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화 (214/319)

187화

* * *

데네브라 황비가 오르테가로 향하고 있다.

이는 오르테가 국왕에게는 재난과도 같은 일이었다. 심지어 황비는 그들에게 상의는커녕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데네브라가 왜 오르테가까지 오는지, 그 이유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국왕의 걱정이 깊어지면서 왕궁 안에 불안한 기운이 맴돌았다. 샤트린은 귀족들과 함께 대책을 논의했다.

레위시아는 처음엔 회의장에 매일 같이 출석했으나 그 안에서 제대로 된 대책이라곤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의 측근들과 함께 따로 움직였다.

그러던 중, 그는 왕위 후계자 샤트린 공주로부터 데네브라 황비를 직접 마중 나가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마중이라니.”

레위시아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마중이 아니라 제물 아닌가.”

샤트린은 마음을 굳게 먹은 것 같았다. 한때 남부 최고의 미인이라 불리던 어미를 닮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레위시아를, 데네브라 황비에게 먹잇감으로 내어 주고 환심을 사려는 것이다.

“빌어먹을……. 이렇게 나온다고?”

왕자님이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는 걸 눈치챈 하녀들이 조용히 복도로 나갔다. 평소에 매일 웃고 다니는 사람이 진짜 화가 나면 무섭다. 하녀들은 이 일이 그저 무사히, 조용히 지나가기만을 빌었다.

코코가 작게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누가 제안했는지 몰라도 좋은 생각이네요. 데네브라 황비에게 전하를 제물로 바치면서 호감을 유도하고, 호시탐탐 후계자의 자리를 노리는 왕자님께는 주제 파악하라는 경고도 주고.”

“코코!”

“제가 샤트린 공주였어도 그렇게 명령했을 거예요.”

코코의 냉정한 평가에도 레위시아는 화를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는 공주궁으로 달려가 확 다 뒤집어엎고 싶다는 말을 열 번쯤 한 뒤에야 간신히 들썩이는 어깨를 가라앉혔다.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응접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코코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고, 레위시아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은 채 한쪽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율리아는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곤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내뱉었다.

“제가 갈게요.”

짧은 정적 후에, 레위시아가 대경실색하며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코코도 뒤늦게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를 나무랐다.

“네가 거길 왜 가.”

“제가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야, 잘 들어. 샤트린 공주가 제물로 바치려는 건 레위시아 왕자님이야. 왕족 정도는 되어야 마중하는 자와 마중받는 자의 격이 대충이라도 맞는 거야. 그런 자리에 일개 시녀를 내보냈다간 상대를 무시하는 처사라며 역풍을 맞는다고.”

“그래, 코코의 말이 옳아. 내가 가기 싫다는 이유로 너를 보낸다는 건 비겁하고 치졸한 짓이야. 율리아,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저는…….”

율리아가 뭐라고 설명을 덧붙이려던 찰나였다. 코코가 한 손을 들어 휘휘 젓더니 레위시아에게 말했다.

“말 길게 할 거 없어. 전하, 얘한테 이유를 묻지 마세요. 얘가 길게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 둘 다 그 말에 홀려서 말도 안 되는 일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고요.”

“코코의 말이 옳아. 율리아, 그냥 가만히 있어.”

“아니, 두 분 잠시만요.”

“그만 말하라니까? 전하, 뭐 하세요! 얘한테 닥치라고 명령하라고요!”

“코코, 닥치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가족 같은 사이에 말을 꼭 그렇게 해야 해? 율리아도 이제 백작인데 서로 존중하면서 곱고 아름다운 말로 배려하고…….”

“곱고 아름다운 말 찾다가 전하는 황비의 첩이 되고, 율리아는 그 여자랑 대면하자마자 머리채를 잡힐 것 같으니까 그렇죠!”

“머리채를 왜 잡혀! 무섭게!”

“데네브라인지 뭔지 그 여자가 율리아 머리채를 잡으면 내가 그걸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것 같아요? 분명 앞뒤 안 재고 달려들어서 그 여자 머리채를 휘어잡고 흔들겠죠!”

“미쳤어? 그럼 당장 전쟁이야!”

“그러니까 좀 말리라고요! 왕자님이잖아요!”

“내가 무슨 수로 말려! 너희가 언제부터 그렇게 내 말을 잘 들었다고! 누누이 말하지만, 이 궁에서 약자는 나야!”

어째 점점 이야기가 두 사람의 싸움으로 번지고 있었다. 둘 사이에 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율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일일수록 단순하게 생각하라. 율리아는 요즘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일을 꾸밀 때는 복잡하고 섬세하게, 적이 달아날 수 없도록 치밀한 덫을 놓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일을 해결할 때는 최대한 단순하게 접근하는 편이 좋았다.

