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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198/319)

174화

카루스는 코코와 함께 며칠 동안 오르테가의 옛 부두를 돌아다니며 저주와 전설에 대해 아는 자를 수소문했다.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오래전 마지막 해적왕이었던 자가 저주의 주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만 남았을 뿐이었다.

지친 얼굴의 코코가 왕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을 때였다. 카루스의 부하가 달려와 율리아의 소식을 전했다.

“율리아 시녀님이 저택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그대로 방향을 돌려 마조람 저택으로 향했다. 부두를 벗어나 한참을 달리자, 멀리서도 어떤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불꽃이 춤을 추고 있었다.

시뻘건 불길이 마조람 저택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이리저리 너울거렸다. 새카만 밤을 환하게 밝히는 불빛이었다.

율리아는 그 앞에 서서 하염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셨다. 복수는 이토록 아름다웠다. 가슴 벅차고 황홀한데, 미치도록 허탈하고 후회스러웠다. 또 그만큼 화가 났다.

나는 왜 여덟 번이나 실패해서 아홉 번째를 살아야 했나. 저주받은 자신의 삶이 원망스러웠다.

우르릉. 하늘이 울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내내 묵직했던 구름이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굵은 빗줄기를 쏟아냈다. 툭툭 떨어지던 빗방울은 금세 장대비가 되고, 이내 온 세상을 빗속에 가두었다.

“율리아!”

누군가 큰 소리로 율리아를 불렀다. 그러나 건물이 불타는 소리와 빗소리가 뒤섞여 요란해진 주위 소음에, 율리아는 그걸 알아듣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지옥을 연상케 하는 불길이 저택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율리아는 불꽃을 몸에 두른 채 태어난 새처럼 보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수없이 투쟁하는 새. 너울거리는 불꽃을 따라 율리아의 그림자가 날개처럼 펼쳐졌다. 그녀의 실루엣을 따라 흐르는 빛과 그림자가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웠다.

함께 기름을 쏟아붓던 알렉사도, 그녀를 돕던 카루스의 부하들도 감히 율리아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율리아.”

카루스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를 따라 마차에서 내린 코코가 깊이 심호흡했다. 율리아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시녀들이 외출했다는 소리를 듣고 왕자궁에서 뒤늦게 달려온 레위시아도 카루스와 코코의 뒤에 멈춰 섰다.

시간이 흐를수록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거대한 저택을 무너뜨린 불꽃이 조금씩 빗물에 스러지고 있었다.

율리아의 긴 머리카락을 타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 한참 저택을 바라보던 율리아가 마침내 몸을 돌렸다.

코코와 알렉사, 카루스와 레위시아가 모두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다들 언제 왔어요?”

율리아가 물었다. 물에 젖은 얼굴은 평소처럼 맑아 보였다. 한데 그녀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독을 품은 늪처럼, 괴물을 잉태한 바다처럼 어둡던 녹색 눈동자에 붉은빛이 일렁였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물기가 눈동자에 맺혀 어지럽게 빛났다.

신이 가장 낮은 곳으로 던진 뒤에 물로 채워 바다로 만들었다던 지독한 저주. 그 저주가 저 넓은 바다를 헤매다 간신히 찾아낸 주인.

작은 몸에 갇힌 거대한 영혼이 마침내 눈을 떴다.

우르릉. 하늘이 울었다. 저택을 남김없이 태운 불이 빗속에 사그라졌다. 화재 때문에 놀라 달려왔던 인근 병사들도 모두 물러가고, 율리아는 코코의 손에 이끌려 왕자궁으로 돌아왔다.

하녀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레위시아와 코코, 알렉사와 율리아가 이 추운 겨울에 흠뻑 비를 맞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깜짝 놀랄 일인데, 그 유명한 무혈 제독 카루스 란케아가 그들과 함께 나타나 응접실에 자리를 잡았다.

우르릉. 또 한 차례 하늘이 울었다. 태풍이 온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중얼거리던 레위시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했어. 그 저택을 그대로 남겨 둘 순 없잖아. 차라리 죄다 불태우고 새로 짓는 게 낫지.”

“새로 지을 생각은 없어요.”

“뭐? 그럼 왜 달라고 한 거야?”

“다 태우고 싶어서요.”

율리아는 그곳에 새집을 지을 마음이 없었다. 마조람의 것이었던 땅에서 과거를 곱씹으며 살고 싶지 않았으니까.

“저는 여기면 충분해요.”

“내 궁을 집처럼 생각해 줘서 기쁘긴 한데……. 아르테 백작, 귀족에겐 집이 있어야지. 영지도 있어야 하고.”

“국왕 전하께 필요 없다고 이미 말씀드렸어요.”

“그건 네 생각이지. 부왕은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데, 너한테 백작이라는 작위까지 내린 마당에 집도 영지도 없는 귀족으로 남겨 두진 않을걸.”

레위시아가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그러곤 동의를 구하려는 듯, 코코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말이 맞지?”

