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목숨을 걸어……?”
데네브라가 들고 있던 편지를 와락 구겨 쥐었다.
황비는 시선을 맞추고 대화하는 자를 좋아한다던 안내인의 충고에도 겁에 질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던 크리스틴은, 그제야 비로소 눈을 크게 뜨고 데네브라를 바라보았다.
“율리아 아르테는 저희 가문의 원수입니다.”
“네 원수가 카루스의 여자라고?”
“도와주세요, 황비 전하!”
크리스틴은 진심을 담아 외쳤다.
그녀의 일행이 원하는 건 바이칸의 힘으로 오르테가를 정복해서 마조람 후작가와 자신들의 권리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꼭 그 모든 걸 외면한 채 율리아만을 죽여 달라는 것처럼 말했다.
“그래.”
데네브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 소원을 들어주마.”
율리아 아르테. 그 이름이 데네브라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됐다. 성공했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크리스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일이 조금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지만 황비의 입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나왔다는 사실에, 크리스틴과 함께 온 일행도 안심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데네브라가 손가락으로 크리스틴의 미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가는 네 목숨이다.”
내놓을 게 없으면 네 목숨이라도 바쳐라.
데네브라가 손짓했다.
기사들이 움직였다. 황비의 개인 호위들이었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매달리는 크리스틴과 그녀의 일행에게 한 치의 동정심도 내보이지 않았다. 익숙한 일이었고, 당연한 대가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크리스틴의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졌다. 마지막 동아줄인 양 품에 안고 다니던 후작 부인의 유골함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크리스틴은 함께 산맥을 넘어 제국까지 온 일행의 목이 하나씩 잘려나가는 걸 보면서 정신을 놓았다.
“약속해 주세요. 율리아를 죽여 주겠다고! 내 목숨을 바치면, 그 애에게 복수해 주겠다고! 약속을…….”
“죽여라.”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칼날을 바라보며, 크리스틴은 마지막으로 율리아를 생각했다.
율리아, 나는.
어느새 텅 빈 연회장에 붉은 피가 흘렀다.
밤이 되자 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연회장을 청소하던 하인들이 소름 돋는다며 팔뚝을 벅벅 문질렀다.
“안 그래도 분위기 뒤숭숭해 죽겠는데, 저 새소리는 도대체 왜 계속 들리는 거야.”
“쉿, 입조심해. 그러다 네 시체 청소하게 될라.”
하인들이 쉬쉬하며 서로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처참했던 연회장이 눈에 띄게 깨끗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바닥에 쏟아진 피와 유골함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문 앞에서 그들을 감시하던 황비 궁의 시종이 이제 됐으니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시종은 하인들을 모두 내보낸 뒤 문단속을 마치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러곤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가 손바닥만 한 종이에 빠른 속도로 무언가를 휘갈겨 썼다. 열린 창문 밖에서 푸드덕 새 소리가 들렸다.
독수리를 닮은 새였다. 새가 창틀에 날아와 앉았다. 시종은 새의 발목에 매달린 통에 서찰을 넣었다.
“황제 폐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