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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화 (208/319)

182화

유서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율리아는 그 자리에 선 채 아주 빠른 속도로 편지를 읽었다.

편지를 쥔 그녀의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짙은 초록색 눈동자에 격렬한 파문이 일었다.

차분하려 애쓰던 것이 무용하게, 율리아가 꽉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죽을 때마다 죽었어……?”

“뭐라고?”

“내가 죽을 때마다, 같이 죽었어.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죽어 버렸어……? 도대체 누가?”

그녀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카루스는 율리아의 손에서 해적왕의 유서를 빼앗았다. 그러곤 다급하게 읽기 시작했다.

[네가 광산 노예로 태어났다는 것을 안다. 삶을 반복한 끝에 그 굴레를 벗어던지고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것도. 우리는 죽음의 순간을 공유하며 서로를 찾아 헤매게 되는 존재이니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카루스가 낡은 종이를 손에 쥔 채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너 때문에 몇 번이나 죽었는지 모른다. 행복했던 순간에도, 목숨 건 투쟁 끝에 해적왕이 되었을 때도, 네가 죽는 순간 내 삶이 끝난다는 걸 알았다. 무엇을 이루어도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삶. 내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얼마나 울부짖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긴 편지였다. 해적왕은 대적자라 부르는 상대를 증오하고 원망했으며,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는 해적질을 하다가 발견한 파란색 보석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그걸 ‘푸른 바다의 환초’라고 불렀다.

[그러나 삶을 거듭하는 동안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이 미칠 것 같은 고통을 이해하는 존재 역시 이 세상에 오직 너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해적왕은 이 편지가 유서가 될 것이란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죽은 뒤 누군가 이 편지를 발견한다면 태워 없애 달라는 부탁이 쓰여 있었다.

[나는 마침내 너를 찾을 것이다.]

카루스가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나와 같은…….”

그녀는 짙은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래전에 죽은 해적왕에게, 해적왕의 대적자에게, 그리고 그녀가 아홉 번째를 사는 동안 똑같이 삶을 반복하며 고통받았을 자신의 대적자에게.

의사가 시신을 조사하는 사이, 율리아는 해적왕의 유서를 손에 쥔 채 집 밖으로 나와 서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바닷바람이 낯설게 느껴졌다.

피부를 스치고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는, 옷자락을 툭 치고 지나는 바람.

바람뿐만이 아니었다. 규칙적으로 밀려오는 파도 소리도, 비린내 섞인 짠 내음도 모두 낯설었다.

그건 자신과 이 세상 사이의 괴리감 때문이었다.

나는 살아 있는 게 맞나. 어쩌면 오래전에 죽어서 삶도 죽음도 아닌 상태를 이어 가고 있는 건 아닌가. 이 세상은 진짜가 맞나. 나만 진짜고, 모두가 가짜인가. 아니면 이건 진짜 세상이고 나만 가짜인가.

복수를 이뤘다. 아홉 번째를 사는 동안 집착하며 매달렸던 복수를 마침내 이루고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후작 부인과 후작의 죽음을 확인했다. 바실리에게 똑같은 고통을 안겨 주고, 크리스틴이 절망 속에서 헤매다 죽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앞으로 이어질 오르테가 역사에서 마조람이라는 이름을 지워 버렸다. 이제 이 땅에 마조람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후작가와의 원한을 풀어야만 이 지독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원히 삶을 반복하게 되더라도 복수하겠다는 결심은 변함없었으리라.

하지만 이후에 밀려올 공허함에 대해선 대비하지 못했다.

‘복수가 끝이 아니라면…….’

아무렇지 않은 척 일상을 지켰으나 율리아의 마음은 현실로부터 멀어져 붕 떠 있는 상태였다.

온갖 색채와 소음, 냄새와 촉감으로 선명하던 세상이 텅 빈 채 아득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고요하고, 무의미했다.

평민이라고 천시하더니 백작이 된 걸 축하한다며 선물을 건네는 위선적인 귀족들을 마주하면서도, 율리아는 웃었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미워지지 않았다.

그 모든 게 정해진 일처럼 느껴졌다. 내면의 진실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 같았다.

붉은 물감을 풀면 붉어지고 푸른 물감을 풀면 푸른색이 되는 물처럼, 그녀의 영혼은 한없이 수용적이었다. 낮아지면 흐르고, 높아지면 고이는.

율리아는 복수를 이룬 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길을 잃고 헤매었다.

한데 또 있었다. 그녀가 모르는 미래가.

‘내가 모르는 다른 결말이 있어. 다른 가능성이 있어.’

낯설기 그지없던 바람이 옷깃을 벌리고 훅 밀려들어 왔다. 따스한 봄볕과는 달리, 뼛속까지 스며들 듯한 서늘함이었다.

