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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화 (191/319)

168화

무시무시한 인상의 기사들이 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말에 올랐다. 선두에는 이십여 명의 기사들이 검은 갑옷에 검은 투구를 쓰고 달렸다. 남부 함대를 상징하는 제복 위에 갑옷을 걸친 기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저택 안에 있는 자들을 남김없이 구금하라! 단 한 사람도 빠져나가게 둬서는 안 된다!”

“후작의 금고를 찾아라! 해적의 금화를 유통하면서 작성한 장부가 있을 것이다! 이는 황제 폐하의 명령이다! 저 같잖은 남부의 귀족이 제국의 함대를 우습게 여겼으니, 본때를 보여 줘라!”

“반역자의 집이다! 흙발로 짓밟고 벽을 부수어라!”

군마의 거친 투레질에 사람들이 기겁하며 길을 비켰다. 카루스는 투구도 쓰지 않은 채 선두에 서서 달렸다. 마조람 저택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쳐라!”

그가 나타나자 혼비백산한 후작가의 병사들이 정문 안에서 몇 차례 경고했으나, 바이칸에서 수많은 성과 요새를 함락시켰던 카루스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정문이 부서져 열렸다. 후작가로 들어가는 모든 문이 강제로 개방되었다. 카루스의 기사들이 주축이 되어 남부 함대의 기사들까지, 그들은 사령관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겁먹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엎드리고, 사치품으로 가득한 저택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가구와 창고, 지하실까지 남아나는 곳이 없었다.

몰락이 시작되었다.

바실리가 실종되거나 크리스틴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보다 저택을 짓밟는 게 더 큰 효과가 있었다. 마조람이라는 이름에 오물을 끼얹고 그들을 거리로 몰아내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이쪽입니다.”

기사들이 저택 안쪽 깊은 곳에 있는 응접실을 찾았다. 율리아가 알려 준 대로였다. 창문도 없는 지하에 호화로운 공간이 있었다.

카루스는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갔다.

“뒤져라.”

기사들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검을 검집째 들고 모든 가구와 벽을 때려 부수며 증거를 찾았다.

워낙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고 있기에, 율리아도 후작의 비밀 금고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대략적인 위치만 알뿐이었다.

그래서 이른 봄 카루스가 남부 함대가 해적과 붙어먹고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원했을 때, 전임 사령관의 신병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육안으로는 금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어딘가에 깊숙이 은폐해 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카루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공간을 훑었다. 황제의 명령으로 정복 전쟁을 치르면서 누구보다 이런 일에 경험이 많은 그였다.

감추고 싶은 게 많은 놈들은 한결같았다. 증거를 남기지 않고 죄다 불태워 버리면 들킬 일도 없을 텐데, 꼭 뭔가를 잔뜩 숨겨 놓고 불안해하며 살았다.

나쁜 짓을 여러 사람과 함께 저지르다 보면 그걸 들키는 것보다 공범이었던 자들의 배신이 더 신경 쓰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납게 웃으며 명령했다.

“바닥을 뒤엎어라.”

기사들이 바닥재를 다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이날 바이칸의 무혈 제독 카루스 란케아가 레위시아 2왕자의 조력 요청을 수락하고 마조람 후작의 저택을 수색했다.

그 안에서 후작이 오랫동안 모아 놓은 수많은 비리 장부와 장물, 많은 사람이 연루된 편지와 계약서가 발견되었다.

후작 저택에서 일하던 자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투옥되어 심문을 받았다. 가신 가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후작과 거래하던 상인까지,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이 줄줄이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국왕은 이 사건을 레위시아 2왕자에게 맡겼다. 쇠약해진 왕이 침대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의사들이 왕의 곁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이 한 사람의 시녀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었으며, 일어난 일의 순서까지 치밀하게 계획되었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또각또각. 고요한 감옥 앞 복도에 단단한 구두 소리가 들렸다.

율리아였다.

“나는 경고했어요.”

그녀는 감옥 안에 있는 후작 부인을 보며 웃었다.

“왕궁에 들어왔을 때, 바실리를 망가뜨렸을 때, 크리스틴을 무너뜨렸을 때……. 계속 경고했잖아요.”

그걸 무시한 건 당신이다.

내가 어리다는 이유로, 같잖은 평민이라서, 당신이 부리던 종이니까. 그런 이유로 무시했다.

이해한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당신은 내가 아홉 번째를 살고 있다는 걸 모르니까. 내가 복수에 미쳐서 계속 살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도.

“경계했어야죠.”

아무리 하찮은 배신이라도 그냥 넘어가선 안 된다. 사지를 찍어 누른 채 손발을 잘라야 한다. 때로는 목숨을 빼앗아야 할 때도 있다. 그래야 그 작은 배신이 더 큰 배신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을 망가뜨릴 때는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철저하게 짓밟아야 한다.

“다 당신한테 배운 거예요.”

나의 첫 번째 스승.

율리아의 눈동자에 초록으로 감춰 놓았던 암흑이 드러났다. 암흑보다 더 검고, 피보다 진한 살의. 원한으로 똘똘 뭉친 집착.

후작 부인이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너…….”

그때 후작 부인은 깨닫고 말았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율리아 아르테가, 그녀가 알던 율리아 아르테가 아니라는 사실을.

“너 누구야?”

그렇게 물어 놓고도 후작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이라니 그럴 리가 없었다.

율리아 아르테는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계집애였다. 저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줄 알지만, 순진하고 경험이 적어 노련한 맛이 없었던 도구.

한데 눈앞에 있는 저 시녀는 무엇인가.

괴물이었다.

벌레인 줄 알았던 것이 수없이 탈피하여 마침내 괴물이 되었다. 율리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거대한 괴물의 그림자가 마조람 후작가에 암운이 되어 드리워졌다.

“너를 돕는 게 아니었는데.”

후작 부인이 짓씹듯 말했다.

“굶어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어. 보육원 원장이 해적선이나 노예선에 팔아넘기도록, 그냥 못 본 척했어야 했어. 시궁창에 처박혀 살다 죽을 계집애를 주워다 먹여 주고 재워 주고, 공부까지 시켜 줬더니…… 그 은혜를 이렇게 갚는다고?”

“네. 이렇게 갚을 거예요.”

율리아가 그걸 이제야 알았냐며, 당신치곤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고 후작 부인에게 속삭였다.

“사실 이건 제 아홉 번째 삶이에요. 당신들 덕에 여덟 번이나 죽었거든요. 그러니까…… 앞으로 일곱 번 남았어요.”

기대하세요. 이제부터는 싸움이 아니라, 학대가 시작될 거니까.

“당신들이 나한테 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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