그런데 코코의 반응이 이상했다. 레위시아에게 핀잔을 주거나 율리아를 구박해야 정상인데, 창백한 얼굴로 입을 꽉 다문 채 수건을 쥐어뜯고 있었다.

레위시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코코, 왜 그래?”

율리아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코코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뭔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카루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율리아가 코코에게 왜 그러냐고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네 지난 삶의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건 내 알 바 아니야.”

코코가 갑작스레 참았던 말을 쏟아냈다.

“모른 척할까 생각해 봤어. 아무래도 넌 그걸 원하는 것 같았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네가 여덟 번의 죽음을 반복하고 아홉 번째를 살고 있다는 걸…… 외면하고 살아야 하나.”

코코는 미친 듯이 고민했다. 율리아를 위해서는 율리아가 원하는 대로 해 줘야 하는 게 아닐까,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정답이 아닐 것 같았다.

“이제 알겠어. 네 지난 삶의 내가 시킨 거야. 그렇지? 이번에는 왕궁으로 들어가서 시녀가 되라고, 날 이용해 레위시아 전하의 손을 잡으라고. 왕족의 손을 빌려 마조람을 치라고.”

율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레위시아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알렉사는 코코와 율리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말해 봐. 알렉사는 몇 번째였어?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알렉사가 네 생명의 은인이라고 했으니까, 혹시…… 너 때문에 죽기라도 했어?”

“코코.”

“레위시아 전하는 항상 죽었어? 누가 죽였어? 어떻게 죽었어?”

율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코코의 목소리는 아주 작아서 요란하게 쏟아지는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가까이에 서 있는 레위시아와 알렉사의 귀에는 무사히 닿았다.

“율리아.”

코코가 울먹이며 물었다.

“내가 널 잊어버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

코코의 붉은 눈에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율리아는 멍하니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떤 말로 변명하며 넘겨야 하나 고민하던 게 무색할 만큼 머릿속이 새하얬다.

코코가 쥐어짜듯 다시 물었다.

“네 지난 삶의 나를 기억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해?”

“못해요.”

“율리아!”

“못해요. 불가능해요.”

율리아가 간신히 대답하고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냐고, 왜 말 안 했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입을 열면 해선 안 되는 말이 나올 것 같아서 자꾸만 숨을 참게 되었다.

괜찮다고 말해도, 그렇지 않다고 말해도 모두에게 상처였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레위시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리야. 아홉 번이라니……? 코코, 이상한 꿈이라도 꿨어? 율리아는 왜 또 그걸 맞장구쳐 주고 있어.”

반면 알렉사는 이제야 이해했다는 얼굴이었다.

“어쩐지…….”

간신히 진정한 코코가 수건을 꽉 쥔 채 말했다.

“율리아는 죽음을 반복하는 저주에 걸렸어요. 해적들까지 들쑤셔 가며 저주의 기원에 대해 알아내긴 했는데 그걸 없애는 방법은 찾지 못했어요. 저는 이제부터 제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서 그걸 찾을 거예요.”

카루스가 코코의 말을 거들었다.

“마찬가지다. 남부의 해적을 모조리 소탕하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단서를 찾을 거야.”

너를 위해서는 뭐든지 해. 그들이 말했다.

* * *

마조람 저택이 한창 불타고 있을 때였다. 사라진 줄 알았던 크리스틴이 멀리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유골함을 쥔 크리스틴의 손가락이 사정없이 떨렸다. 집이 무너지고 있었다. 시뻘건 불길이 혀를 날름거리며 한때 그녀의 전부였던 곳을, 그곳에 쌓인 추억을 전부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율리아…….”

누구의 짓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귀족이 된 율리아가 국왕에게 마조람 저택을 요구했다는 건 이미 들어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어머니의 유골만은 저곳에 묻고 싶었는데.

“아가씨, 빨리 떠나셔야 합니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조금만…… 조금만요.”

“후작 부인의 유언을 기억하십시오.”

크리스틴의 곁을 지키는 건 후작 부인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조람의 가신이며, 친척이기도 했다.

후작 부인이 죽고 후작의 사형이 확실시된 지금, 그들에겐 완전히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다.

“블라이스 백작의 소개장은요?”

“여기 있습니다.”

한 남자가 크리스틴에게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편지를 내밀었다.

“그가 뭐라고 하던가요?”

“데네브라 황비를 찾아가 자신의 이름을 대고 이 편지를 전하면 될 거라고 했습니다. 오르테가에서 반역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런 건 그가 알 바 아니지만, 친제국파를 이런 식으로 몰아내려는 국왕의 저의가 의심스럽다고.”

크리스틴은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블라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후작 부인의 유언이었다. 후작 부인은 자신이 죽게 될 거란 확신이 들자마자 수족을 통해 은밀히 바이칸 제국에 도움을 청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크리스틴의 입에서 메마른 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그렇게 하자고 했을 때는 듣지 않으시더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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