한적한 어촌의 비린내, 집 안에서부터 풍겨 나오는 악취, 바람을 타고 스미는 짠 내음. 갑자기 코가 찡하도록 이 모든 냄새가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바닷새 우는 소리, 집 안에서 의사와 대화를 나누는 바바슬로프의 목소리, 그리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카루스의 존재감.

현실이었다. 살아 있었다. 이 세상은 진짜였고, 그녀 역시 진짜였다. 그래야만 했다. 저주는 살아 있는 자만을 노리는 신의 장난질이다.

삶에 대한 갈망으로 똘똘 뭉친 희대의 악바리.

푸른 바다의 환초는 율리아 아르테를 선택했다. 이 세상에 오직 그녀만이 그 끔찍한 저주를 품고도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에.

“율리아.”

카루스가 자신을 불렀다.

율리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카루스 님.”

그녀의 시선이 카루스의 등 뒤로 펼쳐진 작은 어촌 마을을 느리게 훑었다.

“이 섬을 봉쇄해 주세요.”

카루스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율리아를 응시하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떠난 줄로만 알았던 마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몰래 숨어 이쪽을 훔쳐보던 마을 사람들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율리아가 속삭였다.

“저들 중에 살인자가 있어요.”

동시에, 집 안에서 의사와 대화를 나누던 바바슬로프가 뛰쳐나와 해적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 같다고 외쳤다.

* * *

죽은 해적의 몸엔 베이거나 찔린 상처가 없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일찍이 그가 살해당했다는 걸 알아챘다. 냄새와 자국, 자세 때문이었다.

의사는 누군가 아주 힘이 센 남자가 해적의 목에 두꺼운 천을 감아 뒤에서 당겨 죽였을 거라고 말했다. 술독에 빠져 죽은 사람처럼 꾸며 놓긴 했으나, 그 흔적을 다 지우진 못했다고.

“사령관님, 섬을 봉쇄했습니다.”

군함에서 내린 병사들이 섬을 봉쇄하고 마을을 감시했다. 카루스는 숨어 있는 자들까지 모두 찾아내라고 명령했다.

바바슬로프가 해적의 집에서 나와 말했다.

“빚더미에 올라 있는 자였습니다. 모아 놓은 돈은 한 푼도 없는데 술과 도박을 끊지 못했어요. 정체를 숨기고 어부인 척 오르테가 부두로 나와 이 집 저 집에 외상값을 달아 놓았죠.”

카루스가 물었다.

“어떻게 찾았지?”

“해적왕의 유서를 장물로 내놓으려 한다는 건 맥스웰의 전당포를 통해 알았습니다. 녀석이 바이칸으로 떠나면서 괜찮은 정보원을 남겨 두고 갔는데, 다행히 누구보다 빨리 그 사실을 알려 주었고요.”

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율리아가 초록색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얼마에 내놓았어요?”

“얼마인지 몰라서 되레 물었다고 하던데. 얼마까지 받을 수 있겠냐고, 아주 신이 나서 떠벌렸대.”

“혼자 왔대요?”

“전당포 안에 들어온 건 혼자였는데, 바깥에 누가 있었던 것 같다고 했어.”

“이름이나 주소 같은 것도 속임수 없이 적었나요?”

“응.”

그렇구나.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적왕의 유서를 어떻게 구하게 되었는지는 말 안 했나요? 누군가에게 훔쳤다거나, 혹은 빼앗았다거나…….”

“주웠다고 했대.”

바바슬로프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말년에 행운이 찾아왔다고, 바다에서 주웠다고 했다던데.”

그렇구나. 율리아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팔짱을 낀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는 카루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카루스 님.”

“말해.”

“저는 세상에 진짜 우연이란 건 없다고 생각해요.”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모든 일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율리아는 한 손에 유서를 쥔 채 그렇게 말했다.

“우리가 저주에 관해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하니까,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갑자기 해적왕의 유서가 나타났어요. 마치 때가 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그래.”

“저는 이런 걸 본 적이 없어요.”

아홉 번을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마지막 해적왕의 유서라니. 그가 율리아보다 먼저 선택됐던 저주의 숙주라니.

“유서를 팔려던 자는 때마침 죽어 있는데, 이게 장물로써 제법 가치 있는 물건이라면 저 사람들이 왜 여태 가만히 내버려 뒀을까요.”

군함이 오는 데도 달아나지 않고, 집 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끈질기게 숨어서 이쪽을 훔쳐보았다.

제대로 된 어선 하나 없는 어촌. 말린 물고기는커녕 그물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집은 많아 한때 사람이 꽤 많이 살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부가 없는 섬이라.

“이보다 더 가치 있는 대가를 받을 예정이니까.”

이놈들, 해적이었군. 카루스가 입술 끝을 쓱 들어 올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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