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데네브라는 율리아가 삶을 반복할 때마다 언제나 카루스의 손에 죽었던 여자였다. 바이칸에서 황제 다음가는 권력가라고 손꼽히고 있지만, 반미치광이나 다름없는 성정 때문에 안 좋은 소문이 많았다.
“황비의 병력이 어느 정도인데요?”
“전력을 다하면 오르테가를 싸 먹을 정도는 되지. 움직이는 방향을 조사해 보니, 전부 남하하고 있는 모양이고.”
남하. 오르테가를 향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황비의 병력에는 해군이 없다는 거였다. 산맥을 넘어오려면 시간도, 힘도, 물자도 많이 필요하니 시일이 제법 걸릴 것이다.
“이유는요?”
“예상되는 게 하도 많아서…….”
카루스가 골치 아프다는 듯 눈매를 찡그렸다.
데네브라는 그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다. 그 불같은 성미와 변덕, 자기 파괴적인 욕구는 황제마저 손을 뗄 만큼 맹목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한 가지 안심되는 점은 있지.”
“뭔데요?”
“황제가 그걸 두고 보지 않을 거라는 거야.”
카루스가 소파 팔걸이에 올려져 있는 율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황제는 통제광이야. 변수를 혐오하지.”
그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데네브라는 그가 함부로 죽일 수 없는 변수이고.”
황비의 가문은 바이칸에서도 알아주는 곳이었다. 황제는 바이칸 최고의 권력자였으나, 그렇다고 황비를 기분 내키는 대로 죽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묘하게 서로를 증오하면서 사랑하고, 적대하면서 공존해 왔다.
카루스가 율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카루스 님.”
“아르테 백작, 데네브라가 오르테가를 점령하기 위해선 어떤 명분이 필요할 것 같아?”
율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 * *
“불허한다.”
그놈의 불허. 불허! 그놈의 불허!
데네브라가 붉은 테이블보를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맹수처럼 길게 자란 손톱이 테이블을 할퀴듯 긁었다. 그곳엔 먹지도 않을 음식과 술이 가득 올려져 있었다.
툭. 데굴데굴. 술잔이 쓰러지며 독한 술이 흘러내렸다. 긴 테이블을 가로지르며 흐른 술이 기둥을 타고 빠르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황비의 곁엔 수십 명의 시녀와 시종들이 머리를 조아린 채 대기하고 있었다.
“미친 크세노, 이 빌어먹을 작자!”
데네브라의 입에서 호랑이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화를 참지 못한 그녀가 결국 테이블보를 확 잡아당기며 내팽개쳤다. 음식과 술이 우르르 쏟아져 엉망이 되었다.
“황비 전하, 부디 고정하시고…….”
“닥쳐라. 누가 감히 내 앞에서 먼저 말을 걸라 가르쳤느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데네브라의 몸에서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엉덩이를 넘어 무릎에 닿을 정도로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인위적인 흑발이라, 혈색 없이 희기만 한 그녀의 피부와 어우러지자 불길하게 아름다웠다.
데네브라는 지난겨울 블라이스에게 보냈던 심복으로부터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다.
카루스 란케아가 어떤 여자 때문에 제국을 배신하고 남부에 머무를 것이란 이야기였다.
여자. 어떤 여자. 이 반지의 주인.
데네브라의 손가락에 율리아의 반지가 있었다. 그녀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아주 사랑스러운 반지였다.
“다시 전령을 보내라. 황제 폐하를 대신해 내 직접 남부를 점령하고 올 것이라고 전해. 카루스가 황제를 배신할 거라지 않느냐! 미친 황제가 북부 따위에 신경 쓰느라 남부를 소홀히 하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하오나 전하, 이 일을 다시 거론하지 말라는 황명이…….”
“황제가 허락할 때까지 계속 보내라.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해. 나를 놓아주든지, 아니면 카루스의 시체를 내 앞에 가져다주든지.”
황제는 황비의 방종을 묵과하지 않고 분노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가 황성을 비우고 없는 틈을 타 사이 나쁜 아내가 멋대로 병력을 일으키겠다는데, 그걸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시종들은 데네브라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들은 익숙한 얼굴로 전령을 보내 황비의 말을 황제에게 전달케 했다.
“전령이 북부까지 다녀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악사들과 안마사를 불렀으니 이만 내궁으로 드시지요.”
테이블을 뒤엎으며 소리를 지르던 데네브라가 갑자기 소름 끼치게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연회를 열어라.”
“누구를 불러들이리까.”
“아무나 불러. 황성을 시끄럽게 만들어라. 조용한 건 질색이야.”
“알겠사옵니다.”
“머리카락이 검은 자들을 데려와.”
데네브라가 움직이자 수십 명의 시녀와 시종들이 물 흐르듯 그녀를 따라 걸었다. 길을 비켜서고 문을 열어 주고, 이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뒤를 따랐다.
연회는 금세 준비되었다. 데네브라는 높은 자리에 누워 네 명의 안마사에게 몸을 맡겼다. 그러곤 머리카락이 검은 남자들을 데려다 곁에 세워 놓고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뱀처럼 끈적한 그녀의 눈동자에 한 젊은 귀족 영애가 들어왔다. 나이는 대충 20대 중반, 밝은 금발에 순하고 사랑스러운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 해맑은 얼굴로 어찌나 많은 남자를 유혹하고 다니는지, 연회장 안에 그녀와 술을 나누지 않은 자가 거의 없었다.
