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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화 (196/319)

172화

34. 아르테 백작

후작 부인의 사형일이 먼저 정해졌다.

국왕의 노림수였다. 반역에 연루된 자를 모두 한꺼번에 처형하면 그만큼 반작용이 크니, 하나씩 차례대로 끄집어내 시간을 끄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래도 후작 부인을 첫 번째로 택한 건 조금 의외였다. 율리아는 이 일에 누군가의 입김이 들어간 건 아닐지 조심스레 추측해 보았다.

누굴까. 샤트린 공주일까, 아니면 왕비일까.

율리아는 벽난로 앞에서 불꽃을 응시하고 있었다. 방을 청소하던 트루디가 그녀를 힐긋거렸다.

“시녀님.”

“응?”

“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자꾸 물어봐서 귀찮아 죽겠어요. 자꾸 시녀님이 이제 진짜 귀족이 되는 거냐고, 준남작이 아니라 자작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자작이라.

율리아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세습 가능한 자작. 아마 그 정도가 한계일 것이다. 왕은 그보다 높은 작위를 주고 싶어 하겠지만, 귀족들의 반대가 심해 어쩔 수 없으리라.

“영지는…….”

트루디가 궁금해 미치겠다는 얼굴로 율리아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공신 귀족이 되면 국왕으로부터 영지도 하사받게 될 것이다. 트루디는 어제 밤새도록 율리아가 거대한 저택에서 집사와 하인들을 거느리고 사는 꿈을 꿨다며, 이왕이면 엄청 크고 좋은 영지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떠들었다.

율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트루디, 영지 같은 건 필요 없어.”

“네? 왜요. 귀족들은 영지에서 걷은 세금으로 사치하며 사는 거 아니에요? 시녀님이 귀족이 되면, 당연히 영지가 있어야…….”

“내가 원하는 건 마조람 저택이야.”

히익. 트루디가 헛숨을 들이켰다.

마조람 후작의 집은 오르테가에서 가장 크고 넓은 저택이었다.

왕궁이 국왕 한 사람만을 위한 집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마조람 후작을 오르테가에서 가장 큰 집에 사는 귀족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바닷가를 바라보며 완만하게 솟은 언덕과 사방으로 펼쳐진 숲은 그들이 그동안 얼마나 선택받은 삶을 살아왔는지를 보여 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율리아는 그 집을 원한다고 말했다.

“불에 태워서 흔적도 남지 않게 하려면, 내 소유여야 하잖아.”

그녀는 누누이 말해 왔다. 마조람이 숨 쉬는 땅에선 아무것도 자라지 않게 하겠다고.

마조람의 성을 가진 자가 단 한 사람도 남지 않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라고. 마조람이 이루고자 했던 모든 꿈을 빼앗아 시궁창에 던져 버릴 거라고.

그러니까 그곳에 풀 한 포기 남겨 두지 않을 것이다.

* * *

왕가의 원로들이 기거하는 궁에 서너 명의 왕궁 의사들이 나타났다. 왕비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빨리 와 달라는 왕비궁 시녀장의 전갈 때문이었다.

그들은 왕비의 병이 다시 깊어진 줄만 알고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달려왔다. 미친 사람처럼 난동을 부리며 자해하던 왕비가 떠올라, 효과 빠른 진정제까지 철저하게 준비했다.

그런데 왕비는 멀쩡해 보였다. 적어도 그들의 눈에는 그랬다.

“전하, 어디가 편찮으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한 의사가 대표로 나서서 말을 걸었다. 왕비는 침대에 누운 채 멀거니 그를 응시했다.

왕비가 아프다던 시녀장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난동을 부리거나 괴성을 지르지는 않았으나, 왕비의 얼굴엔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눈 밑이 퀭하다 못해 검었다. 얼마나 물어뜯었는지 입술에 멀쩡한 부분이 없었다.

“요즘 잠을 못 주무신다고 들었습니다. 저희가 효과 좋은 수면제를 가져왔으니…….”

“독인가?”

“예?”

“독이구나. 그렇지? 후작 부인이 시켰어? 그이가 감옥에 갇혀 있다고 그리 주저앉을 사람은 아니니까. 그렇지? 말해 다오. 그건 무슨 독이냐? 고통 없이 단번에 죽을 수 있는 거야?”

“저, 전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바른대로 말하지 못해? 내가 아직은 이 나라의 왕비니라! 후작 부인이 아니라, 내가 왕비라고!”

“전하!”

“날 죽이러 왔어? 네놈들이 정녕 나를 해치려고……!”

왕비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의사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늘어진 몸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 있었는지, 철썩 소리와 함께 의사의 얼굴이 돌아갔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왕비는 후작 부인에게 매수당한 의사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시녀들이 달려와 매달려도 소용없었다.

의사들이 모두 쫓겨난 뒤에도 왕비의 헛소리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식사를 준비해도, 물을 가져와도 독이 들었다며 소리를 질렀다. 창가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만 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암살자가 온다고 벌벌 떨었다.

“후작 부인이 다 말할 거야. 그이가 절대 그렇게 죽을 리 없어. 내 아가, 내 아이…… 왕자는 이제 어떡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율리아 아르테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후작 부인에게 율리아를 죽여 달라고 부탁했으나, 들려온 소식은 마조람의 몰락이었다.

후작 부인이 언제 자신의 비밀을 발설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왕비가 조금씩 미쳐 가고 있을 때, 하필이면 율리아 아르테가 곧 국왕으로부터 공신 귀족의 작위를 받게 될 거란 소식까지 들렸다.

“후작 부인이 그 시녀한테 다 말했으면 어떡하지? 내가…… 내가 저를 배신하고 죽이려 했다는 걸 알면, 그럼 그 시녀도 나를 죽이려고…… 내 아이가 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떠들고 다닐 텐데.”

