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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화 (212/319)

185화

율리아는 코코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지난 삶의 당신도 똑같은 말을 했다고, 그렇게도 말하지 못했다.

“알았어? 나 죽을 때 네가 내 눈 감겨. 내 장례식은 세계 최고로 호화롭게 치르고, 나 죽은 뒤엔 유언 집행도 네가 해.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결혼하고 애라도 낳거든, 그 애도 네가 키워!”

“아니…….”

“내 무덤은 바다에서 먼 데가 좋겠어.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니까 공동묘지는 절대 안 돼. 죽어서도 유령들 틈에 치여서 살고 싶진 않아. 그리고 묘비엔 꼭 이렇게 새겨.”

“뭐라고요.”

“‘있을 때 잘하지 그랬냐.’”

그게 뭐야, 진짜 이상해. 율리아가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코코가 흥 콧방귀를 뀌더니 큰 소리로 트루디를 불렀다. 내일 아침 일찍 예비 집사가 면접을 보러 올 테니 준비하라며, 집사가 머물 방을 치워 두라고 지시했다.

저택을 지키는 경비병은 맥스웰의 정보원들이 믿을 만한 자를 소개해 주었다. 영지 관리는 어차피 대리인을 통하기에 문제 될 게 없었다.

율리아는 자신의 집을 제집인 양 자연스럽게 돌아다니는 코코를 바라보았다.

“네가 잡아 온 해적들은 한꺼번에 처형될 거야. 드추바에서 꽤 가까운 곳이던데, 아직도 해적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어. 왕궁에서도 꽤 화제가 됐더라고.”

“한동안 해적으로부터 위협이 없었던 탓이겠죠.”

“그것도 있고, 기본적으로 오르테가의 귀족들은 안일한 편이야. 남부 해적 세력이 얼마나 큰 규모를 갖추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들을 오합지졸 무뢰배 취급하거든. 국왕이 일찍이 항복하는 바람에 바이칸을 상대로 전쟁을 치른 적도 없지.”

“그래서 제 이전 삶의 카루스 님은 남부 연합을 만들려고 했어요.”

“남부 연합?”

“오르테가를 중심으로 남부 함대와 해적 세력을 규합하고, 북부 패전국 연합처럼 남부에도 비슷한 저항 세력을 구축하려고 했죠.”

“해적 세력과 규합이라……. 그게 가능할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랍네.”

거기까지 말하던 코코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코코의 붉은 눈이 햇빛을 받아 밝은 주홍색이 되었다. 머리카락도 마찬가지였다.

율리아는 홀린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색이 옅어지면 인상이 부드러워질 법도 한데, 코코는 오히려 더욱 날카롭고 사나워 보였다. 눈동자를 한번 깜박일 때마다 숨을 고르는 맹수처럼 그녀의 숨이 잦아들었다.

“미안하지만…… 난 낙천적인 사람도 아니고, 낭만적인 사람도 아니야.”

“알아요.”

“네 대적자가 너를 찾기 위해 그 유서를 일부러 흘린 거라고 가정해 보자고. 난 너희 둘이 만나서 손을 잡고 왈츠를 추거나, 함께 저주에 대항하는 아름다운 그림 같은 건 절대 나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해.”

“저도 그래요.”

“율리아, 우리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대비해야 하잖아.”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역시 나의 코코. 율리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싸울 준비를 해야죠.”

* * *

“주벤 아르테.”

크세노 황제가 심복 호르헤의 입을 통해 그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북부 전선에서 꽤 멀리 떨어진 도시에 와 있었다.

“심부름꾼으로 이용한 자는 해적이라 죽이지 않고 살려 두었습니다. 해적을 찾으려면 해적에게 맡겨야 하니까요.”

“사람을 더 풀어. 해적이 아니라 해적의 조상이라 해도 찾아. 없으면 소문, 기록이라도 샅샅이. 썩은 시체라도 상관없으니까.”

“명을 받듭니다.”

“주벤 아르테……. 연령대나 인상착의 같은 것도 알지 못한다고?”

“사람을 시켜서 전달자를 죽이고 유서만 갈취했다고 합니다. 이름을 알아낸 것도 우연에 가까웠다고 들었습니다.”

“그냥 풀어 주지 말고 감시인을 붙여.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팔다리라도 하나씩 잘라서 진실인지 확인하고.”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호르헤가 깊이 머리를 숙였다. 크세노는 그를 신뢰했기에 더는 캐묻거나 닦달하지 않았다.

호르헤가 물러난 후, 크세노는 자신을 위해 마련된 방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침대와 사방으로 트인 둥근 창문, 종탑처럼 높이 솟은 천장이 보였다. 식탁을 가득 메운 술과 음식, 하인을 부르는 종과 여흥을 돋우는 데 쓰이는 다양한 노예 명패가 있었다.

도시의 영주는 데네브라 황비의 외척 가문이었다. 그는 기별도 없이 갑자기 쳐들어온 황제에게 성에서 가장 높고 큰 방을 내어 주고, 자신은 가장 낮은 곳으로 달아나 명령을 기다렸다.

“하.”

건방진 작자였다. 애처로운 작자이기도 했다.

데네브라를 통해 분에 넘치는 권력을 손에 넣었으면서, 황제 크세노가 두려워 감히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심지어 그를 위해 준비했다는 방에는 데네브라의 처녀 시절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크세노가 냉소를 터뜨리며 그림 앞에 섰다.

