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4화 (210/319)

184화

다른 건 바라지 않는다. 여기서 말썽을 일으킬 생각도 없다.

술집 주인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두 손을 활짝 펴서 항복하는 자세를 취했다.

알렉사가 그를 금세 놓아주었다.

용병들이 술집 주인을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젊은 여자라고 너무 무력하게 당해 준 게 아니냐며 그를 손가락질했다.

2층으로 향하던 술집 주인이 손님들에게 걸쭉한 욕설을 퍼부으며 말했다.

“무슨 황소가 잡아끈 줄 알았어! 네놈들도 당해 보라고!”

물론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심하다 당해 놓고 쪽팔리니까 저러는 거라고 힐난을 퍼부었다.

알렉사는 태연했다. 수십 명의 용병이 힐긋거리는 데도 아무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태도로 바 테이블에 기대 서 있었다.

맥스웰이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진짜 이렇게 하면 이 도시의 용병 대장을 만날 수 있습니까?”

“만날 수 있습니다.”

“진짜요?”

“네, 제가 두 번이나 그의 목숨을 살려 줬거든요.”

용병계에선 목숨 빚을 제대로 갚지 않으면 비명횡사한다는 속설이 있다. 트리스탄은 악명 높은 용병이지만 거래에 있어선 믿을 만한 남자였다.

알렉사가 2층 계단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죽기 싫으면 나올 겁니다.”

그때였다. 2층 복도가 무너질 듯 쿵쿵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진짜 황소처럼 덩치 큰 용병이 튀어나왔다.

“알렉사!”

매번 이름을 바꾸고 의뢰금만 받으면 홀연히 사라진다던 전설 속 천재 소녀가 유일하게 자신의 본명을 알려 준 사내, 용병 대장 트리스탄이 생명의 은인을 향해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두 팔을 벌렸다.

트리스탄은 바이칸 서부와 북부를 나누는 항구 도시 무스빌리에서 용병들의 대장이라 불리는 사내였다. 커다란 덩치만큼이나 힘이 세고 코가 커서 코뿔소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난 알렉사 네가 뒈진 줄 알았어.”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잖아. 어디서 눈먼 화살이라도 처맞은 줄 알았지. 그래서 너한테 진 목숨 빚 못 갚을까 봐 1년 동안 잠자리가 뒤숭숭했다고! 제기랄!”

트리스탄은 알렉사를 껴안고 술집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곤 술집에 있던 모든 용병에게 공짜 술을 돌린 뒤에 2층으로 그녀를 데리고 왔다.

트리스탄이 물었다.

“이름을 말하면 안 되는 사정이 있다더니, 그건 해결된 거야?”

“은혜를 입었거든.”

“너도 목숨 빚을 졌구나.”

“그래. 그런데 그걸 갚으려면 네가 나한테 빚을 갚아야 해.”

“이거 뭔…… 사채의 사채인가.”

트리스탄이 하하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알렉사가 그의 맞은편에 앉고, 맥스웰이 그녀의 뒤쪽에 섰다.

“그새 부하도 생겼어?”

“내 부하는 아니지만.”

“내가 뭘 해 줘야 하는데?”

“빌어먹게 어려운 일.”

알렉사가 트리스탄의 방에 있는 대륙 지도를 가리켰다.

바이칸 북부에서 한동안 산발적인 반란이 일어나 인근에 이런저런 표식이 많았다. 최근엔 북부 패전국 연합이 평원을 사이에 두고 황제와 대치 중인 터라, 중간에 빨간 줄이 일직선으로 그어져 있기도 했다.

알렉사가 그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와 내 일행이 은밀하고 자유롭게 북부를 돌아다닐 수 있게 해 줘. 패전국 연합의 진영은 물론이거니와 황제의 군대와 만나도 상관없어야 해.”

“뭐어?”

트리스탄이 아주 험한 욕설을 입에 담았다. 그러곤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알렉사를 바라보았다.

“너 지금 네가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냐?”

“전쟁터에서 널 노리고 날아드는 화살을 한 번 막아 줬고, 다른 전쟁터에선 네 뒤를 노리는 배신자의 칼을 막아 줬지.”

“알렉사!”

“트리스탄, 빚을 갚아.”

알렉사는 믿고 있었다. 트리스탄이라면 할 수 있다고.

트리스탄의 커다란 덩치와 호쾌한 무용담에 반한 사람들은 그가 싸움에 미친 단순무식한 사내일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트리스탄은 힘보다 잔머리가 좋은 사내였다.

그가 무스빌리의 용병 대장이 된 건 여우처럼 약삭빠른 일 처리 능력 덕분이었다.

말없이 눈치를 살피던 맥스웰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원한다면 대가를 치를 의향도 있습니다. 우린 돈이 아주 많거든요.”

“그럴 순 없어. 이건 목숨 빚이니까.”

트리스탄이 깊은 시름을 삼켰다. 그는 알렉사를 노려보다가 욕을 하고, 다시 그녀를 노려보고 욕을 하면서 고민을 거듭했다.

“내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 줬으니, 내 몸값의 두 배라고 치고.”

“괜찮네.”

“자유 용병 신분패와 전쟁 용병 신분패, 그리고 패전국 연합 내의 연줄과 바이칸 정복군 내의 연줄. 이렇게 만들어 주면 되나?”

“이왕이면 안내인도 붙여 줘.”

“빌어먹을.”

트리스탄이 의뢰서를 꺼내 뭔가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그러곤 똑같은 내용의 의뢰서를 한 장 더 쓰더니, 알렉사에게 건네며 말했다.

“한 장은 패전국 연합에, 한 장은 바이칸 정복군에.”

“좋아.”

“신분패는 만들려면 사흘은 걸려. 여기서 쉬면서 기다려.”

“알았어.”

“그리고 여기다 서명해.”

트리스탄이 한 장의 종이를 더 꺼냈다. 그의 이름이 크게 적혀 있는, 용병 트리스탄을 안내인으로 고용하겠다는 서류였다.

알렉사가 웃으며 물었다.

“너까지 고용할 생각은 없었는데?”

“보통 의뢰가 아닌 건 알겠는데, 네 옆에 있으면 죽지는 않을 거 아냐. 게다가 네 의뢰인…… 돈이 아주 많다며.”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덜컥 계약하겠다고?”

“비싸게 쳐 주겠지.”

트리스탄이 굵은 팔뚝을 실룩이며 웃었다. 목숨 빚은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는 걸로 갚았으니, 그를 고용하는 건 제대로 값을 치르라는 이야기였다. 빚도 갚고, 돈도 벌고. 과연 계산이 빠른 작자였다.

알렉사가 맥스웰을 한 번 바라보곤 그가 내민 서류에 서명했다.

“네가 받는 돈의 두 배.”

“좋아!”

“성공 시엔 세 배.”

“화끈하군!”

트리스탄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 돈이면 패전국 연합으로 쳐들어가 수장의 목이라도 따야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 일이 그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어려운 의뢰가 될 줄도 모르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