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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화 (202/319)

177화

암거래 시장에서 거액을 주고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를 사들인 작자가 그걸 뇌물로 바쳤을 때, 황제 크세노는 보석을 손에 쥔 채 광소를 터뜨렸다.

그때 황제는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불길하게 번쩍거리는 보석을 손에 쥐고, 한참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황제를 오래 보좌해 온 자들도 오금이 저릴 만큼 무서워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폐하! 북부 패전국 연합이 전면전을 포기하고 퇴거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영문을 모를 일입니다. 평원을 차지하려 전면전을 벌일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전선을 포기하고 산지로 물러난다는 첩보입니다.”

전령과 귀족들의 대화를 들으며, 크세노 황제가 흐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높은 하늘에서 그가 기르는 새들이 큰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북부가 물러난다. 이건 또 다른 변수였다. 전쟁 자금도 마련했겠다, 황제가 직접 눈앞에 나타나기까지 했는데 물러난다니. 이렇게 되면 전쟁이 길어질 텐데.

누굴까. 누가 이 멍청해서 어여쁜 자들에게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나.

데네브라는 왜 여태 살아 있는 걸까.

* * *

“맥스웰과 알렉사 시녀를 바이칸으로 보내려고 해.”

카루스의 말에 놀란 율리아가 맥스웰을 바라보았다.

그는 두 사람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삐딱하게 서 있었는데, 율리아가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최근에 사로잡은 해적들은 저주에 관해 아는 게 그리 많지 않았어. 나이가 많으면서 선장급인, 혹은 마지막 해적왕에 대해 잘 아는 자를 잡아야 하는데…… 그런 놈들은 먼바다에서 도무지 얼굴을 내밀지 않으니까.”

“제국에서 다른 하나의 저주를 찾으려고 하시는 거예요?”

“바이칸일 거야. 북부 산지에서 발생했을 확률이 높겠지. 주술사들로부터 내려오는 전설 중에 유사한 것들이 있다고 했으니까.”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려고 한다고, 카루스가 웃으며 말했다.

“마침 황제가 북부에 있다고 들었어. 전쟁 중이라 위험하겠지만, 또 전쟁 중이라 많은 것이 가능해지지.”

율리아가 물었다.

“알렉사가 가겠다고 했어요?”

알렉사는 성인이 되기도 전부터 바이칸에서 용병 생활을 해 왔다. 그녀는 오르테가에서 10년 넘게 지내 온 맥스웰보다 자신이 더 적임자일 거라 판단했다.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더군.”

알렉사는 율리아의 저주에 대해 알게 된 뒤,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됐다는 말을 했다.

그녀는 한때 바이칸을 떠돌아다니며 돈을 받기 위해 폭력을 팔고, 또 그 돈을 강도나 다름없는 사기꾼들에게 바쳤다. 그때의 경험으로 율리아를 도울 수 있다면 자신의 과거에도 의미가 깃들지 않겠냐고 물었다.

카루스는 알렉사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위험한 여정이었으나 알렉사의 실력을 믿었다.

“기뻐하더군.”

“알렉사가요?”

“과거의 자신이 너를 구하고 죽었다는 걸 알아서, 기뻤대.”

“왜…….”

“그것 때문에 네가 구하러 와 줬으니까.”

알렉사는 율리아가 자신을 구하러 왔던 그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어릴 때는 누군가 마음이 선하고 강한 사람이 나타나 그 지옥 같은 현실에서 자신을 구해 줄 거라고 상상하곤 했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뒤에는 그마저도 포기하게 됐다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살다가 죽겠구나, 차라리 내 손으로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했다고.

“선하고 강한 사람이라니, 말도 안 돼요. 저는 그냥 마음의 빚을 남겨 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게 그거 아닌가.”

카루스가 웃었다.

응접실 한쪽에 서 있던 맥스웰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도 알렉사 시녀님이 함께 가겠다고 해서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릅니다. 바이칸은 무섭단 말이에요. 율리아 시녀님을 괴롭히는 저주에 대해서는 아무한테나 의뢰해서 조사를 맡길 수도 없고요.”

“알렉사는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예요?”

“카루스 님하고 비슷하지 않을까요?”

맥스웰이 카루스를 바라보았다.

“흠.”

그도 그게 내심 궁금했던지, 팔짱을 낀 채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알렉사가 전력을 다해 싸우는 장면을 가까이에서 목격한 적이 없으니 둘 중 누가 더 강한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왕자궁의 모든 사람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레위시아는 마조람 후작 파벌 귀족들의 재판을 마무리하기 위해 매일 국왕의 집무실에서 논쟁을 벌였고, 샤트린 공주의 견제를 극복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착실하게 구축해 나갔다.

바깥에선 정원사들이 영차 소리를 내며 나무를 옮겨 심고 있었다. 사철 푸른 나무를 좋아하는 율리아는 방풍림으로 가시나무를 선택했고, 정원 가꾸기에 일가견이 있는 힌치 백작가의 집사가 좋은 나무를 골라 보냈다.

