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저주는 스스로 주인을 선택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눈을 떴더니 온몸에 식은땀이 배어나 있었다. 잠옷이 축축할 정도였다. 악몽을 꿨는데, 꿈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마조람 저택이었던 것 같았다. 언제였더라. 열다섯이었나. 아니면 그보다 더 어렸던가. 무슨 일이 있었는데, 꿈이라 가물가물했다. 그저 무섭고 서러운 감정만 남아 가슴에 울분이 맴돌았다.
속이 시원한데 아팠다. 일이 뜻대로 진행되어 기쁜데, 그래도 아팠다. 어디가 아픈 건지도 모르게 아팠다.
율리아는 왕자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아주 깊은 잠을 잤다. 초저녁부터 식사도 안 하고 잠만 잤다. 중간에 코코와 알렉사가 다녀간 것 같았는데, 잠에 취해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얼굴을 쓰다듬고 이불을 끌어 올려 주던 손길은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커튼을 열어 창밖을 보니 이른 새벽인 것 같았다. 아직 동이 트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오르테가에 내렸던 함박눈은 흔적조차 남지 않고 녹아 버렸다. 눈이 그치자마자 다시 따뜻해진 날씨 때문이었다. 저녁엔 추적추적 비가 내리나 싶더니, 밤이 지나 새벽이 되었는데도 얼지 않고 녹아 사라졌다.
언제 다시 눈이 오려나.
율리아에게 눈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아름답고 포근한데, 볼 때마다 자신의 첫 번째 죽음을 떠올리게 해 괴로웠다. 때로는 눈보라 속에서 얼어 죽어 가던 그때의 율리아 아르테를 그리워하게 되기도 했다.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고 돌아다니던 어린 시절에는 눈 쌓인 항구에서 눈사람을 만들던 기억도 있었다.
아마 바이칸 제국의 어느 항구였을 것이다. 오르테가보다는 훨씬 북쪽에 있는. 그래서 그렇게 눈이 쌓여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겠지.
어렸을 때라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았다. 소복소복 쌓인 눈이 종아리까지 올라왔던 것 같다. 몸집이 작았으니 어른들에겐 발목쯤이었던 높이가 자신에게는 종아리였으려나.
아버지의 품에서 바라보던, 눈 내리는 바다가 참 아름다웠는데.
바다에 가고 싶다.
충동적인 생각에도 몸은 빠르게 움직였다. 율리아는 잠옷을 벗고 두툼한 원피스에 코트를 입었다. 부츠에 모자, 장갑까지 순식간에 차려입은 그녀가 왕자궁 밖으로 걸어 나갔다.
* * *
카루스는 마조람 저택을 점거한 채 하룻밤을 보내고 있었다. 후작가에서 요직에 있었거나 제법 아는 게 많아 보이는 자들은 모두 레위시아에게 넘긴 뒤였다.
그 얼굴 예쁜 왕자는 아마 한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죄인을 심문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동조하는 척하며 진실을 캐내고, 또 그들이 저지른 죄를 저울에 올려 형벌의 무게를 정하는 것. 그건 상상 이상으로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율리아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밤이 깊어지자 생각이 자연스레 율리아에게로 향했다. 누군가 그녀의 곁에서 따스한 손으로 잘 붙들고 있어 줘야 할 텐데. 맡은 역할이 있어 그 자리에 함께 있어 주지 못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율리아는 아마 그녀 특유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 상황을 견뎌 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율리아를 손가락질했을지도 모른다. 냉혈한, 혹은 독한 계집애라 부르면서.
하면 그들의 손을 다 잘라 버릴까. 입을 막아 버릴까. 국왕이 하는 짓이 고까우니, 놈의 목을 잘라 바다에 던질까.
마조람은 율리아의 몫이니 건드릴 수 없고, 오르테가를 통째로 불태워 이 땅에 새 풀이 돋아나게 해 보는 건 어떨까.
이 모든 건 학살자의 방식이었다. 폭군의 취향이기도 했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시렸다. 쓰리고 아프고, 뜨겁게 벅차오르다가 한없이 잘게 쪼개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시렸다. 갈비뼈 사이사이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그 여자, 율리아 아르테가 나를 망가뜨리고 있다.
카루스가 메마른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