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화 (193/319)

169화

자정이 지나 새벽이 되었다. 카루스는 잠자리에 들지 않고 마조람 저택을 직접 휘젓고 다니며 놓친 게 하나라도 있는지 살폈다.

그때 기사단을 떠나 암행에 나섰던 덩치 큰 기사가 그곳에 나타났다.

“카루스 님.”

“무슨 일이지?”

“최근 드추바 섬 인근 해역을 정찰하던 해적으로부터 어떤 정보를 입수했는데…….”

기사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 않는 그의 충실한 전우가 충격을 다 상쇄하지 못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다에서 온 저주는 주인을 직접 선택한다고 합니다. 그 숙주가 되는 사람은 대부분 미쳐 죽거나, 스스로 죽거나, 주위 사람을 모두 죽이고 죽거나, 세상을 도탄에 빠뜨리고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오랜 해적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늙은 뱃사람들이 술자리에서 누군가에게 겁을 주기 위해 종종 꺼내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바다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그에 반해 인간은 또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그걸 깨닫게 하려고 오래전 어떤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

하지만 해적들은 그 저주를 믿었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카루스가 그에게 다가갔다. 기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심지어 하나가 더 있답니다.”

“하나가 더 있어?”

“돌이 두 개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바다로부터 온 저주, 나머지 하나는 땅으로부터 생겨난 저주라고 불렀습니다.”

말도 안 된다.

“태생이 다른 두 개의 저주가 어떤 특징을 가지는지는 알지 못하나, 그 둘은 운명적으로 서로를 적으로 인식해 영원히 증오하며 싸운다고…….”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에게 보고하는 건 충직한 부하인데, 꼭 바다 깊은 곳에 산다는 마녀가 나타나 귓속말로 속삭이는 것 같았다.

돌이 두 개라니. 어딘가에 율리아와 비슷한 저주에 걸린 사람이 하나 더 있고, 그 둘이 영원히 싸우는 저주에 걸렸다니.

카루스는 지금까지 율리아에게 들었던 모든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버지와 함께 바다 위를 떠돌다 보육원에 맡겨지고, 해적의 주머니를 털다가 귀족의 눈에 띄고, 아카데미를 지나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 전부.

‘그러다 죽고…….’

지금까지는 마조람 후작가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율리아의 삶에 그녀를 특별히 증오하거나 죽이려 안달하는 존재가 또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후작가인가.’

알 수 없었다. 후작가가 아니라면 율리아의 운명에 또 한 사람의 적이 있다는 건데.

묵직한 통증과 서슬 퍼런 분노가 가슴에 자리 잡았다.

카루스가 부하에게 물었다.

“그걸 말해 준 해적은 어디에 있지?”

“어부인 척 드추바 인근 해역을 정찰하던 놈이었는데, 사로잡아 주둔지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이후로도 몇 번 더 심문해 보았으나 놈도 그 전설에 대해 다 아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하면 어딘가엔 더 아는 자가 있다는 거로군.”

“해적들의 본거지에 가면 노인들이 비슷한 전설에 대해 많이 안다고 떠들어 대긴 했습니다.”

“유인하는 건가.”

“거기까지 안내할 테니 살려 달라고 매달리더군요. 물론 저희를 끌고 가서 다 죽일 셈이겠지만.”

“하…….”

카루스가 으르렁거리듯 거친 신음을 내뱉었다.

해적이라. 그의 머릿속에 남부 해역 전체를 아우르는 해양 지도가 펼쳐졌다.

해적들의 본거지. 그곳은 남부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먼바다에 있었다. 얼마나 걸릴지, 어느 해로를 통해 가야 하는지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래도 율리아를 괴롭히는 그 정체 모를 저주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카루스는 죽음을 무릅쓰고 거기까지 가서 저 혼자 해적들과 전쟁을 벌일 수도 있었다.

“카루스 님.”

눈이 뒤집힌 사령관이 미친 짓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은 기사가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오르테가는 한때 해적 세력과의 은밀한 공존으로 남부를 주름잡던 항구였습니다. 황제가 보호 동맹을 강제하기 전까지, 오르테가의 상인과 어부들은 해군보다 해적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언젠가 율리아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오르테가의 늙은 어부들은 제국의 해군을 해적과 동급으로 취급한다던 이야기.

“그들 중에 아는 자가 있을 수도 있겠군.”

“조사해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하의 말이 옳았다. 가까스로 머리를 차갑게 식힌 카루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충원하지.”

“바바슬로프를 데려가겠습니다.”

부하가 돌아간 뒤에도 카루스는 내내 율리아를 생각하느라 굳은 얼굴을 풀지 못했다.

마조람 후작가를 뒤엎고 후작 부부와 그의 혈족을 모두 감옥에 가두는 데는 성공했으나, 율리아가 여기서 복수를 마무리 지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조람과 운명을 함께하는 귀족들이 이대로 당하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레위시아 왕자는 한동안 그들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워야 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격렬한 다툼이겠지. 하지만 카루스는 거기까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남기지 말고 다 부숴라. 조그만 단서라도 놓쳐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그가 저택 앞으로 걸어 나와 말에 올랐다.

