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2화 (200/319)

35. 다시, 다른 봄

아르테 백작이 마조람 저택에 불을 질렀다. 창고를 가득 채우던 기름을 다 쏟아부은 터라 불은 쉽게 꺼지지 않고 제법 오랫동안 건물을 불태웠다. 때마침 장대비가 쏟아지지 않았다면 불이 바람을 타고 근처 숲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국왕은 황당해했다.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율리아가 미친 게 아닌가 의심했다. 마조람 저택은 고풍스럽고 아름다웠으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건물이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그 모든 걸 쓰레기 취급하며 한 줌 재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새집을 짓긴커녕 그곳을 폐쇄하고 방치했다.

아르테 백작은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인 것 같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국왕이 준다고 했던 작위를 한 번 거절한 전력이 있는 데다, 오르테가에서 가장 큰 저택을 줬더니 냅다 불태워 버린 여자.

그녀는 요즘 왕자궁의 수석 시녀라는 직함이 무색하게 궁을 떠나 있는 시간이 많았다.

“여긴 또 왜…… 오셨어요?”

보육원 원장이 잔뜩 겁을 먹고 물었다.

율리아가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처럼 변한 것도 무서운데, 마조람 후작가에 복수하고 귀족이 된 지금은 감히 눈을 마주치기 어려웠다.

“아직도 아이들을 배에 파세요?”

“예? 아니, 아니요! 절대 안 그래요. 저기, 백작님…….”

“협박하려고 온 거 아니에요.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요.”

보육원은 율리아가 있던 때보다 사정이 많이 나아 보였다. 아이들의 숫자도 늘었고, 표정도 밝았다.

이 시간에 구걸하러 다니지 않는다는 건 먹을 게 부족하지 않다는 뜻이라, 율리아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제 아버지를 기억하세요?”

“백작님의…… 아버지요?”

원장은 하도 오래된 일이라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도 율리아가 맡겨졌을 당시의 기록은 남아 있어서, 날짜와 서명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이건 기억하세요? 제가 처형당한 해적의 주머니를 털던 시절에, 엄지손톱만 한 파란색 보석을 삼켰잖아요.”

“네, 네. 기억해요.”

“그때 그 보석을 지니고 있던 자가 누군지 아세요?”

“그건…… 그때는 처형이 하도 잦아서, 어떤 해적이었는지는 잘…….”

“날짜는요?”

“네?”

“날짜만 알면 처형 기록을 뒤져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대략적으로라도 날짜를 알고 싶어요. 저는 너무 어릴 때라 계절 정도밖에 기억이 안 나네요.”

율리아의 말에 원장이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참 망설인 뒤에야 자신 없는 말투로 대략적인 날짜를 알려 주었다.

보육원을 등지고 나온 율리아가 마차에 올랐다. 고급스러운 외양에 우아한 장식을 두른 마차였다. 마부 석엔 제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고삐를 쥐고 있었다.

“백작님, 어디로 갈까요?”

“치안대로 가죠.”

“예!”

마부가 힘차게 마차를 몰았다. 율리아를 태운 마차가 멀어지자, 보육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마차를 구경했다.

치안대에서 처형 기록까지 모두 뒤져 본 율리아는 보석의 주인이었던 자가 꽤 이름 높은 해적 선장이었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산도발을 살려 두는 건데.”

한숨이 나왔다. 상인연합을 부술 때 만났던 노예상인 산도발을 살려 두었다면 그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선장급의 해적이라면 산도발이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백작님, 이번에는 어디로 가십니까?”

마부가 다시 물었다. 경쾌하기까지 한 그의 목소리에 미소 지은 율리아가 마차 의자에 몸을 기대고 말했다.

“집으로 가요.”

“오늘은 일찍 쉬시네요!”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율리아는 마차 창문을 반쯤 열고 빠르게 지나치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봄이 한창이었다. 달콤한 바람이 불 때마다 작은 꽃잎이 여기저기 흩날렸다. 코끝이 간질간질해 자꾸만 콧잔등을 찡그리게 되었다.

조만간 뚜껑 없는 마차를 사 주겠다던 코코의 말이 떠올랐다. 코코는 사치스러운 사람이라, 어쩌면 오르테가에서 가장 비싼 마차가 배달될지도 몰랐다.

“백작님, 오셨습니까!”

집에 도착하니 경비병이 힘차게 인사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커다란 정문을 지나쳐 봄꽃 만발한 정원을 지나자, 바닷가를 향해 길게 늘어진 새하얀 건물이 나타났다.

율리아 아르테 백작의 저택이었다.

마조람 저택이 있던 땅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린 뒤, 샤트린 공주가 율리아를 찾아왔다. 공주는 율리아에게 반역자들로부터 빼앗은 영지 중 하나와 오르테가 동부 해안가에 있는 저택의 소유권을 넘겨주었다.

심지어 이 저택은 한때 왕비의 소유였던 것으로, 귀족들도 탐내는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지나치게 후한 보상이었다. 율리아는 샤트린이 왕비 때문에 자신에게 부채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택 앞에 다다르자, 맥스웰이 나타나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일찍 돌아오셨네요. 원하던 정보는 찾으셨습니까?”

“맥스웰? 여기서 뭐 해요?”

“집사 노릇이요.”

“그러니까 그걸 맥스웰이 왜…….”

율리아가 당황해서 머뭇거리자, 맥스웰이 그녀의 손을 잡아채고 마차에서 내리도록 이끌었다. 그러곤 저택 응접실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할까요?”

진짜 집사처럼 문을 열어 주는 맥스웰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중앙 홀 왼쪽의 넓은 응접실에 카루스가 있었다.

1년 동안 길어진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정리한 그는 전보다 조금 더 날카로워진 인상이었다. 남부의 햇살 때문인지 그의 피부색도 한결 짙어졌다.

“카루스 님, 백작님이 오셨습니다.”

“아, 왔어?”

카루스가 의자에서 일어나 율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맥스웰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까지 온 율리아는 이번에는 그의 손을 잡고 응접실 중앙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지금 제가 귀족이 됐다고 이러시는 거예요?”

“코델리아 시녀장이 이렇게 해야 제대로 된 예의라고 가르쳐 주던데. 오르테가는 전통을 중시하는 왕국이라면서.”

“말도 안 돼. 한 1백 년 전에나 그랬겠죠. 지금은 왕족도 이러지 않아요. 코코가 이상한 걸 가르쳐 줬네요.”

“이상한 거라면 아주 잘 배우고 있지.”

카루스가 피식 웃으며 율리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말씀하세요.”

“얼마 전, 데네브라의 병력이 움직였다는 첩보를 입수했어.”

카루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율리아는 금세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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