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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화 (207/319)

181화

노쇠한 국왕 대신 레위시아가 마조람 후작의 죄명을 발표했다. 발표가 끝나자 사형 집행인이 교수대에 죄인을 나란히 세웠다.

후작의 목에 밧줄이 걸리고, 그의 곁에 선 자들에게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율리아는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녀의 의무이자 권리였다. 후작에게 죽임당했던 과거를 하나씩 떠올리며, 그의 생명이 떠나는 순간을 머릿속에 새겼다.

“사형을 집행하라!”

레위시아가 우렁차게 외쳤다.

마조람 후작은 모든 걸 포기한 모습이었다.

율리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후회할까, 억울해할까. 아니면 슬퍼하고 있을까. 아내와 딸을 먼저 떠나보낸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죄책감을 느끼긴 할까.

알 수 없었다. 교수대 바닥이 열리고, 죄수들의 몸이 툭 떨어졌다.

생명이 떠나는 순간은 이토록 짧고, 허무하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다.

“카루스 님!”

그때 누군가 카루스를 찾았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인파를 헤치고 달려온 바바슬로프가 카루스와 율리아에게 다가왔다.

“카루스 님.”

마조람 후작의 생명이 완전히 이 땅을 떠나던 순간, 율리아는 바바슬로프에게서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다.

“마지막 해적왕의 유서를 가진 자를 찾았습니다. 거기 저주받은 돌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유서?”

카루스가 바바슬로프에게 몸을 바짝 기울였다. 율리아도 마조람 후작에게서 시선을 돌려 바바슬로프를 바라보았다.

그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율리아를 보며 말했다.

“단서를 찾았어.”

* * *

마지막 해적왕은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죽었다고 알려진 사내였다.

무혈 제독이 바이칸 서부를 청소하기 전까지, 그곳은 해적들의 천국이었다. 남부보다 더 많은 해적이 그곳 바다를 점령하고 살았다.

그러니 백여 년 전 그곳에서 해적왕이 탄생한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뿔뿔이 흩어져 저들끼리 싸우던 해적들을 규합해 해상 왕국을 세우려 했던 사내.

그는 해적 최초로 역사에 남을 만한 위업을 이룰 뻔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고 알려졌다.

바바슬로프가 말했다.

“만취한 상태로 갑판 위에서 춤추다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카루스였다.

“그건 헛소문이다. 그는 갑판장에게 배신을 당했어. 그가 타던 배를 차지하려는 속셈이었겠지.”

“예? 술 때문에 죽었다던 해적왕의 노래 모릅니까? 선배들이 배 위에서 술 마시면 죽는다고 겁줄 때마다 하던 얘긴데.”

“배 위에선 모자 쓴 놈이 왕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하냐?”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율리아는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배배 꼬아 고정하고 있었다. 트루디가 잘 묶어 주긴 했는데, 자꾸 바람에 날려서 아예 모자 속으로 넣어 버렸다.

“제가 들은 얘기는 또 다른데요.”

“뭐? 달라?”

바바슬로프가 이번에는 또 뭐냐고 물었다. 율리아는 그에게 살짝 웃어 보이고는 멀어지는 드추바 섬을 가리키며 말했다.

“섬들을 차지하고 왕국을 세우려고 했잖아요. 당시 바이칸의 황제가 괘씸하게 여긴 나머지,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그 돈을 노린 해적들이 다 같이 선장을 배신했다고.”

해적들에게 왕국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카루스가 중얼거렸다.

“놈들에겐 규칙이 없어. 규율도 없고, 법도나 정의도 없지. 그저 금화와 술, 여자. 그리고 미신뿐이다.”

“아직도 그들이 믿는 게 전부 미신이라고 생각하세요?”

“얼마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는데…….”

카루스가 율리아를 흘깃하곤 피식 웃었다.

“내가 해적 놈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카루스 란케아는 서쪽 바다의 지배자였다. 해적들의 원수이기도 했다.

동부는 섬이 없고 해안선이 짧으며, 수심이 깊고 암초가 많았다. 게다가 북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거대한 사막으로 이어지는 터라, 해상 무역은 풍요로운 서부를 중심으로 발달해 왔다. 그러다 보니 해적들도 죄다 서부에 둥지를 틀게 된 것이다.

“리바이어던 함대가 정박하고 있는 곳은 어디예요?”

율리아가 물었다. 카루스는 무슨 꿍꿍이인지, 흉흉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북서부 기지. 황제가 날 견제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내 함대는 해안에서 가장 먼 기지로 쫓겨나 움직이지 않고 있어.”

“기사단은요?”

“내 영지에서 침묵 시위하는 중이지.”

카루스의 영지는 바이칸 동부에 있었다. 그가 웃으며 설명했다.

“영지는 동쪽에 있는 걸 쥐여 주고, 함대는 서쪽 바다에 띄우게 했어. 그래야 함대와 기사단의 거리가 멀어지니까. 그런 뒤에 나는 단출하게 서른 명만 데리고 남부로 내려가게끔 한 거야.”

“진짜 싫었나 봐요.”

“나도 싫어.”

카루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들이 타고 있는 건 남부 함대에서 가장 큰 배였다. 주로 사령관이 타고 움직이는 기함이었는데, 카루스의 명령 한마디에 바짝 긴장해서 움직이는 해군 병사들을 보며 율리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저렇게 겁을 먹고 있어요? 해적선을 만날까 봐 무서워서 그러는 건가요?”

