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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화 (213/319)

186화

“예?”

“하루빨리 유력 귀족 가문의 여식을 간택해서 결혼식을 올리라고 조언 드리는 것입니다.”

힌치 백작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그와 함께 레위시아의 곁을 지키던 귀족들이 한마음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우리 편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의 편이어도 도움이 됩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티타니아 인근 국경지대의 주인이시니, 미래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성혼을 꺼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백작.”

“샤트린 전하는 물러섬을 모르는 분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랬습니다. 그분은 싸움을 즐기는 게 아니라, 승리를 좋아하는 것일 뿐입니다.”

레위시아는 반박하지 못했다. 무슨 말로 거부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혼이라니. 머리가 터질 듯해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국왕 전하의 병세가 생각보다 깊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저도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대로 국왕 전하께서 돌아가신다면 전하께서는 후계자와 왕좌를 놓고 경쟁하는 게 아니라, 이미 왕이 된 자를 왕좌에서 끌어내려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누군가는 그걸 찬탈이라 부를 것이다.

힌치 백작이 한마디 할 때마다 레위시아의 가슴에 바위가 자라났다. 묵직하고 단단한 것들이 갈비뼈 안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답답했던 나머지, 레위시아가 힌치 백작에게 물었다.

“제가 코델리아 시녀장과 결혼하겠다고 하면, 그때도 허락하실 겁니까?”

“물론입니다.”

힌치 백작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자기가 물어봐 놓고 되레 기겁한 레위시아가 자신의 팔뚝을 벅벅 문지르는 사이, 힌치 백작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전하를 모시겠다고 맹세했을 때는 저와 제 가문의 명운을 모두 건다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제 딸이 도움이 된다면 그 아이도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할…….”

“그럴 리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나눈 대화를 코코가 듣게 된다면 백작은 절연당할 것이고, 저는 새 시녀장을 뽑게 될걸요.”

레위시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농담이었습니다. 백작, 제발 비밀로 하죠.”

“알겠습니다.”

힌치 백작도 절연이란 말에 움찔했는지 더는 코코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국왕이 쓰러지기 전에 샤트린을 끌어내리고 후계자가 되어야만 하는 레위시아는 혼인 동맹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만 했다.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만약 샤트린 전하께서 우리 중 하나를 포섭해 그 가문의 남자와 성혼이라도 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배신자라고 욕하고 화낼 겁니다.”

“전하!”

“일이 급하게 됐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래도 갑자기 아무 여자나 골라서 결혼을 하라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아내를 불행하게 만드는 왕이 되기는 싫습니다.”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겠다. 레위시아의 말은 꼭 자신에게 하는 맹세 같았다.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힌치 백작이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전하께서 결혼하면 왕비가 불행해진다는 건, 전하께서 이미 마음을 준 상대가 있다는 말입니까?”

“예?”

“그 여자가 누굽니까. 귀족입니까, 평민입니까. 몇 살입니까. 기혼자입니까? 설마 남자는 아니겠지요?”

“백작!”

“저는 진지하게 묻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시는 꺼내지 않기로 하죠.”

레위시아가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왕자궁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힌치 백작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치다시피 서둘러서 왕자궁으로 돌아왔더니 율리아가 코코와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영지 관리인과 약속이 있어 늦었다며, 율리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빗물 머금은 하늘처럼 차분한 푸른색의 드레스에 흰 허리띠를 두른 율리아는 무척 귀족적으로 보였다. 긴 목에 어울리는 우아한 목걸이와 진주 귀걸이, 그리고 굽이 있는 신발까지.

레위시아가 웃음과 한숨을 동시에 내뱉으며 말했다.

“한 이백 년쯤 이어진 가문에서 자란 여자 같네.”

“네?”

“오래된 귀족들보다 더 귀족적으로 보인단 얘기야.”

“고맙습…….”

“요즘 오르테가에서 귀족적이란 말은 욕이에요.”

코코가 참지 않고 끼어들었다. 톡 쏘듯 한마디를 건넨 그녀가 레위시아에게 다가와 물었다.

“전하, 국왕 전하께 들어가는 약의 종류가 늘었어요. 궁내부 기록에조차 남기지 않고 극비리에 처리하라는 명령이었대요. 마약으로 유통되는 진통제까지 섞여 있어요.”

“그건 어떻게 알았어?”

“사람을 심어 뒀죠.”

레위시아는 힌치 백작보다 딸인 코코의 정보력이 한 수 위라는 사실에 한번 놀라고, 왕자궁의 시녀장이 국왕을 보살피는 의사 중 하나를 포섭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부왕께선 엄살이 심한 편이야. 예전부터 그랬어. 연세가 있으시니 기력이 떨어지는 것도 당연하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늙음을 핑계로 마약을 쓰진 않아요.”

