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화 (209/319)

183화

남부 함대 병사들은 카루스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다. 멀리 숨어서 이쪽을 힐끔거리던 마을 사람들을 양 떼처럼 몰아서 데려온 것이다.

율리아는 그들의 태도와 행색을 빈틈없이 관찰했다. 그녀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오르테가의 귀족, 아르테 백작이다.”

마을 사람들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았다.

“오르테가 국법상, 해적은 죄의 경중에 상관없이 무조건 사형이다. 알고 있겠지?”

“그럼요. 알고 있습니다.”

“이 남자는 해적인가?”

율리아가 죽은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소리쳤다.

“그놈은 술에 취할 때마다 자기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해적이었는지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죽어 마땅한 놈이죠!”

“해적일 거예요! 성질머리가 아주 고약했거든요.”

“그놈 그거, 질 나쁜 놈입니다!”

소란스러웠다. 율리아는 그 소란이 다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별안간 물었다.

“그래서 죽였어?”

“……예?”

“이 남자가 죽고 나서 누군가 찾아와 뭔가를 찾으면, 그 사람이 누군지를 기억하고 있다가 알려 달라고…… 누가 그랬어? 얼마를 약속받았어?”

“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가 왜 사람을 죽여요?”

“해적이잖아.”

율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말한 해적이 죽은 남자를 가리키는 줄 알고, 아무리 못된 해적이라도 옆집 살던 사람을 죽이겠느냐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율리아가 말한 해적은 바로 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다들 소매 걷어.”

“예?”

“소매 걷고, 웃통 벗어. 명령이야.”

더 협박할 필요도 없었다. 카루스가 손짓하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마을 사람들의 윗옷을 거칠게 벗겼다. 그들은 반항했으나 카루스의 병사들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바바슬로프가 한숨과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죄다 해적이었냐?”

팔뚝과 등, 가슴에 문신이 많았다. 남부의 해적을 상징하는 덩굴장미와 세이렌, 그리고 뱀을 삼킨 해골.

율리아가 카루스에게 물었다.

“남부 함대 제독은 해적을 즉결 처형할 수 있나요?”

“물론이다.”

“그럼 여기서 이 자들을 다 죽여도 상관없겠네요.”

“그렇지.”

카루스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았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날이 햇빛을 받아 쨍하게 빛났다.

순박한 마을 사람인 척 연기하던 해적들은 모두 즉결 처형하겠다는 율리아의 협박에도 쉽게 굴하지 않았다.

“무슨 소립니까! 우리는 해적이 아니에요! 이, 이건…… 젊었을 때 철이 없어서 저지른 실수요!”

그들은 어떻게든 거짓말로 이 상황을 벗어나려 애썼으나, 상대가 너무 나빴다.

“닥쳐라.”

카루스가 칼을 들고 해적들 앞에 섰다.

“내가 왜 바이칸 서부에서 무혈 제독이라 불리게 됐는지 알려 주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서인가, 아니면 적 앞에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기 때문인가.

작은 마을에 비명이 가득했다. 끔찍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율리아는 무덤덤한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곳부터 차례대로 사람이 사는 흔적이 있는 집들을 뒤졌다. 바바슬로프가 그녀와 함께 다니며 해적들이 감춰 놓은 귀중품을 찾았다.

대체로 가난한 자들이었다. 왜 도망가지 않고 이 작은 어촌에 머물러 있나 했더니, 죄다 버림받은 모양이었다.

죽은 해적처럼 술과 도박에 찌들어 빚만 잔뜩 짊어진 자들. 할 줄 아는 거라곤 사기 치고 폭력을 쓰는 일뿐이라, 어촌에 살면서 그물질 한 번 해 본 적 없는 자들.

그렇게 이 집 저 집 뒤지고 다닌 끝에 율리아는 어느 해적의 집에서 박제한 철갑상어를 발견했다.

“이 집 주인을 데려와 주세요. 아마 이 사람이 죽은 해적에게 해적왕의 유서를 흘렸을 거예요.”

“뭐? 그걸 어떻게 알아?”

“바이칸 제국에서 뱃사람들 사이에 유행하던 거예요. 강에 사는 물고기인데, 바다에서 잡으면 행운이 온다는 미신이 있거든요.”

오르테가 남부, 이 작은 외딴 섬에 바이칸의 물건이라.

율리아가 제국의 바다를 떠돌아다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말했다. 바바슬로프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곤 카루스에게 달려갔다.

그사이 율리아는 집을 더 뒤져서 바이칸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물건을 몇 개 더 찾았다.

편지나 보고서 같은 건 보이지 않았으나, 은밀한 곳에 감춰 둔 금화 상자를 찾았다. 때가 되면 달아날 생각이었는지 간단하게 짐을 꾸려 놓은 가방도 있었다.

“이거 놓으십시오! 저는 진짜 아무것도 모릅니다!”

집주인이 끌려오며 몸부림을 쳤다. 카루스에게 얻어맞았는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율리아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누가 줬어?”

“도대체 무슨 말인지…….”

“해적왕의 유서. 누가 줬냐고.”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몇 번을 말합니까!”