“아니.”

“그럼 왜…….”

“나도 몰라.”

카루스가 별거 아니라는 듯 율리아를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뒤에서 바바슬로프가 뭔가 심한 욕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화가 날 때마다 사람을 하나씩 바다에 집어 던져 놓고는 모른다니 말도 안 된다면서.

“내일 아침이면 도착할 거야.”

마지막 해적왕의 유서를 가진 자는 꽤 나이를 먹은 해적이었다. 해적질하면서 모은 돈은 이미 다 탕진하고 없고, 노후에 비렁뱅이가 될 처지가 되자 그가 가진 가장 값진 것을 팔려고 몰래 내놨다가 걸렸다는 것이다.

율리아와 카루스는 그를 찾으러 드추바 섬에서 하루 거리에 있는 작은 섬으로 향했다.

“악명 높은 해적이면 이참에 사로잡아서 레위시아한테 갖다줘. 놈이 공을 세울수록 왕이 될 확률이 높아지잖아.”

“그래야겠어요.”

“놈이 빨리 왕이 되어야 일이 좀 편해지지.”

“지금 레위시아 전하를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요?”

“답답해서 그래.”

“착해서 그래요.”

“왕좌를 차지하려는 놈이 착해서 얻다 쓰게.”

그 점이 좋아서 곁에 있는 거라고, 율리아가 속삭였다. 카루스가 그럼 나는 나쁜 놈인 것 같냐고 물었다.

율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의뭉스레 웃기만 했다.

배는 빠르게 나아갔다. 드추바 섬에서 하루 거리에 있다더니, 하루가 다 지나기도 전에 항해사가 달려와 섬이 보인다고 알려 주었다.

“정박해.”

카루스가 명령했다.

그곳은 해적들의 섬이라기엔 무척 볼품없는 곳이었다. 그저 작은 어촌 마을에 가까웠다. 집은 많았는데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오르테가와 가까운 위치에 있다 보니 겁 많은 해적들이 카루스의 함대를 피해 섬을 버리고 죄다 달아난 모양이었다.

마지막 해적왕의 유서를 가지고 있다는 해적은 어쩌면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 작정이었으리라.

율리아와 카루스는 그가 살고 있다는 한 허름한 집으로 향했다.

“이 집입니다.”

바바슬로프가 다짜고짜 문을 열었다.

우지끈하는 소리가 나며 낡은 문이 열렸다. 만약에 대비해 카루스가 앞에 서고, 율리아는 그의 등 뒤에서 최대한 차분하려 애썼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마자 밀려오는 끔찍한 악취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이게 뭐야…….”

바바슬로프가 소매로 코를 막고 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카루스도 율리아를 물러나게 하곤 혼자서 안으로 들어갔다.

“카루스 님!”

“들어오지 마.”

카루스의 목소리가 낮았다.

율리아는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바바슬로프가 입구를 막은 채 손을 휘저어 율리아를 밀어내더니,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열어 환기를 시켰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율리아는 들썩이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건 사람이 죽었을 때 나는 냄새였다. 처형당한 해적들의 주머니를 털며 살았던 그녀에게 너무나 익숙한 냄새.

율리아는 마음을 다 가라앉힌 뒤에 안으로 들어갔다.

“야, 복덩이. 들어오지 말라니까…….”

작은 집 안엔 빈 술병과 낡은 무기, 오래된 항해 용품이 너저분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집의 주인은 응접실 한쪽 소파에 앉은 채로 죽은 상태였다.

상처는 없어 보였다. 냄새는 지독한데, 시체는 깨끗했다.

“바바슬로프, 의사를 데려와.”

“알겠습니다.”

카루스가 죽은 해적의 시신을 조사할 의사를 불렀다. 율리아는 그와 함께 집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누가 유서를 훔쳐 간 걸까요? 그래서 죽은 걸까요?”

“그게 그렇게까지 귀한 물건인 줄은 몰랐는데.”

“팔려고 내놨을 정도니까 누군가에겐 값비싼 수집품일 수 있겠죠.”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깨끗하게 죽었어. 싸운 흔적도 없고, 물건을 뒤진 흔적도 없고.”

카루스의 말이 옳았다. 해적의 집은 너저분했지만, 누군가 일부러 망가뜨린 것 같진 않았다.

그가 유서를 찾아 집 안을 뒤지는 동안, 율리아는 해적의 시체 앞에 서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늙은 남자였다. 한때는 위세 높은 해적이었을지 모르나 이제는 죽은 노인에 불과했다.

율리아의 시선이 남자의 팔뚝에 가서 닿았다. 한때 해적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열 명을 죽일 때마다 한 송이씩 새긴다던 덩굴장미가 무성했다.

율리아가 손을 뻗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죽은 해적의 재킷을 열어젖히고, 그 안에 입고 있는 조끼를 더듬었다.

“율리아!”

카루스가 기겁하며 그녀를 말렸다. 하지만 율리아는 기어이 그 조끼 안에 가죽을 덧대 만든 주머니를 발견했다. 안에 무언가 있었다.

마지막 해적왕의 유서였다.

[나의 대적자,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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