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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화 (206/319)

180화

“뭐라고?”

“뭐라고요?”

레위시아와 코코가 동시에 물었다. 율리아도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카루스는 최대한 짧게, 사실만을 말했다.

“여기 오기 바로 전에 상인들을 통해 들은 얘기야. 이쪽에도 곧 소식이 닿겠지. 크리스틴 마조람과 후작가의 가신들이 데네브라 황비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고 한다.”

“세상에…….”

레위시아가 무거운 신음을 내뱉었다. 코코도 그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왜죠?”

“그날 기분이 좋지 않았겠지.”

“블라이스 백작이 써 줬다던 그 소개장, 황비가 그걸 받았을까요? 병력을 이끌고 오르테가를 침략하려고 할까요?”

“그건 아직 몰라. 하지만 기습은 불가능해.”

바닷길은 카루스의 손바닥 안에 있고, 육로로 오려면 티타니아를 넘어야 한다.

“데네브라는 덩치가 크고 힘도 세지만 경험이나 기술은 부족한 아이와도 같아. 물자와 병력이 충분해도 황제가 아닌 이상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고.”

카루스의 말은 타당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안심할 수 없었다.

레위시아가 입맛이 떨어졌다며 포크를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마조람 후작을 물리쳤는데 왜 아무것도 끝난 것 같지가 않을까. 왕국 밖에서는 바이칸의 병력이 내려올까 봐 눈치가 보이고, 왕국 안에서는 마조람 후작의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봐 조마조마해야 하고.”

“레위시아 님.”

율리아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이미 제 몫의 음식을 다 먹고, 트루디가 가져온 디저트에 손을 대고 있었다.

“크리스틴이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반란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럴까? 고작 후계자 하나 때문에?”

“그게 아니라…… 크리스틴을 죽인 게 데네브라 황비이기 때문이에요.”

마조람 후작의 잔당들은 친제국파이며, 오르테가 국왕보다 바이칸의 황제를 더 두려워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크리스틴이 데네브라 황비의 손에 살해당한 이상, 그들은 기댈 데 없는 외톨이가 되었다고 봐야 했다.

“반란도 희망이 있어야 일으킬 수 있잖아요.”

“황비가 뜻밖의 도움을 주었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요.”

레위시아가 다시 입맛이 돌아왔다며 포크를 들어 올렸다.

겨울이 지나 봄이 한창인데도 여태 병치레 중인 국왕 때문에 샤트린과 레위시아는 한동안 일에 치여 살았다. 특히 왕위 후계자인 샤트린은 반역죄에 가담한 귀족들의 영지와 재산을 왕가에 귀속시키느라 문서에 파묻혀 얼굴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레위시아의 야윈 얼굴을 노려보던 코코가 그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편식하지 말고 잘 좀 드세요. 볼 거라곤 얼굴뿐인 사람이 그렇게 비쩍 말라서 어쩌려는 거예요?”

“볼품없어지면 좋지, 왜?”

“그게 왜 좋아요? 제정신이에요?”

“지난번엔 내가 그 미친 황비의 첩으로 팔려 가다가 죽었다잖아! 넌 그 얘길 듣고도 그런 말이…….”

코코에게 버럭 화를 내던 레위시아가 아차 싶었는지 갑자기 목소리를 줄였다. 그러곤 눈동자를 굴리며 율리아의 눈치를 보았다.

“미안.”

“괜찮아요.”

“네 과거 얘기를 꺼내려던 게 아니었는데.”

“아뇨. 정말 괜찮아요. 그런 것 때문에 상처받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상처받아야 할 사람은 율리아가 아니라 레위시아였다. 그는 율리아의 지난 삶에서 데네브라의 첩으로 팔려 가다가 티타니아 산맥에서 죽었다.

“코코, 넌 도대체 뭐 한 거야. 날 지켜 줬어야지.”

“말을 더럽게 안 들었나 보죠.”

“말 잘 들으면 지켜 줄 거야?”

“이제 다 컸으면 제발 좀 지켜 달라는 말 말고, 지켜 준다는 말을 좀 해 보시면 안 돼요?”

“내가 널 어떻게 지켜! 누가 봐도 이쪽이 약자인데!”

“율리아, 다음 삶으로 가게 되거든 절대 왕궁으로 들어오지 마. 차라리 날 데리고 여기서 나가.”

코코가 신경질을 내며 말했다. 레위시아는 율리아가 상처받을까 걱정됐는지 코코에게 마구 눈치를 주었지만, 그녀는 그걸 전부 무시했다.

“이번엔 안 죽을 거니까 괜찮아요. 평범하게 늙는 결말도 있잖아요.”

“코코!”

“나 어릴 때 점쟁이가 그랬단 말이에요. 장수할 상이라고. 내가 봤을 땐, 얘도 크게 다르지 않을걸요. 그 짜증 나는 저주만 아니었으면 지겹게 오래 살았을 거예요.”

그런 뒤에도 다시 살게 된다면 그때는 이렇게 하자고, 코코가 진지하게 계획을 짰다.

“일단 오르테가로 와. 브레웨 훈장까지는 받아도 괜찮아. 그런 뒤엔 곧바로 남부 함대 전임 사령관의 비자금을 빼앗고, 상인연합의 비밀 금고까지 털어. 그 돈이면 우리끼리 평생 놀고먹고도 남잖아.”

레위시아가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뭐? 마조람 후작은?”

