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죽지 않는 여자와 살 수가 없는 남자
새가 가져온 서찰 속엔 데네브라가 오르테가에서 온 귀족을 무참히 죽였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크세노 황제는 서찰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카루스에게 여자가 생겼다고?”
참 요즘은 예상치 못했던 일투성이였다. 데네브라의 방종에 이어 북부 패전국 연합이 전선에서 물러난 것도 참을 수 없이 거슬리는데, 그 카루스 란케아가 사랑에 빠졌다니.
“믿을 수 있는 이야긴가, 이게?”
황제가 묻자, 그의 곁을 지키던 심복 호르헤가 부정하며 말했다.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무혈 제독은 부모와의 사이에서도 정이 없던 사내입니다.”
“그렇지?”
“오르테가에 사람을 보내 보겠습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라.”
황제는 요새 꼭대기에 올라 북부 전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막상 덤비지는 않으면서 살벌하게 대치 중인 북부 패전국 연합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서로의 경계가 조금만 느슨해져도 공격 명령이 내려질 수 있었다. 그런데 황제는 북부로부터 미련 없이 시선을 돌려 남쪽을 바라보았다.
“호르헤.”
“예, 폐하.”
“마지막 해적왕의 유서를 남부에 흘려라.”
“유서…… 말씀입니까.”
“그래, 이왕이면 해적들의 손을 거쳐서 카루스에게 들어가도록 조치해.”
“알겠습니다.”
심복 호르헤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황제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빠르게 요새 아래로 내려갔다.
황제의 시선은 이제 아예 남쪽을 향해 있었다. 그가 상념에 잠긴 사이 각 부대의 지휘관들이 달려와 긴급한 보고를 올렸으나, 황제는 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폐하, 이러다 북부 전선이 무너지면 큰일입니다! 놈들이 전면전을 포기하고 물러난 것은 방향을 돌려 기습 작전을 펼치기 위한 것으로…….”
“알았으니까 물러나라.”
“출전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저의 부대와 가문이, 폐하께 승리를 안겨다 드릴 것입니다!”
“비켜라.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아무리 호소해도 소용없었다. 지휘관들은 전쟁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몰랐다. 황제는 그들을 설득하긴커녕 알아서 하라는 명령만 내려놓고 요새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폐하께서 왜 저러시는 건가! 북부를 빼앗기면 지금까지 정복했던 국가들이 모두 자립을 외치며 들고 일어날 것인데!”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폐하의 성격이 조금 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변했다고?”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지휘관들이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렸다.
크세노 이베르트 바이칸.
바이칸 제국의 16번째 황제인 그는 평생 대륙 통일을 목표로 해 왔다.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통일 제국에 관한 꿈은 그의 존재 이유와도 같았다. 젊은 시절부터 그의 행보는 온통 전쟁뿐이었다.
폭군, 전쟁광, 학살자. 그를 따라다니던 별명은 곧 바이칸 제국의 역사가 되었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대륙을 통틀어 그에게 대적할 만한 자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세상 모든 것이 너무나 쉬웠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지도가 바뀌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크세노가 자신에게 돌아온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를 손에 쥐고 깊이 들여다보았다. 요사스러운 붉은 빛이 그의 시선을 빼앗았다.
몇 번째인가. 이 불길한 보석이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
이번 삶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점이 너무 많았다. 그중 가장 큰 의문은 데네브라가 살아남아 남부 오르테가를 치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언제나 카루스의 손에 죽었던 그 여자는 1년이 지나도록 살아남아 크세노의 주의를 끌고 있었다.
카루스 란케아가 원인이었다.
1년 전 티타니아에서 데네브라가 녀석을 죽이려 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루스는 언제나 살아남았으니까,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착각이었다. 카루스가 아니라, 그의 부하들이 문제였다.
카루스는 부하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 데네브라를 죽여 왔다. 이번 삶에서는 그의 부하들이 모두 살아남았기에 얌전히 남부로 내려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황제는 그를 주시했다.
카루스는 남부로 내려간 뒤에도 황제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불법 비자금 문제를 일으킨 전임 사령관을 색출한 것도 모자라, 드추바 섬에 주둔지를 세우기까지 했다. 최근엔 그 주범인 한 귀족 가문을 오르테가에서 도려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들이 친제국파이건, 반제국파이건 황제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르테가의 국왕은 토끼처럼 겁이 많아 절대 제국에 반기를 들지 못한다.
“전쟁은 중요한 게 아니야.”
크세노가 중얼거렸다.
그가 손가락으로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를 만지작거렸다.
“도대체 누굴까.”
궁금해 미칠 노릇이었다. 삶을 반복하면서 정처 없이 찾아 헤매었으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던 그의 대적자.
어쩌면 지금 카루스의 곁에 있는 건 아닐까.
* * *
율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알렉사와 맥스웰이 바이칸으로 떠난 이후 그녀는 담담한 태도로 일상을 지켰다. 귀족이 되었으니 마땅히 해야 할 영지 관리와 저택 보수에 힘쓰고, 왕자궁의 수석 시녀로서 레위시아의 일을 도왔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그녀는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 일이 많았다.
율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랐다. 레위시아가 농담조로 가볍게 물어도, 코코가 짜증을 내면서 물어도, 그녀는 언제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반역을 저지른 마조람 후작에 대한 재판이 겨울과 봄에 걸쳐 마침내 끝났다. 사형이었다.
후작과 몇몇 측근의 처형일이 정해지고, 나머지 파벌 귀족들은 작위를 잃거나 막대한 양의 벌금을 내는 등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긴 재판을 끝낸 레위시아가 반쪽이 된 얼굴로 왕자궁에 돌아온 날이었다. 하녀들이 그를 위해 만찬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율리아와 카루스, 레위시아와 코코가 커다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다.
“열흘 뒤야. 교수형이고, 공개 처형될 거야. 후작 부인이 그런 식으로 죽어 버려서 누군가는 백성들 앞에서 대역 죄인 역할을 해야만 한다더군.”
“중앙 광장에서요?”
“그렇겠지. 성벽에 매달지 않는 게 어디야. 생각만 해도 끔찍하잖아. 난 왕족이니까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데…… 너희는 따라오지 마.”
레위시아가 율리아와 코코를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코코는 어차피 갈 생각도 없었다며 콧방귀를 뀌었으나, 율리아는 그의 말에 수긍하지 않았다.
“갈 거예요.”
“율리아, 그걸 봐서 뭐해. 괜히 잠자리만 뒤숭숭하지.”
“그래도 제 눈으로 보고 싶어요.”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더 사람이 많을 거야. 자그마치 마조람 후작이라고.”
레위시아는 율리아가 광장에서 죽을 뻔했던 일까지 거론하며 그녀를 말렸으나 별 효과는 없었다.
코코가 율리아의 편을 들어 주며 말했다.
“내버려 두세요. 눈으로 봐야만 확인되는 것들이 있으니까.”
“위험할 수도 있어. 살아남은 후작의 측근들이 율리아를 공격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지.”
“그럴 정신은 없을 거다.”
카루스가 끼어들었다. 빠른 속도로 음식을 해치운 그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크리스틴 마조람이 죽었다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