“코델리아 시녀장은 레위시아 왕자 전하의 새 영지를 관리할 대리인을 뽑으러 갔습니다. 전쟁 경험이 있는 노련한 기사 중에서 뽑을 거라더니, 아무래도 바이칸 제국과의 신경전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국왕이 레위시아에게 준 건 오르테가 북부 국경 지역이었다. 그곳은 산맥 아래 광활하고 아름다운 땅이었으나, 데네브라 황비의 병력이 산맥을 넘는다면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되는 곳이기도 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율리아가 모자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곤 카루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데네브라 황비가 황제에게 허락을 받아 낸다면, 정말로 전쟁이 시작될까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지.”

“황제가 허락하지 않으면요?”

“병력을 움직이진 못하겠지만 그보다 더 멋대로 굴 수 있어.”

“어떻게요?”

카루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바이칸에서 지겹도록 자신을 쫓아다니던 데네브라를 떠올렸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그 산맥 중턱에서 나와 내 부하들을 습격하려던 놈들을 기억해?”

“황비의 병력이었죠.”

“데네브라가 왜 그렇게까지 화가 났는지, 그때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냥 그 미친 여자가 드디어 자신을 포기하고 죽이기로 한 모양이라고, 카루스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바이칸을 떠나기 전에 어떤 말을 했는데, 그것 때문인 것 같더라고.”

“어떤 말이요?”

“‘다시 태어나도 황비 당신의 손을 잡는 일은 없을 것이다.’”

카루스가 날카롭게 웃었다.

데네브라는 그때 카루스를 죽이겠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손에 넣을 수 없다면 죽여서라도, 그의 죽음이라도 갖고야 말겠다고 다짐했겠지.

율리아를 만나지 못했다면 영원히 몰랐을 일이었다. 카루스는 얼마 전에야 그 사실이 떠올랐다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율리아는 데네브라를 직접 본 일이 없었다. 그녀에 대해선 잘 알지도 못했다. 전해지는 거라곤 죄다 부풀려진 소문뿐인 데다, 1년이 되기 전에 카루스의 손에 죽었으니까.

그래서 추측하고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쯤 북부는 물러났겠죠.”

“남부가 뒤에서 은밀하게 돕겠다는데, 머리가 있는 놈들이라면 장기전이 유리하다는 걸 모를 리 없겠지.”

“황제는 발이 묶일 거고요.”

“한동안은.”

“황제는 그 멀리서도 명령만으로 황비를 강제로 억류할 수 있나요? 황비는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있나요?”

카루스는 율리아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상대가 데네브라니까 속단할 수 없었다.

그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율리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물어볼게요. 카루스 님이 보기에 황비는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자기 자신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질 만큼 충동적이고 무모한 사람인가요?”

그걸 알아야 대비할 수 있다.

율리아는 데네브라가 어떤 사람인지 미리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카루스와 맥스웰이 관저로 돌아가고 밤이 되었다. 율리아는 자신의 저택에서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있었다. 부엌 쪽에서 요리사와 담소를 나누는 트루디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백작님은 안 그렇게 생기셔서는 의외로 달콤한 걸 좋아하시거든요? 주전부리는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시는 게 좋아요. 술은 잘 드시지 않지만, 음료수는 좋아하시고…….”

바닷가에 있는 저택이라 그런가, 창문을 열면 멀리서 파도치는 소리가 들렸다. 코코는 바람이 축축해서 싫다며 바닷가에 살길 거부했지만 율리아는 꽤 괜찮은 집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조용한 외곽인데도 도로가 잘 되어 있고, 왕궁과의 거리도 가까웠다.

조만간 집사도 구하고, 경비 인력도 충원할 것이다. 하기 싫어도 해야 했다. 율리아 아르테는 레위시아 왕자의 측근이자 오르테가 왕국의 고귀한 귀족이 되었으니까.

코코는 율리아에게 가문의 문양부터 정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녀가 처리하고 사용하는 모든 곳에 가문의 문양이 들어갈 거라며, 힌치 가문의 화가를 닦달해 몇 가지 표본을 만들어 가져다주기까지 했다.

“하여간 오지랖은…….”

율리아는 그중 하나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다른 건 대충 그린 티가 역력한데, 그중 하나에만 유독 정성이 들어가 있었다.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오르는, 불꽃의 날개를 펼친 새.

코코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했다. 율리아는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그 그림을 골라 제일 위에 올려놓았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조심스레 노크했다.

“백작님, 누가 찾아왔습니다.”

“이 시간에?”

“약속이 되어 있다고 하는데 전해 들은 바가 없어서요.”

아직 집사가 없어 대신 말을 전하러 온 경비병이 어떻게 하느냐며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이름은?”

“블라이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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