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 (199/319)

175화

블라이스 백작은 크리스틴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 역시 국왕의 행보가 의심스럽다면서 데네브라 황비에게 크리스틴의 신분과 상황을 설명하는 소개장을 써 주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크리스틴은 승마에 소질이 없어 다른 사람의 뒤에 짐처럼 매달려 가야만 했다.

“서두르자!”

불타는 저택을 뒤로한 채 말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크리스틴은 두 눈을 꼭 감고 머리를 숙였다. 두툼한 로브가 그녀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그들은 도시를 떠나 티타니아 산맥으로 달렸다. 이른 봄, 율리아가 카루스를 만나 그와 함께 내려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밤새도록 달리다 강가에서 쉬고, 또 한참을 달렸다.

산맥 중턱 즈음에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뺨이 찢어질 것 같은 추위 속에서 크리스틴은 몇 번이나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울지는 않았다. 울고 싶지 않았다.

‘울지 마, 비겁하게.’

지금 그녀가 하려는 건 반역보다 더 나쁜 짓이었다. 바이칸으로 달려가 오르테가가 제국을 배신하려 하니 군대를 보내 정복해야 한다고 고발하는 것.

크리스틴은 죽음을 앞두고서도 그런 유언을 남긴 어머니와 그걸 지키려고 발악하는 자신이 끔찍했다.

“눈보라가 칩니다!”

정상을 얼마 남기지 않은 갈림길이었다. 날아갈 듯 거센 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몰아쳤다. 밤사이 얼어 죽은 사람이 있어, 일행은 잠을 자거나 쉴 수조차 없었다.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아가씨, 멈추면 안 돼요.”

크리스틴은 열 걸음을 걷고 주저앉고, 또 다섯 걸음을 걷고 주저앉았다. 울기 싫어서 이를 악물고 견뎠는데, 이제는 너무 추워서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여기서 죽을 것만 같았다. 얼어 죽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절절히 실감이 났다. 장갑을 두 겹이나 꼈는데도 손가락이 곱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대로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위태롭게 깜박이던 크리스틴의 속눈썹에서 흰 얼음 가루가 떨어졌다.

“조금만 더 힘내십시오.”

바람이 불어 벼랑 아래서 눈보라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크리스틴은 생각했다. 그냥 확 죽어 버릴까. 저기로 가서 떨어져 버리면 편할 텐데.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지 않아도 될 텐데.

‘율리아.’

율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크리스틴은 율리아가 바실리와 함께 이 산맥을 넘어 도망치려다 얼어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디쯤일까. 이쯤이었을까. 아니면 더 높은 곳? 너는 도대체 어디까지 달아났다가, 어느 곳에서 복수를 결심했나.

율리아. 나는 바이칸으로 달려가서 오르테가가 제국에 반기를 들기 위해 친제국파를 척살했다고 말할 거야. 남부 역시 북부 패전국 연합처럼 제국을 배신하고 황제의 뒤통수를 칠 거라고.

그러면 분노한 황제에 의해 왕국에 학살이 일어날 것이다.

상관없었다. 복수는 율리아만의 것이 아니니까. 크리스틴은 얼어붙은 다리를 간신히 움직였다. 주저앉지 않고 일어나 걸었다.

정상이 머지않았다. 저곳만 넘으면 바이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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