“전당포까지 따라왔던 것도 당신이지? 죽은 해적이 운 좋게 주웠다던 것도…… 당신이 그렇게 만든 거겠지.”

“나는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무사히 제국으로 달아나게 도와주지. 저 안에 모아 둔 금화도 가져가게 해 줄 거야. 네 의뢰인에게 뭐라고 해야 하는지도 알려 주고.”

“뭐라고요?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네.”

“하지만 자꾸 그렇게 나온다면 너와 이 마을 사람을 데리고 오르테가로 가서 처형장에 세울 거야. 해적의 처형식은 오랜만이라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겠지.”

“아니, 백작님…….”

해적은 끝까지 율리아의 말을 못 알아듣는 척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를 골라 죽여 놓고 다 같이 내빼는 걸 보니까 돈을 나눠 갖기로 한 모양인데……. 내 말대로 한다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처형장으로 끌고 가고, 당신만 달아나게 해 줄게.”

“……정말입니까?”

“그래.”

“제가 가서 뭐라고 전해야 하는데요?”

“‘해적왕의 유서를 가져간 사람은 주벤 아르테라고.’”

율리아가 아버지의 이름을 말했다.

“주벤 아르테가 누굽니까?”

“너와 같은 해적.”

“그자의 이름을 대기만 하면 됩니까? 다른 건 뭐…… 그냥 대충 지어낼까요?”

“전당포에 장물로 내놓고 기다렸더니 주벤 아르테라는 남자가 사람을 보내 미끼를 죽이고 유서를 가져갔다고 해.”

해적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율리아가 시키는 대로 해적왕의 유서를 건넨 자에게 돌아가서 그녀가 알려 준 이름을 대겠다고.

그러나 율리아는 해적이란 자들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특별히 해적을 증오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가 해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율리아를 보육원에 맡길 때 금방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해 놓고 끝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해적이란 거짓말이 입에 배어 있는 자들이다.

약속은 무의미하고, 믿음은 허상이다. 율리아가 그를 보며 웃었다.

“넌 의뢰인에게 돌아가면 십중팔구 죽어.”

“예? 왜요?”

“원하는 정보만 얻고 나면 죽여 없애는 게 이 바닥 규칙이거든. 비밀이란 건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데, 죽이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어디 있겠어.”

해적은 긴가민가한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본 율리아는 그가 의뢰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자라고 확신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하면 안 죽을 거고.”

“그걸 어떻게 압니까?”

“주벤 아르테는 이 세상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사람이거든.”

의뢰인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해적이 가져온 정보가 사실인지 아닌지 파악해야 하는데, 그걸 알 수가 없을 테니까.

율리아는 아버지가 오래전에 죽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여태 그녀를 데리러 오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바로 출발해.”

바바슬로프가 해적에게 금화와 여행 가방을 내밀었다.

* * *

바이칸 용병계에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바로 일당백이라 불리는 은발의 천재 소녀에 관한 것이었는데, 의뢰가 있을 때마다 매번 다른 이름으로 나타났다가 최단 시간 내에 일을 해결하고 홀연히 사라진다는 이야기였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빚이 많아 돈에 집착한다던 소문도 있었고, 나이는 어린데 세상 다 산 노인처럼 초연하다던 소문도 있었다.

나타났다 하면 아무리 어려운 의뢰도 순식간에 해결해 버리고 돌아간다는 용병계의 전설.

지난 한 해 동안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 어디서 죽었거나 혹은 빚을 다 갚고 은퇴한 건가 하는 소문만 무성하던 그때, 그녀가 바이칸 서부의 항구 도시 무스빌리에 나타났다.

“트리스탄을 만나러 왔는데.”

짧게 자른 은발을 한 손으로 쓸어 올리며, 여자가 말했다.

술집을 가득 메우고 있던 사나운 인상의 용병들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술집 주인이 물었다.

“네가 누군데?”

“알렉사라고 전해.”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

“전하면 알 거야.”

술집 주인이 하하 웃었다. 그러곤 손때 묻은 바 테이블을 검지로 문지르며 말했다.

“그냥 여기다 금화 열 개쯤 올려놓고, ‘제발 부탁인데 트리스탄을 만나게 해 주세요.’라고 말해. 그러면 관대한 우리가 그 부탁을 들어줄지 말지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생각해 볼게.”

용병들이 왁자지껄 웃었다.

알렉사가 눈동자를 스르륵 굴려 술집 주인과 그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용병과의 거리를 쟀다.

그녀는 길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용병들은 말보다 돈을 좋아하고, 그보다는 실력이 우선이었다.

한 손을 뻗어 술집 주인의 멱살을 잡은 알렉사가 그를 잡아당겨 바 테이블 위에 엎드리게 했다. 그러곤 다른 쪽 손으로 그가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뒷덜미에 갖다 댔다.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놀란 용병들이 술잔을 내려놓고 각자의 무기에 손을 갖다 댔다.

알렉사가 조용히 말했다.

“트리스탄한테 한마디만 전하면 돼. 알렉사가 찾는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