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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화 (197/319)

173화

왕비가 마조람 후작 부인을 살해했다. 죄인에게 교수형이 예고돼 있었다고 해도 이는 큰 사건이었다. 왕비는 별궁에 유폐되었고, 후작 부인의 시신은 급하게 불태워졌다.

마조람 후작과 그와 운명을 함께하는 귀족들은 후작 부인이 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이런 식으로 살해할 수는 없는 거라며 왕가를 비난했다. 하물며 후작 부인은 제대로 된 재판조차 받지 못한 상태였다.

국왕은 왕비를 유폐시켜 이 일을 무마하려 했으나, 샤트린 공주가 그를 찾아가 설득했다.

“반역은 성공하지 못했고, 저 역시 아무 이상 없이 잘 살아 있잖아요. 아버지, 후작 부인을 그렇게 죽여 놓고 모른 척하면 결국엔 모두가 왕가를 불신하게 될 거예요.”

“그럼 도대체 어쩌라는 것이냐! 반역자를 풀어 주기라도 할까?”

“크리스틴 마조람을 풀어 주세요.”

“뭐?”

“작위와 신분, 재산을 몰수한 채 풀어 주세요. 후작 부인과 딸의 목숨을 맞바꾸어 준다면서요. 아버지는 너그러운 군주가 될 거고, 저들은 감히 이 일을 물고 늘어지지 못할 거예요.”

크리스틴은 이미 모두의 기억에서 잊힌 지 오래였다. 살려 준다 해도 더는 왕가에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또 하나, 샤트린이 다급한 얼굴로 왕에게 말했다.

“크리스틴을 살려 주고 율리아 아르테에게 공신 귀족의 작위를 주세요. 백작 정도는 되어야 좋아요.”

“뭐, 백작? 제정신이냐?”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준다는 약속도 하세요. 아버지, 고작 시녀 하나예요. 이번 일로 왕가는 수십 명의 귀족에게서 작위와 영지, 재산을 빼앗을 수 있을 거예요. 그중 일부만으로도 그 대단한 아이를 왕가에 충성케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남는 장사라고, 샤트린은 온갖 이유를 들어 국왕을 설득했다. 레위시아가 아끼는 시녀이니, 그 정도 신분까진 올려 줘도 괜찮다고 말했다.

“레위시아의 측근이 아니냐. 백작은 높은 자리야. 녀석이 권력을 키워 네 자리를 위협해도 괜찮다는 게냐?”

“지금은 오르테가를 위한 결정이 우선이에요.”

국왕은 여태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샤트린의 손을 잡았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딸 하나는 정말 잘 키웠다면서, 그녀를 후계자로 정하길 잘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샤트린은 웃을 수 없었다.

왕이 하는 말에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충격과 슬픔으로 얼룩져 있었다.

왕비의 불륜과 4왕자의 출생, 그리고 왕비가 비밀을 지키려 후작 부인을 죽였다는 사실까지. 샤트린은 그 모든 걸 알아 버리고 말았다.

“아르테 백작이라…….”

왕이 중얼거렸다.

샤트린은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일을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보좌관을 왕의 침실까지 불러들인 그녀는 율리아에게 백작 작위를 수여하는 문서를 당장 작성하라고 명령했다.

율리아는 왕비의 비밀을 알고 있고, 그걸 여태 지키고 있다. 어쩌면 레위시아와 코코, 알렉사까지 모두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왕비는 율리아를 배신하려 했다. 후작 부인을 이용해 죽이려고 했다.

왕비가 후작 부인을 그런 식으로 죽인 데에는 율리아가 그 사실을 알고 자신에게 보복하진 않을까 두려워했던 마음도 어느 정도 작용했으리라.

샤트린은 율리아에게 왕가에서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지독한 아이가 작위와 재화에 마음을 움직여 줄 것 같진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 *

공신 귀족이라는 건 일반적인 세습 귀족과는 다른 특별함이 있었다. 왕가, 혹은 왕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자에게만 주어지는 귀한 명예였기 때문이다.

국왕은 후계자인 샤트린 공주를 통해 왕자궁의 수석 시녀인 율리아 아르테에게 백작 작위를 내렸다. 그러곤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약속하기까지 했다.

율리아는 마조람 저택을 원했다.

이 또한 엄청난 화제였다. 복수에 성공한 평민 시녀의 이야기가 오르테가를 뜨겁게 달구었다.

같은 날 크리스틴 마조람이 석방되었다.

가문과 집, 신분까지 모두 빼앗긴 크리스틴은 후작 부인의 유골함을 품에 안은 채 빈털터리가 되어 감옥을 나섰고, 이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마조람 후작과 그의 파벌 귀족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재판이 여전히 진행 중이었기에, 율리아의 작위 수여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율리아 아르테는 들어라. 그대를 오르테가의 고귀한 명예, 아르테 백작으로 임명한다. 이는 그대의 핏줄을 통해 이어지는 작위이며, 함부로 빼앗을 수 없는 권리이다.”

