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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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람 후작과 운명을 함께하는 귀족들이 몸져누운 국왕을 찾아가 엎드렸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후작은 반역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외쳤다. 후작과 후작 부인이 왕가의 후손을 데려가 감춘 건 그 두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덧붙이기도 했다.
“1왕자 전하의 죽음을 기억하시잖습니까! 그 여자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빠졌는지도 모른 채 제멋대로 행동하던 사람입니다. 전하, 후작 부인은 왕가의 후손을 지킨 것입니다!”
“반역이라니요. 마조람은 전하의 충신이며, 벗이었습니다! 오직 전하와 왕국을 위해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도를 넘어 목소리를 높이자, 이번에는 힌치 백작과 반제국파 귀족들이 나타나 읍소했다.
“오르테가 국법에 반역자를 살려 두는 왕은 없었습니다. 마조람 후작의 역심이 만천하에 드러난 바, 그와 뜻을 함께한 자들까지 모두 처벌해야 합니다!”
오르테가는 왕정 국가였다. 아무리 왕권이 약해도 반역자를 살려 둘 수는 없었다.
조사가 진행될수록 마조람 후작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얼마나 많은 비자금을 빼돌렸는지가 명백하게 드러났다.
왕가의 후손을 낳은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틈만 나면 아기와 함께 국왕과 원로들을 찾아가 애처롭게 울었다.
자신을 납치한 자들이 어떤 놈들이었는지, 후작 부인이 무엇을 노리고 있었는지를 낱낱이 고해바쳤다.
“백일이 지나면 저를 죽일 거라고 했어요. 늦어도 세 살이 되기 전에 저를 죽일 거라고 했어요. 왕손이 제 어미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면 그래야 한다고, 그래야…… 순종적인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다면서!”
이번 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자가 왕자궁의 수석 시녀 율리아 아르테라는 것도 문제였다.
샤트린 공주의 목숨을 살린 것만으로도 작위를 내린다 하였는데, 이번에는 왕가의 후손을 구출하고 마조람 후작가의 반역을 저지하기까지 했다.
율리아가 아니었으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국왕은 율리아에게 어떤 보상을 주어야 할까 고민했다. 한 차례 작위를 거절한 적이 있어, 더 고민이 되었다.
율리아가 귀족이었다면 차라리 쉬웠으리라. 귀족들은 원하는 게 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건방진 시녀는 뭘 원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조람 후작을 지지하는 자들과 원로원의 반응도 문제였다. 율리아 아르테가 큰 공을 세웠다는 점은 인정하나, 평민에게 공신 귀족의 작위는 가당치도 않다며 왕을 몰아세웠다.
그들을 증오하는 율리아가 권력이라는 칼을 손에 쥐게 되면 그 칼끝이 자신들을 향할까 봐 두려워 그런 것이었다.
왕궁이 시끄러웠다. 시끄럽다 못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일찍이 마조람 후작을 배신한 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칩거에 들어갔고, 끝까지 그의 곁에 남았던 자들은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몰라 두려움에 떨며 발악했다.
창가에 서 있던 율리아가 한 손을 창밖으로 내밀었다. 창문도 없이 쇠창살만 있는 창이었다.
“들리세요?”
멀리서 귀족들의 고함이 들렸다.
후작 부인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며칠 새 해쓱해진 얼굴이었으나, 여전히 꼿꼿하고 우아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율리아가 그녀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한텐 그래도 제법 괜찮은 분이었나 봐요. 당신을 살리려고 저토록 애쓰는 걸 보니.”
“내 목숨이 아니라, 제 목숨 살리려고 애쓰는 것이지.”
“하긴.”
율리아가 가볍게 웃으며 후작 부인의 곁으로 돌아왔다. 추운 감옥엔 벽난로도 없었다. 그저 거칠고 두툼한 솜이불뿐이었다.
크리스틴은 그래도 귀족을 위해 만든 특별한 감옥에 있었는데, 반역을 저지른 이상 이들은 이제 그런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율리아가 후작 부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후회하세요?”
“아니.”
“그럴 것 같았어요.”
“너를 이해할 수 없을 뿐이지.”
후작 부인은 아주 생경한 존재를 보듯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태어나 처음 만난 사람을 보는 것처럼, 혹은 인간이 아닌 어쩐 이형의 존재를 보는 것처럼.
“미친 건 아닌 것 같은데, 제정신도 아닌 것 같고. 우리를 왜 이렇게까지 미워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내 남편이나 아이들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너를 학대한 건가 싶다가도, 네 눈은 내가 제일 밉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깊은 증오와 원망이 고작 ‘미운’ 감정으로 느껴진다니. 율리아는 후작 부인이 얼마나 오만한 사람인지를 또 한 번 깨달았다.
“모르셔도 상관없잖아요. 제가 왜 이러는지.”
“그래,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후작 부인이 고개를 비틀었다. 늘 곱게 하고 다니던 화장은 온데간데없이, 주름지고 창백한 본래의 얼굴이 드러났다.
율리아는 그녀의 얼굴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늘어진 눈꺼풀이 눈꼬리를 덮고, 눈 밑엔 검은 그늘이 있었다. 입술은 바짝 말린 무화과 같았다. 눈가를 중심으로 번지기 시작한 검버섯이 잡티보다 더 많았다.
오만이 흘러내려 세월이 된 얼굴.