“뭐……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신가.”

레위시아의 반응이 시원찮았다. 의아해진 율리아가 대놓고 물었다.

“전하, 왜 그러세요?”

“아니…… 그렇잖아. 나는 네가 지난 삶에서 겪은 일에 대해 들었다고. 그땐 부왕께서 제법 오래 살아 계셨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래서요?”

“뭐 이런저런 이유로 꾀병을 부리시는 건가, 의심하고 있는 거지.”

그 이런저런 이유라는 게 뭐냐고 코코가 꼬치꼬치 캐물었다.

레위시아는 대답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율리아와 코코가 양쪽에 서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 터지면 일단 회피하시는 분이니까.”

크리스틴 마조람이 데네브라 황비의 손에 죽은 뒤, 한동안 괴소문이 돌았다. 황비가 황제를 대신해 병력을 이끌고 남부를 정벌하러 내려온다는 이야기였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황비의 병력이 남하했다는 첩보는 사실이었으나, 황제가 북부와 전쟁 중인 시기에 굳이 오르테가를 정벌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국왕은 온 신경을 그곳에 쏟았다. 수십 명의 정찰병을 국경 너머로 보내 제국의 동향을 살피게 했다.

왕의 병은 마음의 병이었다. 레위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코코가 시녀장의 일을 처리하러 자리를 뜬 뒤, 레위시아는 율리아와 함께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섰다.

해가 져서 그런가 힌치 백작과 함께 걸었을 때보다 공기가 쾌적해 기분이 좋았다. 가슴은 시원하고, 얼굴에 닿는 습한 바닷바람도 촉촉해서 불쾌하지 않게 느껴졌다.

사막처럼 건조한 것보다는 낫지, 레위시아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혼자 웃었다.

율리아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기분이 좋아 보여요.”

“내가?”

“네, 아깐 계속 얼굴을 찡그리고 계셨는데.”

“지금은?”

“웃고 계시잖아요?”

내가 웃었나. 레위시아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러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네가 웃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가요?”

이번엔 율리아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담담한 얼굴로 레위시아의 곁에서 걷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웃고 있었다고요?”

“나한테는 그랬다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레위시아가 자신의 말을 대충 얼버무리며 한쪽 팔을 내밀었다. 율리아는 굳이 더 캐묻지 않고 그의 팔에 한쪽 손을 올렸다.

조만간 비가 올 것 같았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구름이 머리 위까지 내려온 기분이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신경 쓰여 대충 쓸어 넘긴 레위시아는 왕궁 정원 저편에서 본궁을 향해 걸어가는 샤트린의 뒷모습을 보았다.

“샤트린은 또 부왕을 만나러 가는 모양이네.”

“사이가 좋은 편이니까요.”

“오늘 힌치 백작이 내게 유력 귀족 가문의 여식과 결혼하는 게 어떠냐는 말을 하던데.”

“그러셨어요?”

“너는 어떻게 생각해?”

율리아가 두 눈을 느리게 깜박이더니 걸음을 멈추고 레위시아를 바라보았다.

“전하께 이득인 일이에요. 우리 쪽이어도 적의 편이어도 마찬가지고, 심지어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을 때도 유리하죠. 사람들은 배우자가 없는 왕보다는 배우자가 있어 후계를 기대하게 하는 왕을 좋아하거든요.”

“그렇지?”

“한데 전하께서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머님의 처지를 슬퍼하시니까요.”

레위시아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얼마 전 코코가 말했던, 비련의 주인공처럼 청초해서 신경 쓰인다던 그 얼굴로 율리아에게 속삭였다.

“부탁이 있어.”

“말씀하세요.”

“내가 독신이어도 왕좌에 앉을 수 있게 도와줘.”

“전하, 평생 결혼하지 않을 생각이세요?”

“응.”

“전하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좋은 분이 나타나거나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데.”

“난 나를 잘 알아. 아마 난 평생 고독하게 혼자 살 거야.”

“어째서요?”

“미친 듯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거든.”

사랑은 새와 같아서 좁은 곳에 가두거나 억압하고 길들이면 불행해진다. 그저 저 높은 하늘을 멋대로 날아다니게 두어야만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다.

바라만 보아도 족한 사랑.

“율리아.”

“네?”

“나는 왕이 될 테니까, 너는 꼭 네 아홉 번째를 살아. 끝까지.”

그래서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살 수 있게. 레위시아가 떨어진 깃털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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