“어디 가십니까?”

“왕궁에 잠시 다녀오겠다.”

율리아를 봐야겠다. 충동적인 마음에도 몸은 빠르게 움직였다.

카루스는 말에 오르자마자 왕궁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왕궁 병사들이 율리아가 바다에 갔다고 알려 주었다. 카루스는 왕자궁에서 가장 가까운 바닷가로 향했다. 알렉사 시녀가 병사들과 함께 해변 끝에 서 있었다.

“카루스 님?”

그녀가 살짝 묵례하며 인사해 왔다. 카루스는 알렉사의 시선이 닿아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율리아가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자다가 말고 갑자기 뛰쳐나가는 걸 따라왔습니다.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멀리서 지키고 있었어요. 저는 이만 왕궁으로 들어갈 테니, 율리아를 부탁합니다.”

알렉사의 담백한 목소리가 그를 그녀에게로 이끌었다.

이번에는 카루스가 알렉사를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말에서 내린 그가 율리아에게 다가갔다.

겨울 바다는 춥다. 오르테가가 아무리 따뜻한 남부라고 해도 한겨울 새벽 바다는 추웠다. 그런데도 율리아는 파도가 닿지 않는 절묘한 위치에 서서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카루스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넸다.

“후작 부인을 찾아가서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채찍질이라도 했어야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코코랑 똑같은 소릴 하시네요.”

율리아가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울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녀의 얼굴은 아주 말끔했다.

카루스가 자신을 지그시 응시하자, 율리아가 손가락으로 뺨을 만지작거렸다.

“저도 제가 울 줄 알았어요.”

“괜찮아 보여 다행이군.”

“코코가 하는 소릴 들었어야 해요. 나한테 막 화를 내면서…… 후작의 따귀를 때리고 머리채를 잡으러 가자고. 네가 안 하면 나라도 해야겠다며 길길이 날뛰는데.”

율리아가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카루스가 그녀의 곁에 바짝 다가와 붙었다. 그가 바람을 막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율리아가 손을 내밀어 그의 팔을 껴안듯 팔짱을 꼈다.

그러곤 조심스레 머리를 기댔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어쩌다 한 번쯤 그런 걸 보거나 듣게 되거든요. 너무 슬프고, 너무 아픈 사람이 삶을 놓아 버릴 때. 뭔가에 홀린 듯이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거요.”

카루스가 기척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율리아의 말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생생했다.

“이런 기분이었을까.”

율리아가 바다를 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흘러나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그냥……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이대로 살아도, 혹은 죽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

“율리아.”

“걱정하지 마세요. 악착같이 살아야겠다고 결론 내렸으니까.”

우리 약속했잖아요. 율리아가 장난스레 건넨 말에, 이번에는 카루스가 웃었다.

그가 한 손으로 율리아의 뺨을 쓸어내렸다. 꽁꽁 얼어붙은 뺨에서 찬 기운이 느껴졌다. 옷을 벗어주려고 했는데, 율리아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카루스가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이끌었다.

그저 온기뿐이었다. 사심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율리아는 그의 품에 들어가 차가운 바닷바람으로부터 몸을 피했다.

충동적으로 바다에 나올 때만 해도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서 불안했다.

생각을 멈추면 죽는다. 실수해도 죽는다. 아무것도 안 해도 죽고, 너무 열심히 해도 죽었다.

“여기까지 온 게 처음이라 그래요. 그렇게 여러 번 살았어도…… 여기까지 온 건 처음이라서.”

상상뿐이었다. 언제나. 이 순간이 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어떤 기분일까. 얼마나 지독한 괴물이 되어 있을까.

“내 손으로 직접 죽이면 어떤 기분일까. 목을 조를까, 심장을 찌를까. 사형장 맨 앞자리에 앉아 지켜보고 싶다거나, 그 시체를 그림으로라도 남기고 싶다거나. 차라리 살려 두고…… 영원히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

나는 괴물이다. 아홉 번째를 사는, 저주받은 괴물.

“율리아.”

머리 위에서 카루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율리아는 그가 자신을 불러놓곤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냥 아무 말이나 하셔도 돼요.”

이제 와 새삼스레 상처받지 않는다고, 율리아가 말했다. 카루스는 그런 게 아니라며 잠시 더 고민하더니 결국 이렇게 중얼거렸다.

“승리를 즐겨.”

“네?”

“악마, 괴물…… 그런 건 전부 겁쟁이들이 자신의 패배를 정당화하려고 만들어 낸 말일 뿐이야. 너는 승리자다. 그러니까 즐겨.”

카루스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있던 율리아가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제가 끔찍하지 않아요?”

카루스는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

아무리 감춰도 사라지지 않는 열기가 그의 긴 눈꼬리에 묻어나 있었다. 율리아는 그에게서 거대한 욕망과 그보다 더 깊은 이해를 엿봤다.

“세상은 혼자서 거인을 이긴 자를 괴물이라 부르지 않아.”

영웅이라고 기억한다.

율리아가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