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어? 힌치 백작 따님 아닌가? 여긴 웬일이야? 입니까?”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아니, 뭐…… 시녀장 됐다고 백작이 자랑을 얼마나 해 대는지.”
“무시해요.”
코코가 의자를 하나 끌어다 앉았다. 그러곤 노인들이 건네는 술잔을 받아들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이내 얼굴을 확 찡그리고 말했다.
“이게 뭐야. 늙을수록 좋은 술 마셔야 한다는 말, 아빠한테 못 들었어요?”
“우리는 가난하거든!”
“그럼 제가 사야죠!”
난 시녀장이니까. 코코가 깔깔 웃으며 손짓하자, 집사가 다가와 지갑을 열었다. 곧이어 술집에서 제일 비싼 술통이 열렸다.
“역시 코델리아 힌치!”
“힌치! 힌치!”
노인들이 걸쭉하게 웃으며 술잔을 돌렸다. 그들이 맛 좋은 술을 한 잔씩 마시기를 기다리던 코코가 술통 뚜껑을 인질 삼아 손에 들고 말했다.
“내가 집사한테 재밌는 얘기를 하나 들었는데요.”
“어?”
“어르신들, 저주받은 돌에 대해 안다면서.”
“저주받은 돌?”
취한 노인들이 푸르르 입을 풀었다. 그러곤 코코에게 술잔을 내밀며 물었다.
“그게 뭐더라?”
“해적들이 말하는 그 저주받은 돌이요. 주인을 찾아 바다를 떠돌아다닌다면서.”
“아아, 그거!”
술잔이 가득 채워졌다. 기분 좋게 그걸 마신 노인들이 옛날이야기 들려주는 할아버지처럼 푸근하게 웃으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이야기는 해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야 해적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이야기를 믿으며 간직해 온 자들은 해적이었다.
그래서 늙은 어부나 선장들은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아무에게나 하지 않았다. 그들이 오래전부터 해적들과 거래하며 가까이 지냈다는 걸 알려서 좋을 게 없으니까.
물론 그 대상이 힌치 백작의 딸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오래된 뱃사람 중에는 힌치 백작에게 은혜를 입지 않은 자가 없다는 말이 있을 만큼, 코코는 대단한 상인의 딸이었다.
“미신인지 아닌지는 몰라. 확인할 길이 없으니. 해적 놈들은 희한하게 미신이니 전설이니 하는 것들을 너무 많이 믿거든.”
“겁쟁이 새끼들. 죄를 많이 지어서 그래.”
“뭐라더라. 내가 들은 건 그런 거였어. 죽음을 반복하게 된다던가.”
대구를 잡아 온 어부가 술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는 깊은 주름만큼 바다에서 많은 일을 겪은 자였다.
“마지막 해적왕도 비슷한 유언을 했다고 들었지. 바다에서 건진 보석은 절대 탐내지 말라고 했대. 끔찍한 저주에 걸리게 된다나.”
진지한 얼굴로 노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코코가 다시 물었다.
“죽음을 반복한다는 건 무슨 얘기예요?”
“우리야 모르지. 그냥 놈들이 하도 벌벌 떨면서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면서 들어 주는 거야. 너도 들어 봤지? 해적들은 괜찮은 진주를 발견해도 절대 자기가 갖지 않고 재빨리 팔아 버린다는 이야기.”
“알죠.”
“저주받을까 봐 그러는 거야.”
선장들이 흐흐 웃었다. 하여간 해적이란 놈들은 겁이 많다면서.
하지만 코코는 웃을 수 없었다. 죽음을 반복한다는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려 머릿속을 뱅글뱅글 돌았다.
“만약에 그 저주에 걸리면 어떻게 되는데요?”
“뭐? 그런 건 왜 궁금해하는 거야? 미신 수집이라도 하게?”
“써먹을 데가 있어서 그래요.”
“한 쌍이라고 했어.”
“뭐가요?”
“무조건 한 쌍이라고.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라고.”
“둘이라고?”
“하나의 저주가 시작되면 다른 하나가 마땅한 적수를 고른다.”
코코가 채워 준 술잔을 단번에 비운 어부가 손가락 두 개를 쫙 펴 가위 모양을 만들었다. 그러곤 바다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전설에 대해 아느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어릴 때 들었어요. 만나선 안 되는 두 사람이 만나서 신이 갈라놓았다던 이야기. 남자는 제 손목을 자르려 했는데 여자가 손을 놓아 버렸고, 그래서 영원히 서로를 잊어버린 채…….”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 해적들은 조금 다르게 알고 있어.”
“어떻게요?”
“하나였던 저주가 둘로 갈라진 이야기라고.”
심지어 사랑에 빠진 연인이 아니라 원수처럼 서로를 증오했다고. 그래서 잔뜩 화가 난 신이 둘에게 저주를 걸었고, 영원히 만나지 못하도록 하나는 제일 낮은 곳에 던져 물로 채우고, 하나는 제일 높은 곳에 던져서 산으로 만들었다고.
“그게 뭐야.”