대신 국왕은 열흘 안에 오르테가 전역에 율리아 아르테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른한 오후였다. 날씨가 그리 춥지는 않은데, 바람이 축축하고 구름이 낮았다. 물기 어린 바람에 우울해하던 하녀들이 부지런히 장작을 들고 날랐다.

재판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레위시아를 대신해, 율리아가 왕자궁의 대소사를 처리했다. 확장 공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알렉사가 다가와 율리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코코는 어디에 가고 율리아가 이걸 다 처리하고 있습니까?”

“아침 일찍 나갔다고 들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요즘 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 걸까요.”

“중요한 일이겠죠.”

율리아가 웃으며 서류를 내밀었다. 왕자궁의 경비 인력과 연무장, 숙소 관리 보고서였다.

알렉사가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서류를 읽어 보더니 이런 건 체질이 아니라며 끙끙 앓았다.

“왕실 기사단장님도 저한테 그러셨습니다. 기사단장이 되려면 칼보다 행정을 더 잘해야 하는데, 너는 틀렸다고.”

“그럼 잘하는 사람이 하면 되죠.”

율리아가 알렉사에게서 다시 서류를 빼앗아 책상 한쪽에 올려놓았다. 이런 건 코코가 제일 잘한다면서, 돌아오면 순식간에 처리해 줄 거라고 말했다.

“율리아, 왕께서 마조람 저택과 그 부지의 소유권을 넘겨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언제 출발할 생각입니까?”

알렉사는 그걸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묻지 않았다. 언제 갈 거냐고만 물었다.

“글쎄요.”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팔면 떼 부자가 될 것이고, 수리해서 쓴다면 오르테가에서 가장 큰 저택을 가진 귀족이 될 것이다.

율리아가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러곤 노을도 없이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알렉사.”

“예.”

“불은 밤에 제일 예쁘겠죠.”

알렉사가 눈짓으로 벽난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겨울밤이 최곱니다.”

장작들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트루디가 부지런히 채워 놓은 장작이 따스한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율리아가 알렉사에게 물었다.

“같이 갈래요?”

마조람 저택은 카루스와 그의 부하들에 의해 반파된 상태였다. 카루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부하들이 일부 남아 저택을 감시하고 있었다.

안에서 발견된 증거는 레위시아에 의해 모두 왕궁으로 옮겨졌다. 증거가 명백하니 마조람 후작은 조만간 사형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율리아는 네 필의 말이 이끄는 왕궁 마차를 타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기분은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밤이라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캄캄한 시야에 몇 개의 불빛이 보였다. 한 손에 횃불을 든 카루스의 부하들이 마차를 향해 다가왔다.

“누구십니까?”

“율리아 아르테입니다.”

기사들이 반가워하는 얼굴로 문을 열어 주었다. 율리아는 알렉사와 함께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워서 거대한 저택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전에는 밤이 새도록 환하게 불을 밝혀 놓아 불야성을 이루었는데, 지금은 최소한의 불빛만 남긴 채 모두 꺼져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밝은 낮에 올 걸 그랬나.

율리아가 걸음을 옮기자 알렉사가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비단처럼 부드럽던 잔디가 처참하게 짓이겨져 울퉁불퉁했다. 깨지지 않은 창문보다 깨진 창문이 더 많았다. 고용인조차 모두 사라져, 건물 안에 온기가 느껴지는 곳이 없었다.

율리아는 알렉사와 함께 마조람 저택을 한 바퀴 돌아본 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기름은 저택 뒤편 창고에 따로 보관되어 있었다. 율리아는 그곳까지 걸어가 직접 문을 열었다. 수십 개의 기름통이 보였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한마디 말도 없이 창고 안으로 들어가 기름통을 끌고 나온 율리아가 그걸 저택 한쪽에 쓰러뜨려 부었다.

그러곤 다시 안으로 들어가 또 하나의 기름통을 끌고 나왔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몰랐다. 그녀는 씩씩하게 기름통을 끌고 나와선 거대한 저택 여기저기에 뿌리기 시작했다.

한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율리아를 지켜보던 알렉사가 말없이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러곤 한 손에 하나씩, 두 개의 기름통을 끌고 나왔다.

“이것 좀 옮겨 주십시오!”

카루스의 부하들까지 동원되었다. 그들은 율리아가 하는 짓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제 이 저택과 땅은 모두 율리아의 것이라는 알렉사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기름통을 옮겨 주었다.

마조람 후작이 매일 드나들던 현관, 왕궁보다 더 많은 장미를 피워 냈던 정원, 바실리가 자랑하던 예술품 보관실, 크리스틴의 서재, 후작 부인의 응접실.

율리아는 그 모든 곳에 기름을 쏟아부었다.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젖은 공기가 내려앉더니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에 걸쳐 기름을 뿌린 율리아가 정원 앞에 서서 저택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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