놓은 샤트린이 레위시아를 쫓아내며 물었다.

“넌 그래도 괜찮아?”

“뭐가.”

“넌 내가 진짜 바보인 줄 알지.”

샤트린이 한 손으로 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시녀들이 애써 땋아 놓은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었다.

“데네브라 황비가 카루스 란케아를 사랑해서 집요하게 쫓아다닌다는 소문은 대륙 전체에 퍼져 있어. 그런 상황에 카루스 란케아가 율리아를 대동한 채 마중을 나가면 황비의 눈에 그 장면이 어떻게 비치겠냐고.”

“두 사람이 연인인 줄 알겠지.”

“넌 그래도 괜찮아?”

샤트린이 또 한 번 물었다. 레위시아는 그게 뭐 어떻냐는 얼굴이었다.

“샤트린, 너야말로 내가 바보인 줄 알지.”

“뭐?”

“왕좌에 도전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내가 제일 먼저 포기해야 했던 게 뭔지 알아?”

“레위시아.”

“난 왕이 될 거야. 아버지 같은 왕이 아니라, 오직 이 나라 오르테가에 헌신하고 집착하는 왕. 그러니까 오르테가는 잘되어야만 해. 내가 꿈에 이어 사랑까지 포기하고 선택한 놈이니까, 이 나라는 나한테 아주 잘해야 한다고.”

“꼭 네가 진짜 왕이 될 것처럼 말하네.”

“둘 중 하나야.”

레위시아가 샤트린을 향해 미소 지었다. 지난 며칠간 보여 줬던 얄미운 비웃음이 아니라, 부드럽고 친근한 미소였다.

“왕좌에 앉기 위해 꿈을 포기해야 했던 나와, 왕좌에 앉는 것이 오랜 꿈이었던 너. 오르테가는 우리 둘 중 누구를 선택할까?”

“내 꿈은 강해.”

샤트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아래턱에 힘을 잔뜩 준 채로 계단 위에 서서 레위시아를 내려다보았다.

레위시아가 물었다.

“내 사랑은 약해 보여?”

“넌 노력조차 안 하잖아. 율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카루스 란케아와 싸워 볼 생각조차 안 하잖아. 저 많은 거리의 백성들도 사랑하는 여자 앞에선 무모해지기 마련이야. 그런데 너는……!”

“샤트린,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용서 못 한다. 레위시아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미치도록 사랑하는데, 아니…… 이미 미쳐 있는 것 같은데. 손에 넣고 싶어서 발악하는 게 쉽지, 포기하고 바라보는 게 쉬울 리가 없잖아.”

사랑이란 게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될 리가 없다.

“매일 심장을 도려내는 기분으로 살 거야.”

레위시아는 맹세했다.

“난 아버지와 달라.”

* * *

높이 새가 날았다. 배에서 내린 데네브라의 시선이 새를 따라 움직였다.

그녀는 티타니아를 넘지 않고 해로를 통해 오르테가에 왔다. 3척의 거대한 배가 황비와 그녀의 일행을 태우고 움직였다.

그녀를 마중 나온 건 카루스 란케아와 남부 함대 기사단, 그리고 오르테가의 귀족 아르테 백작이었다.

데네브라는 카루스를 발견하자마자 오직 그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선명한 희열이 떠올랐다. 몸을 움트는 바다처럼 온갖 감정이 싹을 틔웠다. 그중엔 사랑과 기쁨도 있었지만, 증오와 원망도 있었다.

율리아가 데네브라에게 다가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위대한 제국의 여인, 데네브라 황비 전하를 환영합니다.”

카루스를 먼저 보고 싶었는데 웬 젊은 계집이 나와 인사말을 건넸다. 데네브라는 시선으로 그를 쫓다가 율리아에게 물었다.

“네가 율리아 아르테구나.”

“제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까.”

“크리스틴 마조람이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였지.”

그때 데네브라가 뭐라 대답했는지 궁금할 법도 한데, 율리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차를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국왕 전하께서 위독하시어, 샤트린 공주님과 레위시아 왕자님이 황비 전하를 맞이할 것입니다.”

“내가 널 죽일지도 모르는데, 손을 내미는구나.”

“저는 황비 전하를 죽이지 않을 테니까요.”

오만한 대꾸였다. 데네브라가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네가 감히?”

“제 손을 잡으세요. 마차에 오르는 걸 도와 드리겠습니다.”

“나는 노예의 등을 밟고 오른단다. 오르테가엔 노예가 없지?”

“노예가 필요하시다면 블라이스 백작이라도 불러다 드릴까요?”

오만이 지나쳐 무모해 보였다. 데네브라는 그제야 카루스를 쫓던 시선을 움직여 율리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데네브라의 눈동자는 밝은 갈색이었다. 햇빛을 받으면 노란색에 가까웠다.

아름다웠지만 소름 끼치는 여자. 율리아는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히 웃었다.

“율리아 아르테.”

“말씀하세요, 황비 전하.”

“입을 찢어 버리기 전에 말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데네브라가 율리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긴 손톱이 할퀴듯 율리아의 손을 긁었다. 황비의 손목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여러 겹으로 두른 팔찌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네 입을 찢어 버린다는 게 아니야. 네가 나를 기분 나쁘게 할 때마다, 이 나라의 가여운 자들이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말이다.”

데네브라가 율리아의 손을 잡고 앞서 걸었다.

황비의 기사들이 오르테가의 병사들을 거칠게 밀치고 마차를 살폈다. 그러곤 마차를 앞뒤로 포위하듯 지켰다. 그들에게서 정복 국가의 흉포한 기운이 느껴졌다.

데네브라가 먼저 마차에 오르고 율리아가 뒤를 이었다. 먼저 손을 내민 건 율리아였으나, 그 손을 거칠게 잡아끈 건 데네브라였다.

카루스가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마차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선명한 살기에, 바바슬로프가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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