그와 결혼하기 전, 데네브라는 화려한 금발의 전형적인 북부 여인이었다. 골격이 크고 눈매는 깊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 모습이 꽤 호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상화 속의 데네브라는 딱 그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낯설었다. 지금의 모습을 떠올리면 과연 같은 사람인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카루스를 만난 뒤부터 데네브라는 긴 금발을 잉크처럼 새카맣게 염색하고 입술만 새빨갛게 칠해, 본래의 이목구비를 떠올리기 어려웠다.

“사랑하는 데네브라…….”

내가 이 여자를 사랑했던가. 그게 언제 적이더라. 처음 한 번뿐이었나. 아니면 두 번째? 혹은 세 번째까지였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데네브라에 대한 감정은 너무나 복잡하고 불분명해서 애정인지 미움인지, 경멸인지 우애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그녀가 카루스 란케아를 사랑한다고 선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카루스 란케아를 내게 주세요.”

“데네브라, 드디어 미쳤구나.”

“당신은 황제잖아. 나를 황비로 만들 때, 당신은 분명히 약속했어요. 원하는 건 뭐든지 이 손에 쥐여 주겠다고 신께 맹세했잖아!”

“그 말도 안 되는 성혼 맹세를 지키는 남자는 세상에 한 명도 없어. 황제도 마찬가지지.”

“그럼 이혼해요.”

“데네브라.”

“이혼하고 날 놔줘요! 내가 당신의 아내이기 때문에 그를 가질 수 없는 거라면, 황비의 권좌 따위 버리면 그만이에요!”

“거짓말하지 마. 누구보다 황비가 되고 싶어 했잖아. 내가 왜 널 선택했는지 알면서.”

높은 곳이 어울리는 여자. 크세노는 데네브라를 그렇게 평가했다. 수많은 황비 후보 중에서 그녀를 고른 것도 그런 이유였다.

권력을 좇는 여자가 아니라, 권력이 따르는 여자가 되라는 뜻에서.

“그를 사랑해요. 미친 듯이! 미칠 듯이!”

“그럼 유혹해 봐. 그가 널 사랑하게 만들면 되잖아.”

이혼하자던 데네브라의 말이 진심이었는지는 몰랐다. 반쯤은 진심이고, 반쯤은 거짓이었다고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때 데네브라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카루스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는 곳마다 가서 기다리고, 그가 수도를 떠날 때면 누구보다 먼 곳까지 배웅했다.

저 고약하고 끔찍한 여자에게 그런 순애보가 있을 줄이야.

크세노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신기한 느낌이었다. 배가 뒤틀리는데 심장은 차가워 기분이 좋았다.

카루스가 데네브라를 거절하고 내치고 무시할 때마다, 데네브라가 미친 듯이 화를 내며 자신에게 돌아와 이혼하자고 매달릴 때마다, 크세노는 두 사람의 관계가 이대로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랐다.

카루스가 영웅이 되는 꼴은 보기 싫었다. 데네브라가 행복해지는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러니까 너희는 영원히 쫓고 쫓기는 사이가 되어 맴맴 돌아라.

하나는 주군의 아내를 탐한 배덕자라 손가락질 받고, 하나는 남편의 부하에게 자신을 내던진 눈먼 아내가 되어서 나를 기쁘게 해 다오.

“데네브라.”

크세노가 그림을 향해 말했다.

“이번엔 네 부탁을 들어줘야겠다.”

해적왕의 유서가 카루스의 손에 들어가도록 조치했더니 주벤 아르테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당분간은 그 이름의 주인을 찾을 테지만, 그렇다고 카루스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그의 대적자는 카루스의 주위에 있을 것이기에.

처음엔 카루스가 자신의 대적자인 줄 알았다. 그는 바이칸의 영웅이면서 늘 자신을 배신했으니까. 그에 대한 의심을 푸는 데만 해도 몇 번의 삶이 필요했다.

아홉 번째 만에 드디어 대적자의 흔적을 찾았다. 그런데 그 연결점이 하필 그 녀석이었다니.

크세노는 데네브라가 자신의 눈이 되어 주길 바랐다. 그녀는 아마 잘 해낼 것이다.

황제의 아내이면서 다른 남자를 미친 듯이 사랑한다는 그 여자는 이 세상에 오직 하나, 카루스 란케아만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존재이니까.

황제의 전령이 나타나 황명을 전했다.

“황제 폐하께서 데네브라 님의 남부행을 허락하셨습니다.”

크세노는 데네브라의 남부행을 허락하되, 병력은 2백 이하만 데려갈 수 있게 했다. 대 바이칸 제국의 황비를 수호하는 병력으로는 초라한 수준이었으나, 데네브라는 아무 상관하지 않았다.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라. 나는 내 다리와 의지로 어디든 갈 수 있다. 아무리 황제라도 내 발걸음을 강제하지는 못해! 허락 따윈 필요 없으니 돌아가 이렇게 전하거라.”

데네브라는 이미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애초에 그녀는 황제에게 허락받을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노예의 등을 밟고 거대한 마차에 오르면서, 데네브라가 전령에게 말했다.

“남부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간섭하지 말고 북부에나 신경 쓰라고.”

* * *

남부의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불볕 같은 한낮의 햇살을 피해 그늘을 찾아다녔다. 왕궁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아름드리나무 아래, 한 무리의 귀족들이 산책하듯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레위시아와 힌치 백작, 그리고 그들과 한배를 탄 귀족들이었다.

바람이 불어 레위시아의 긴 머리카락이 가볍게 휘날렸다. 이마에 배어 나온 땀을 소매로 훔쳐낸 그가 바람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힌치 백작이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결혼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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