특히 데네브라처럼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사람을 상대할 때는 혼자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굴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상대는 이쪽의 말을 들어 주지 않을뿐더러 이쪽의 처지를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데, 왜 굳이 이성을 찾고 배려를 해야 한단 말인가.

율리아는 자신 있었다.

미친 짓을 해야 한다면, 이 세상 누구보다 잘 해낼 자신이.

생각을 마친 율리아가 통보하듯 입을 열었다.

“제가 갈 거예요.”

“야!”

“율리아!”

코코와 레위시아가 동시에 버럭 화를 냈다. 그러나 그들은 비범한 총기로 반짝거리는 율리아의 눈동자를 보면서, 이번에도 그녀를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코코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중얼거렸다.

“수명이 줄 것 같아…….”

“난 줄었어. 확실해.”

레위시아도 그녀를 따라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러면서도 율리아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다.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한 두 사람의 태도에, 율리아가 생긋 웃음 지었다.

“데네브라 황비는 카루스 님을 사랑해요. 그래서 황제에게 여러 번 이혼을 요구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황제는 그걸 들어주지 않고 방관했어요. 카루스 님의 명성에 상처를 내기 위해 황비의 감정을 이용한 거죠.”

“미친…….”

레위시아가 낮게 신음했다. 코코는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율리아가 마저 말을 이었다.

“데네브라 황비의 남부행에는 그 어떤 정치적인 목적도 없어요. 황비는 정말, 진심으로 카루스 님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 거예요.”

그러니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크리스틴이 거기까지 가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애는 실패했어요. 데네브라 황비는 마조람 후작 세력의 재건 같은 일엔 아무 관심도 없을걸요. 황제도 그걸 알기 때문에 황비의 남부행을 허락했을 거예요.”

“너무 무섭다.”

레위시아가 중얼거렸다. 이성도 없고 자존심도 없는 황족이라니.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이 대륙에서 제일가는 권력자 중에 하나라니. 이보다 무서운 일이 어디 있어.”

그가 동의를 구하는 뜻에서 코코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코코가 입가에 기묘한 미소를 띤 채 율리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뭐야, 너희. 또 나만 모르지. 뭔데?”

아무래도 이 못된 시녀들이 또 자기들끼리 눈빛으로 대화를 하는 모양이라며, 레위시아가 투덜거렸다.

이번에는 코코가 율리아를 대신해서 말을 꺼냈다.

“데네브라 황비가 카루스 란케아를 그렇게 사랑한다면, 그 여자가 마중 나오길 원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야…….”

레위시아가 당황한 얼굴로 율리아를 보았다.

율리아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카루스 님이 함께 가 주실 거예요.”

“너희 미쳤구나.”

무혈 제독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그런데 율리아가 그보다 더한 말을 내뱉었다.

“카루스 님의 마중은 데네브라 황비를 기쁘게 할 테니, 저는 그분의 곁에 서서 그 여자를 화나게 해야겠죠.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데 그보다 더 효과적이고 빠른 방법은 없을 것 같아요.”

“뭐?”

“그러니 전하께서는 샤트린 공주님께 가서 도저히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화를 내세요. 그쪽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똑같이 화를 내거든, 배 째라고 드러누우셔도 괜찮아요.”

“나더러 공주궁에 드러누우라고?”

“그런 거 잘하시잖아요.”

“두말하면 입 아프지.”

레위시아가 팔짱을 끼더니 입꼬리를 씰룩이며 웃었다. 그 얼굴이 코코와 너무 닮아서, 율리아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레위시아가 공주궁에 드러누웠다.

분노한 샤트린이 기사들을 불러 그를 끌어내라고 소리쳤지만, 레위시아가 감히 왕족의 몸에 손을 대려 하다니 무엄하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전전긍긍했다.

샤트린은 네가 그러고도 왕국을 위하는 왕족이냐며 화를 냈다.

레위시아는 네가 그러고도 형제냐며, 나를 제물로 바칠 생각을 하면서 잠이 오고 밥이 넘어가냐고 언성을 높였다.

두 명의 왕족이 매일매일 싸우기 시작했다. 본래도 성격이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샤트린은 그렇다 쳐도, 친절하고 부드러운 성격이라 늘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레위시아의 그런 모습은 모두에게 의외였다.

두 사람의 싸움은 처음엔 많은 사람에게 걱정거리였다. 두 왕족이 똘똘 뭉쳐 힘을 합쳐도 상대하기 어려운 게 제국의 황족인데, 매일 서로를 원망하기 바쁘니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겠냐고 수군거렸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