“이제 찾아오지 않을 거예요.”
“아쉽구나. 말동무가 있어 좋았는데.”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려고요.”
율리아가 후작 부인을 향해 조금 더 몸을 기울였다.
그녀에게서 싱그러운 시트러스 향이 났다. 요즘 왕자궁에서 유행하는 향이었다. 후작 부인은 차디찬 감옥을 맴도는 율리아의 향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하게 대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마.”
“사랑했거나 존경했거나, 혹은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을 배신하고 죽였어요.”
“그래서.”
“죽은 줄 알았는데 꿈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꿈에서 깨고 나니까 또 죽이는 거예요. 멀리 도망쳐도 죽이러 쫓아오고, 왜 이러는 거냐고…… 잘못했다고 빌어도 또 죽이는 거예요.”
“우리가 네게 그랬다고 말하고 싶은 거니?”
“그래서 복수를 결심했어요. 세 번 죽었으니 세 번 죽여야지. 이렇게 마음을 먹었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너무 대단해서 여덟 번이나 실패하고 아홉 번째가 되었어요.”
후작 부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지난번 율리아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계속 다시 살고 있다던, 허무맹랑한 이야기.
율리아가 물었다.
“당신이었어도 똑같이 복수했을까요?”
“그래.”
후작 부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아주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땅한 복수지. 여덟 번 실패했다고? 그럼 여덟 번 성공해야지.”
어쩌면 그보다 더. 더 잔혹하고 대담하게.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이번에는 후작 부인이 물었다.
“계속해서 다시 시도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맞아요.”
“굉장한 축복이로구나. 신의 선물인가.”
“선물이라고?”
율리아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후작 부인의 입에서 나온 선물 혹은 축복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저주라고 믿었던 것이 그런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니 너무 우스웠다.
“만약 내게 그런 축복이 닿았다면.”
후작 부인이 입술을 비틀었다.
“여덟 번이나 실패하진 않았을 거다.”
맞다. 당신이었다면 그렇게 많은 실패를 하지 않았겠지. 어쩌면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서 자신이 그런 저주에 걸려 있는지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당신이 마조람 후작 부인이고, 내가 율리아 아르테이기 때문에 가능한 상상이다.
“제 하녀가 그러는데 바닷가에 사는 사람은 다들 환생을 믿는다고 하더라고요. 후작 부인, 다음 생에는 꼭 평민으로 태어나 고아로 살다가 보육원에서 만나요.”
“너는 귀족이고?”
“아뇨. 저도 다시 평민 고아에서 시작할게요.”
“어째서? 입장을 바꿔 복수하고 싶을 텐데?”
율리아가 해사하게 웃었다.
“그래야 공평하잖아.”
나는 당신이 나처럼 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거든.
“굶어 죽지 말고.”
물에 빠뜨려 죽은 사람의 주머니를 뒤지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그것부터 알아야지.
“맞아 죽지 말고.”
굶다 지쳐 도둑질하다가 얻어맞을 때, 아픈 것보다 손에 쥔 빵을 입에 욱여넣는 게 더 급한 게 어떤 기분인지.
“살해당하지도 마요.”
신분이 높다는 이유로 당신보다 멍청한 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그 한심한 명령에 따라야 할 때마다 얼마나 지독한 울분이 쌓이는지.
“후작 부인, 우리 꼭 다시 만나요.”
율리아가 몸을 일으켜 후작 부인을 품에 안았다. 언젠가 그녀가 율리아에게 했던 것처럼, 최대한 닿지 않으면서 다정해 보이도록.
사형장에 오라는 초대장은 보내지 않아도 괜찮다.
율리아의 귓속말에 후작 부인이 부들부들 떨었다. 우아한 척 인내하며 짓누르고 있었으나, 그녀는 사실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난 상태였다.
족쇄가 덜그럭거렸다. 비틀린 입술이 찢어져 피가 맺혔다. 후작 부인이 율리아를 향해 격렬한 분노를 내비치기 시작했다.
“율리아-!”
악에 받쳐 쏟아내는 절규. 율리아는 후작 부인이 발작하는 모습을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오래된 부두. 한때는 해적과 교류하다 이제는 바이칸의 군함을 수리하게 된 노련한 기술자들과 부두의 망령이라 불리는 늙은 선장들이 술집에 모여 몸을 녹이고 있었다.
대낮부터 거나하게 취한 그들은 왕국에 반역이 일어났거나 말거나, 늙은 어부가 잡아 온 장정 팔뚝만 한 길이의 대구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어허, 실하다!”
“빨리 손질해 인마. 술이 줄잖아!”
머리카락과 수염은 구름처럼 희고 얼굴엔 깊은 주름이 가득했다. 그래도 그들은 청년 못지않은 주량을 자랑하며 술을 마셨다.
“해적들이 앞바다에 얼씬도 안 하니까 살기는 좋은데…… 일이 줄어 큰일이구먼.”
“무혈 제독이 있잖아.”
“우리도 슬슬 은퇴해야지.”
“너는 이번 겨울에 해, 나는 봄에 하고, 이 자식은 여름에 하면 되겠다. 다 같이 나이 칠십에 은퇴하자고.”
노인들이 서로의 은퇴 시기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던 때였다. 밝은 빨강 머리의 여자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어르신들, 그거 나한테 팔자.”
코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