데네브라가 손가락에 끼워 놓은 율리아의 반지를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저런 얼굴이려나, 저와 비슷한 나이이려나. 어쩌면 저보다 더 아름답고, 더 매력적인 여자일지도.
카루스는 지금까지 그 어떤 여자와도 깊은 관계를 맺은 일이 없었다. 그에게 인간이란 그저 타인일 뿐이며, 데네브라 역시 귀찮은 상대에 불과했다.
그런 남자가 운명을 걸 정도로 깊이 빠졌다는 여자.
누굴까.
“저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
데네브라가 손가락으로 여자를 가리켰다. 시녀들이 발 빠르게 움직여 여자를 그녀 앞에 데려다 놓았다.
“존귀하신 황비 전하를…….”
“이걸 껴 보아라.”
“예?”
“이 반지를 네 번째 손가락에 껴 보라고 말했느니라.”
여자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도 황비가 내민 율리아의 반지를 받아 손가락에 껴 보았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 반지는 여자의 손가락에 맞춘 듯이 잘 맞았다.
“아주 딱 맞아요, 황비 전하!”
“그렇구나.”
“예, 정말 어여쁜 반지이옵니다. 역시 전하의 물건은 제국에서 제일…….”
“오늘부터 내궁으로 들어와 시녀가 되어라.”
“예?”
여자가 놀라 되물었다. 황비가 내키는 대로 주위 사람을 죽이거나 바꾼다는 사실은 바이칸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황비의 시녀가 되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었으나,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점에서 위험한 외줄 타기를 하는 것과 같았다.
여자가 겁먹은 얼굴로 반지를 뺐다. 끼울 때는 잘만 들어가더니, 뺄 때는 잘 빠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반지를 빼낸 여자가 데네브라에게 그걸 내밀며 머리를 조아렸다.
“저, 저는 존귀하신 황비 전하를 모시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자입니다. 감히 그런 자리에 오른다는 건 상상도 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되어라.”
“예?”
“감히 그런 자리에 올라 보라고 하지 않느냐. 야망이 없는 자는 재미가 없어. 거절하면 이 자리에서 죽일 것이다.”
“하, 하겠습니다!”
“그 반지는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끼고 있어라.”
데네브라가 붉은 입술을 크게 휘어 웃었다. 새카맣게 칠한 눈매와 긴 속눈썹, 피처럼 붉은 입술이 여자를 먹잇감 보듯 훑어보았다.
데네브라가 연회에서 율리아의 대용품을 고르고 있을 때, 황제 크세노는 북부 평원에서 전면전을 앞두고 있었다.
회의실이 시끄러웠다. 각 부대의 사령관들이 모여 작전 회의를 한답시고 이득 싸움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대를 피해가 적은 곳에 배치하면서 공은 많이 차지하려는 속셈이었다.
크세노 황제는 그런 사령관들을 재미있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렇게 하나같이 똑같은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예측 가능한 자들은 편안하다. 어설프게 머리를 굴리는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상식선에서 행동하기만 한다면 건방지게 굴어도 귀엽게 봐 줄 의향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데네브라의 행동은 그를 몹시 불쾌하게 했다.
황제가 북부로 친정을 떠난 사이 멋대로 병력을 움직여 놓고, 뒤늦게 허락을 구한답시고 통보해 오다니. 데네브라의 자유분방함이야 익히 알고 있었으나 병력을 움직이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하물며 그 이유가 카루스 란케아의 변심이라니.
“멍청한 것도 늘 똑같구나.”
“폐하, 뭐라고 하셨습니까?”
“멍청해서 어여쁘다고 하였다.”
크세노는 웃고 있었다. 그는 나이에 반해 무척 젊은 외모를 하고 있었는데, 목소리만은 거칠게 가라앉아 쇠 긁는 소리를 떠올리게 했다.
“변심이라.”
그 녀석의 변심을 알아챈 게 언제였더라. 너무 오래돼서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카루스는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녀석이었을지도 모른다. 순종적인 척, 충성스러운 척했으나 그의 검은 눈은 언제나 위험한 반항심을 머금고 있었다.
그래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은 통제할 수 있다. 크세노 황제는 카루스의 남부행을 변수로 분류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작은 그의 명령이었기에, 굳이 철수하라는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데네브라가 화를 많이 내겠지?”
“황비 전하의 변덕이야 워낙 유명하지 않습니까.”
“블라이스 백작을 오르테가로 보낸 게 이유였나. 잘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빼앗았으니 화가 날 법도 하지.”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에 관해서는 추궁하지 않으실 작정입니까?”
황제를 보좌하던 귀족이 물었다. 그는 얼마 전 붉은 산의 다이아몬드가 암거래 시장을 통해 황제의 손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도대체 어찌 된 노릇인지, 정복 전쟁의 상징적 전리품이었던 보석이 황비의 손을 떠나 북부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암거래 시장에서 역대 최고가로 낙찰되며 북부 패전국 연합의 전쟁 자금으로 쓰였다.
그 사실만으로도 황제는 황비를 감옥에 가두고 추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