시녀 율리아의 얼굴에 그동안 왕비가 은밀히 죽여 없앴던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직접 손을 쓴 건 후작 부인이었으나, 불안해서 살 수가 없으니 그들을 죽여 달라고 애원한 건 언제나 왕비였다.

“이게 다…… 후작 부인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그날 후작 부인의 처형 일이 정해졌다. 이틀 뒤 정오, 왕궁 감옥에서 국왕과 원로,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할 거란 내용이었다.

“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난 그냥…… 그 여자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왕비가 되라고 해서 그렇게 했고, 꼭두각시처럼 살았어. 날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해서 불행하게…… 불쌍하게…….”

왕비는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렸다. 후작 부인의 얼굴을 한 유령이 나타나 그녀의 목을 조르고, 율리아가 나타나 그 모습을 비웃는 꿈이었다.

‘그러게 내가 시키는 대로 하셨어야죠. 왕비, 당신은 내가 만든 왕족이에요. 내가 왕비로 만들었어! 바로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던 멍청한 당신을, 왕비가 되어 살게 해 줬다고! 그러니까 내 말을 들었어야지. 내 명령에 따랐어야지. 나한테 충성했어야지!’

‘왕비 전하,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아들을 잃어 미친 왕비가 되라고. 그러면 사람들은 당신을 손가락질하겠지만, 적어도 비밀을 간직한 채 살 수는 있었을 거예요.’

가엾은 왕자, 내 아이.

‘왕비, 이 세상에 완벽한 세상에 비밀은 없어요.’

‘왕비 전하, 저를 수석 시녀로 임명해 주세요.’

율리아 아르테를 죽여 달라고 했을 때는 비밀을 아는 자를 하나라도 없애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는 후작 부인이 이기리라고 생각해서 그랬다.

그러나 이번 싸움의 승자는 율리아 아르테였다. 패배한 후작 부인은 감옥 안에서 사형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왕비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나라도 죽여 입을 막아야 한다면, 이제는 후작 부인을 선택해야 하지 않나. 그 여자는 지금 벼랑 끝에 몰려 있으니까 악에 받쳐 아무 말이나 지껄여 댈 것이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친 왕비가 소리 없이 침실을 빠져나갔다. 긴 소매에 가려진 손에 짧은 칼이 들려 있었다. 빵을 자르는 칼이었다.

후작 부인이 갇혀 있는 곳엔 경비가 삼엄했다. 하지만 그들은 왕비가 유령처럼 걸어와 후작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하자, 머리를 조아리며 길을 열었다.

왕비와 후작 부인이 아주 오랜 세월 우정을 나눠 온 사이라는 걸 모르는 자는 왕궁 안에 없었다. 그들은 왕비가 후작 부인의 처형 일이 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 인사를 하러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감옥 문이 열렸다.

후작 부인은 딱딱한 침대 위에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감옥 안은 바깥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만큼 추웠다. 두툼한 이불로 몸을 감싸곤 있었으나, 그녀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다.

왕비가 후작 부인을 향해 걸어갔다. 긴 가운이 바닥에 끌리며 부드러운 천이 거친 나무를 스치는 소리가 났다. 감옥 밖에서 병사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달빛보다 더 창백한 후작 부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왕비가 속삭였다.

“왜 날 왕비로 만들었어?”

왜 나였어. 나보다 괜찮은 여자도 많았을 텐데. 왜 날 선택했어.

후작 부인이 눈을 떴다. 볼 때마다 소름 끼치던 눈빛이 왕비를 꿰뚫었다. 후작 부인은 꼭 잠들지 않았던 사람처럼 명확한 말투로 왕비의 물음에 답했다.

“제일 멍청하고 욕심이 많았으니까.”

어지러웠다. 몸은 차가운데 머리가 뜨겁고 숨이 가빴다. 왕비는 후작 부인이 정말로 자신의 물음에 답한 건지, 아니면 자신이 선 채로 꿈을 꾸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긴 소매 속에 감춰져 있던 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작 부인이 족쇄에 구속당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그 작은 칼로도 쉬이 처리할 수 있었다.

“왕비…… 당신이?”

칼을 본 후작 부인이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한 번도 자신의 손을 직접 더럽혀 본 일 없는 왕비를 업신여기는 웃음이었다.

누가 더 엉망이랄 것도 없이 무너진 두 여인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보니 참 많이 닮은 얼굴이었다. 내려앉은 눈꺼풀에 겹겹이 모인 탐욕과 오만, 고집스러운 입술에 덕지덕지 묻은 아집.

왕비는 후작 부인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직접 죽여 본 적은 없지만 그게 자신을 닮은 얼굴이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4왕자가 국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건 나 말고도…….”

후작 부인은 하던 말을 마칠 수 없었다.

기이한 소리와 함께 숨이 펄떡거렸다. 경악한 그녀의 눈동자에 왕비의 얼굴이 비쳤다.

칼이 툭 떨어졌다. 왕비의 가운이 붉게 물들었다. 후작 부인이 족쇄에 묶인 손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상처를 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신음도 되지 못한 짧은소리가 새어 나왔다. 딱딱한 나무 침대가 요란하게 들썩거렸다.

왕비는 멍하니 선 채 후작 부인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이 자리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지금 무슨…….”

샤트린이었다.

샤트린이 감옥 입구에 서 있었다. 언제 들어온 건지, 문을 가리고 선 채였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후작 부인과 왕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왕비가 소매 속에 두 손을 감추었다. 그러곤 샤트린에게 물었다.

“들었어?”

“어머니.”

“들었냐고! 들었냐고 묻잖아!”

비명 같은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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