코코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자 늙은 어부가 짓궂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뭐긴 뭐야. 좋을 대로 믿으면 되는 이야기라는 거지. 인간이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하면 아름다운 첫 번째 이야기를 믿으면 되는 거고, 인간은 서로를 미워하며 싸우기 위해 태어난 끔찍한 존재라고 생각하면…… 해적들의 것을 믿으면 돼.”
너는 어느 쪽이냐고, 노인들이 물었다.
그들에게 술집에서 가장 값비싼 술을 통째로 대접한 코코가 그 외에도 떠오르는 게 있거나 또 다른 정보를 아는 사람을 찾게 되거든 꼭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노인들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술잔을 나누었다.
술집 밖으로 나온 코코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저주는 한 쌍,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아가씨, 그걸 믿어요?”
집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집사가 아는 코코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라서 미신이나 전설 따위는 잘 믿지 않는 편이었다. 어쩌다 유령 이야기라도 나오면 힌치 백작은 무서워서 흠칫거리는데, 코코는 코웃음을 치면서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큰소리쳤다.
코코가 집사에게 말했다.
“나도 믿고 싶지 않아.”
“그런데요?”
“어떤 계집애가 자꾸 신경 쓰이게 하니까.”
거기까지 말한 코코가 더는 말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불안했다. 무표정했던 코코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저주에 걸린 자는 죽음을 반복한다.
율리아를 생각하자 참을 수 없이 심장이 덜그럭거렸다. 카루스가 했던 말까지 떠올라 괴로웠다. 율리아는 끔찍한 저주에 걸렸고, 그 저주의 대가로 미래의 일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
‘만약 율리아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떻게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취향을 알았을까. 어떻게 알렉사를 구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평민 고아가 마조람 후작가를 상대로 고작 1년 만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죽음을 반복했다면.’
울컥 토기가 치솟았다. 코코가 걸음을 멈추고 손바닥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집사가 걱정스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친 생각이야.’
미친 생각이라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자꾸만 율리아의 말과 행동이 떠올라 추측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귀가 맞아. 전부 맞아.’
어떻게 하지. 대놓고 물어볼까. 물어보면 그 계집애가 과연 순순히 대답하긴 할까. 아마 또 그 뻔뻔한 낯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양 변명이나 지어내겠지.
그때였다. 코코의 곁을 지키며 부두를 돌아보던 집사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와 술집 앞을 가리켰다.
“아가씨, 수상한 사내들이 술집 앞에 있어요.”
“누구?”
“어디서 본 얼굴인데.”
코코가 토기를 가라앉히고 술집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얼굴을 천천히 일그러뜨렸다.
“카루스 란케아의 부하.”
그녀는 바바슬로프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코코가 움직였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오래된 부두를 울렸다. 화려한 드레스 차림에 강렬한 빨강 머리. 코코는 두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그들 앞에 섰다.
“기사님.”
바바슬로프가 코코를 알아보고 우물거렸다.
“어? 어…… 그.”
“여긴 무슨 일인지.”
코코는 두 사람이 술집으로 들어가려 했다는 걸 눈치챘다. 차림새도 평소완 전혀 달랐다. 그들은 오래된 부두에 득실거리는 술꾼들의 행색을 감쪽같이 흉내 내고 있었다. 그동안 바바슬로프와 몇 번 마주치지 않았다면 기억력 좋은 코코도 그를 못 알아봤을 것 같았다.
“그냥…… 비밀 임무 중입니다.”
“그렇구나. 뭘까. 그 비밀 임무라는 거.”
“비밀입니다.”
“내가 맞혀 볼까요? 그쪽 사령관이 조사해오라고 했겠죠? 저주받은 돌이나, 해적왕의 전설이나…… 뭐 그런 거?”
코코의 목소리가 낮았다.
화들짝 놀란 바바슬로프가 옆에 있던 덩치 큰 기사를 바라보았다. 기사가 코코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구나. 그쪽 사령관도 나랑 똑같은 걸 찾고 있었구나. 저 술집 안에 있는 할아버지들한테 물어보려고 온 거면, 늦었어요. 내가 이미 다 들었거든.”
기사가 물었다.
“뭔가 알아냈습니까?”
“그건 그쪽 사령관한테 말해야 할 것 같네요.”
잠시 후 바바슬로프와 함께 나타난 코코가 카루스를 보자마자 물었다.
“몇 번째죠?”
“뭐?”
그녀는 다짜고짜 카루스가 있는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손잡이를 잠그기까지 했다. 그러곤 카루스에게 다가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몇 번째냐고 물었어요.”
“지금 무슨 말을…….”
“우리 율리아, 몇 번이나 죽었냐고.”
목소리에 이어 입술까지 떨렸다. 설마 했던 것들이 입 밖으로 꺼내 놓으니 너무 절절하게 이해가 되어서 괴로웠다.
코코가 다 알아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루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홉 번째다.”
“아홉…… 번?”
“그래.”
“왜……. 누가……? 도대체…… 어떻게?”
카루스도 이번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율리아가 그동안 왜, 누구에게, 어떻게 죽었는지 일일이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율리아의 고통에 압도당한 코코가 울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