“알 게 뭐예요. 왕국이고 나발이고, 다 같이 공멸하라지.”

“와…… 나쁜 사람.”

그들의 이야기에는 다음 삶으로 가면 모두가 율리아를 기억하지 못할 거란 사실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율리아는 코코와 레위시아가 토닥거리며 다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부드럽게 말했다.

“제가 어떻게 죽어도 다음 삶에선 아무도 만나지 않을 거예요.”

늦은 밤이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도 한참 동안 함께 술을 마시던 레위시아와 코코가 먼저 방으로 돌아가 잠들었다. 일이 많아 피로가 겹친 탓이 컸다. 율리아는 두 사람을 들여보낸 뒤에야 카루스와 함께 왕자궁 밖으로 나왔다.

“오늘도 밖에서 잘 건가?”

“밖이라뇨. 이제 거기가 안이에요. 왕궁 시녀는 왕궁에서 살아야 한다는 법도 같은 건 없거든요.”

“코델리아 시녀장은 왕궁에서 살잖아.”

“그건 오래전에 코코가 힌치 백작님이랑 하도 싸워서 집을 나오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고요.”

“그렇군.”

카루스가 알 만하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요즘 율리아를 괴롭히는 저주를 조사하면서 코코와 제법 친해진 상태였다.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은 평화로웠다. 반역자의 처형을 앞두고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도 왕궁 밖의 사람들에겐 그저 하나의 사건에 불과했다.

“알렉사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요.”

율리아는 알렉사에게 가지 말라고 말했다. 저주 같은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위험을 자초하지 말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알렉사는 완고했다. 그녀는 배를 타고 바이칸으로 넘어가, 카루스의 부하들과 함께 북부를 뒤져 보겠다고 약속했다.

“지금쯤이면 오르테가 해역을 벗어났겠지.”

“같이 가고 싶었는데.”

세 번째였던가, 네 번째였던가. 골치 아픈 저주에 걸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 율리아는 자신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복수에 매달리는 삶을 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저주의 정체를 파헤쳐 그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둘 다 이루려면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랐다. 율리아는 매번 최선을 다해 살았으나 혼자 힘으로 복수를 이루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저주를 파헤치는 데 매달려 살 수도 없었다. 마조람은 언제나 그녀를 죽이려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들을 저지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시도할 수 없었다.

처음이었다. 복수에 성공한 것도, 저주에 대해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 것도.

율리아는 점점 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가면 같은 미소가 사라지고 있었다.

카루스가 그런 그녀를 응시하다 말을 걸었다.

“나도 만나지 않을 건가?”

“네?”

“어떤 삶을 살다가 죽게 되더라도, 아무도 만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카루스 님은 매번 제 목숨을 구해 주시니 만나기야 하겠죠.”

“그 후엔?”

잊히고 싶지 않다. 카루스는 율리아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다음이 있다면 율리아가 모든 걸 포기한 채 혼자가 되게끔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율리아가 카루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바바슬로프를 살려야죠. 기사님들도 마찬가지고.”

“그런 뒤엔?”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고?”

“진짜 모르겠어요. 카루스 님, 저도 제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머뭇거리던 율리아가 조심스레 그에게 말했다.

“다시 살게 될 것 같지가 않아요.”

“뭐?”

“이번이 진짜 마지막인 것만 같은 느낌이에요.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일까. 율리아는 삶을 반복하게 된 이후 처음으로 시간이 너무 빨라 하루하루가 아깝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마조람 후작의 사형 집행일이 되었다. 이번엔 처형장이 아니라 중앙 광장이었다. 광장 한복판에 반역자를 처벌하기 위한 임시 처형대가 세워지고, 왕국 전체에 왕명이 공표되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마조람 후작은 오르테가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악명 높은 귀족이었다. 그와 함께 처형되는 측근들의 숫자도 10명이 훌쩍 넘었다.

국왕은 마조람 후작이 저지른 범죄를 낱낱이 기록한 게시문을 왕국 곳곳에 걸어 두도록 했다.

“죽여라!”

“반역자를 죽여라! 제국의 개는 지옥으로 꺼져라!”

한때는 마조람 후작과 친제국파가 있어 왕국이 제국의 침략을 당하지 않는 거라 여기던 자들도 모두 모여 그를 비난했다. 후작의 처형을 바라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왕은 왕이군.”

카루스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부패한 귀족을 향한 백성들의 분노는 왕에겐 양분 같은 거지.”

“꼭 다른 사람 같네요.”

율리아가 후작을 보며 말했다. 그녀는 레위시아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카루스와 함께 서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카루스가 레위시아의 손님이었기에, 수석 시녀인 그녀가 보좌하는 모양새였다.

마조람 후작은 다른 사람처럼 변한 모습이었다. 풀어헤친 머리카락은 회백색이고, 비쩍 마른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비틀거리는 꼴이 굳이 처형대에 세우지 않아도 며칠만 내버려 두면 알아서 죽을 것 같았다.

“고문을 많이 당했나 봐요.”

“왕이 그동안 맺힌 게 많았겠지.”

“우습네요. 어차피 공범인데.”

이번에는 율리아가 냉소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국왕의 태도가 우스웠다. 이간질로 둘의 사이를 갈라놓은 건 그녀였으나, 왕이 후작을 적으로 여기고 자신을 피해자라 여기는 건 어처구니없었다.

“시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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