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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화 (203/319)

178화

경비병은 블라이스 백작이 누군지 몰랐다. 그가 수행원 하나 없이 혼자 찾아왔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율리아는 경비병에게 괜찮다는 뜻으로 살짝 웃어 보인 뒤, 그를 만나기 위해 직접 정원으로 나갔다.

새카만 밤하늘에 별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멀리서 철썩철썩 파도치는 소리가 들리고, 짠맛이 날 것 같은 바람이 불었다.

정원 한가운데 서서 정원사들이 심어놓은 가시나무를 바라보는 율리아에게 블라이스가 다가왔다.

“아르테 백작.”

“오랜만이에요.”

“내 축하 선물은 잘 받았어?”

블라이스가 물었다. 그는 율리아에게 줄 꽃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붉은 색의 야생화였다.

율리아는 그가 내민 꽃을 받아 가시나무에 걸었다.

“그게 축하 선물이었어요? 엿 먹으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블라이스가 율리아에게 귀족이 된 걸 축하한다며 보낸 선물은 한 장의 편지였다.

그는 크리스틴 마조람이 소중하게 품고 간 소개장과 똑같은 내용의 편지를 한 장 더 써서 율리아에게 보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난 그걸 네가 알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크리스틴은 성공하지 못할 거예요.”

율리아가 단정 짓듯 말했다.

크리스틴은 바이칸의 병력을 오르테가로 끌어들여 전쟁을 일으키려는 속셈이겠지만, 황제는 한동안 북부에 발이 묶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데네브라 황비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황제의 허락 없이 전쟁을 일으키진 못해요.”

“그렇지. 맞아.”

율리아가 물었다.

“블라이스, 당신 속셈은 뭐죠?”

그는 기뻐 보였다. 율리아가 복수에 성공하고 귀족이 되어서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반달 모양으로 휘어진 눈에 담겨 있는 것은 애절함에 가까운 호의였다.

“난 네가 승리하길 원해.”

“누구로부터?”

“적으로부터.”

선문답이었다. 율리아가 그를 날카롭게 비웃었다.

갑작스레 칼바람이 불었다. 따스한 남부에 어울리지 않는 바람이라고, 블라이스는 생각했다. 율리아에게서 느껴지는 섬뜩한 광기에 취한 그가 떨리는 한숨을 내뱉었다.

“블라이스.”

목소리마저 달았다. 율리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블라이스는 가슴에 뻐근한 통증을 느꼈다.

“착각하지 마요.”

“내가?”

“난 당신을 위해서 데네브라와 싸우려는 게 아니니까.”

블라이스가 웃었다.

“나를 위해서는 아니겠지. 하지만 카루스 란케아를 위해서는 싸워야 할걸.”

“데네브라가 승리해서 카루스를 차지하면, 패배한 내가 당신의 손아귀에 떨어지기라도 할 것 같아요?”

“아니.”

천만에.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말도 안 된다며 웃음을 터뜨린 블라이스가 율리아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네가 이기길 바라.”

“내가?”

“그러면 너는 완벽해질 거야.”

데네브라는 무서운 여자니까. 교활한 블라이스마저 복종시켜 무릎 꿇렸을 정도로 잔혹한 여자니까. 심지어 그 여자가 손에 쥐고 있는 건 제국의 황비라는 대단한 권력이다.

평민의 신분으로 오르테가 최고의 권력자를 쓰러뜨린 율리아 아르테는 바이칸의 황비 데네브라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짜릿해서 미칠 것 같다고, 블라이스가 속삭였다.

“블라이스.”

율리아가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말했다.

“잘 들어요.”

가시나무에 걸어 두었던 꽃이 바람에 흔들려 툭 떨어졌다. 율리아가 블라이스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을 지배해 줄 폭군을 원한다면, 먼저 그만한 가치를 보여요.”

“뭐?”

“말했잖아. 무가치하다고.”

블라이스가 할 말을 잃고 웃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데네브라의 모습이 율리아와 겹쳐지고 있었다.

“야망이 있구나. 재미있어.”

“데네브라 님, 저는…….”

“분노도 있고 야망도 있는데, 자아가 없다니. 정말 재미있어. 너는 아마 죽을 때까지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폭군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도구라니.”

“저는…….”

“내 것이 되어라. 내가 너의 폭군이 되어 주마.”

* * *

바이칸의 황성은 거대한 도시와도 같았다. 크리스틴은 산맥을 넘고 국경을 지나, 대륙을 가로지르는 긴 여정 끝에 데네브라의 궁에 도착했다.

뾰족뾰족한 첨탑과 화려한 조각들, 경비 삼엄한 정원을 지나자 거대한 연회장이 나타났다.

크리스틴은 그곳을 걷는 동안 자신에게 쏟아지는 제국 귀족들의 시선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크리스틴을 안내하는 남자는 연회가 한창인 홀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황비 데네브라에게 다가갔다.

“인사할 때는 무릎을 꿇되 고개를 숙이지는 마십시오. 눈을 피하는 걸 싫어하시니.”

“네.”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하는 게 좋습니다. 우물거리면 답답하다고 싫어하십니다.”

“네.”

“용건부터 빠르게 전달하십시오. 군더더기가 많은 자를 싫어하십니다.”

오르테가를 떠나올 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어차피 가족들도 다 죽거나 사라져, 무서울 게 없었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 황비가 아니라 황제 앞에 엎드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건 상상해 보지 못했다. 화려한 차림새의 귀족들이 미친 듯이 웃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음악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시끄럽고, 술에 취하지 않은 자를 찾기가 어려웠다.

“존귀하신 황비 전하, 오르테가의 마조람 후작 영애입니다.”

크리스틴을 안내한 자가 데네브라 앞에 먼저 무릎을 꿇었다. 크리스틴도 서둘러 무릎을 구부렸다.

“무릎 꿇지 마라. 작은 게 더 작아져서 아예 안 보이려는 거냐?”

데네브라가 크리스틴을 보고 짜증을 내며 말했다. 장신인 그녀는 크리스틴이 어린애처럼 작아서 무릎을 꿇으면 시선이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존귀하신 황비 전하, 제 이름은 크리스틴 마조람입니다. 제가 여기까지 온 까닭은…….”

“사족이 길구나. 편지나 내놓아라.”

데네브라가 한 손을 내밀었다.

크리스틴은 엉거주춤 서서 품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블라이스의 소개장을 꺼내 내밀었다. 데네브라는 그걸 찢어발기듯 펼쳐 읽어 보았다.

“나를 놀리는구나.”

데네브라는 기분이 나빠 보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아름다운 사람인데도 호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크리스틴은 편지의 내용에 더해 오르테가의 상황을 좀 더 상세히 고발하려 했으나, 데네브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왜 너를 도와야 하지?”

“예?”

“마조람? 이미 사라진 가문이 아니냐. 크리스틴 마조람이 아니라 ‘크리스틴입니다.’ 이렇게 말을 해야 옳지.”

크리스틴의 말문이 막혔다.

“고작 그 작은 왕국 하나 반역으로 쓰러뜨리지 못하고, 아무 능력 없는 후계자가 가문의 이름까지 잃고 찾아오면, 내가 너희를 대신해서 복수해 줄 거라고 누가 그랬어?”

“저희는…….”

보다 못한 일행이 크리스틴을 대신해 나서려던 때였다. 데네브라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함부로 끼어들지 마라. 내가 너희 멋대로 찾아와 떼를 써도 되는 사람인 줄 아느냐? 한마디라도 더 하면 전부 죽일 것이다.”

연회장의 소음이 잦아들고 있었다. 데네브라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사람들이 알아서 몸을 사렸다.

“크리스틴.”

데네브라가 물었다.

“내가 너 대신 그 작은 왕국에 복수하면 어떤 대가를 받을 수 있지?”

“그것은…….”

“정복은 황제의 방식이지, 나의 것이 아니다. 남부는 골치 아픈 곳이야. 육로는 산맥으로 막혀 있고 바닷길은 해적이 득실거려. 가진 걸 다 잃은 네가 나에게 무엇을 주려느냐? 말해 보아라.”

아무것도 없었다. 크리스틴은 대답하지 못했다.

“무능하고 하찮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징징거려. 고자질하면 대신 혼내 주는 부모 밑에서 자라,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어린애가 아닌가.”

반박하고 싶은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은데, 저 여자의 힘을 빌려야만 복수를 이룰 수 있기에 그저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틴.”

데네브라가 다시 물었다.

“카루스 란케아를 아느냐? 그를 보았어?”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다. 대화의 방향을 종잡을 수 없어 헤매던 크리스틴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가 누군지 압니다.”

“오르테가에 그의 여자가 있어?”

“네?”

크리스틴은 데네브라의 의도를 이해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에 자신의 운명이 달려 있음을 알기에 서둘러 대답했다.

“가까이 지내는 시녀가 있습니다.”

“시녀?”

“율리아 아르테라고…….”

입 밖으로 율리아의 이름을 꺼내는 순간, 크리스틴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해방군 수뇌부의 처형장이었다. 배신자를 직접 벌하려는 해방군 급진파의 습격이 있었고, 광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크리스틴은 그때 충동적으로 율리아를 밀어 넘어뜨렸다.

율리아가 밟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 사람들 틈에서 누구의 짓인지도 모르게, 그렇게 죽어 사라졌으면.

차마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을 수는 없어서 가문의 병사들과 함께 달아나던 크리스틴은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았고, 무혈 제독 카루스 란케아가 온몸으로 율리아를 감싸 안고 지켜 내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그는 절박해 보였다. 비키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며 고함을 지르고, 더러운 바닥에 엎드려 율리아를 품에 안았다.

“무혈 제독은…….”

크리스틴이 말했다.

“위험에 빠진 율리아 아르테를 위해 목숨을 걸 정도로, 둘의 관계는 깊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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