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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화 (190/319)

167화

“뭐라……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국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내질렀다.

일부러 드러낸 분노였다. 보란 듯이, 들으란 듯이 약간의 과장을 보태 분노를 꾸며 낸 왕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율리아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감히 왕궁을 혼란케 한 죄는 달게 받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조람의 야욕이 왕가에 닿아 있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바이칸의 국경이라니, 그게 정말인가! 거짓이라면 너를 참형에 처할 것이다!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율리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회의장 맨 끝에 있던 레위시아와 코코가 어느새 율리아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레위시아가 율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곤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너는 여기서 무릎 꿇을 일이 없노라고, 그가 행동으로 말했다.

“아버지, 재판을 다시 시작해 주십시오.”

레위시아가 회의장 문을 가리켰다.

“증인을 데려왔으니까요.”

사람들의 시선이 레위시아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묵직한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바깥에서 찬 바람이 사납게 밀려들어 와 회의장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미지근하고 눅눅했던 공기가 정신이 번쩍 들도록 차갑고 상쾌하게 바뀌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남부 오르테가에 수년 만에 내리는 함박눈이었다. 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헤치고, 알렉사가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여자를 데리고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국왕 전하……!”

여자는 지금 이 순간이 자신과 아기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북풍을 타고 오는 동안 그녀는 맥스웰의 입을 통해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살려 주세요!”

여자의 얼굴을 알아본 귀족들이 경악하며 비명을 삼켰다.

“전하…… 국왕 전하.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제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아이를 살려 주세요. 지켜 주세요. 죽고 싶지 않아요. 이렇게 빌게요. 뭐든지 할게요. 제발…….”

여자가 아기를 품에 안은 채 비틀거리며 국왕을 향해 나아갔다. 어미가 불안해한다는 걸 알았는지,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애처로움을 머금은 갓난아이의 울음소리에는 어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제적인 힘이 있었다. 아이는 숨이 넘어갈까 걱정될 정도로 맹렬하게 울어댔다.

도대체 누가. 감히 왕가의 후손을.

누가 저 아무 죄 없는 갓난아이를.

국왕이 피가 다 빠져나간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누가…….”

여자가 울부짖었다.

“마조람 후작 부인입니다-!”

회의장 공기가 찢어질 듯 크게 부풀었다. 경악한 귀족들이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국왕의 시선이 여자가 안고 있는 아기에게서 마조람 후작 부인에게로 옮겨 갔다.

후작이 아내를 대신해 반박하려던 순간이었다.

“네 이놈-!”

국왕의 고함이 회의장을 뒤흔들었다.

혼을 실은 외침이었다. 국왕은 그렇게 한마디 소리를 지르자마자 비틀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왕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아이가 더 애처롭게 울었다. 여자도 아이와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레위시아가 쐐기를 박았다.

“이는 명명백백한 반역입니다!”

왕이 레위시아를 바라보았다.

후작과 그의 사람들이 율리아를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를 지르고, 박쥐 같은 왕비의 친정 가문과 그 세력은 서둘러 그들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왕이 말했다.

“레위시아.”

“예, 전하.”

“이 일은 네게 일임하겠다.”

꺼질 듯 위태로운 왕의 목소리에 깊은 회한이 서려 있었다.

그의 결정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조람을 무너뜨리는 일에 레위시아 2왕자보다 적합한 자는 왕족 중에 아무도 없었다.

레위시아가 왕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사력을 다해 왕명을 수행하겠습니다.”

“마조람 후작과 후작 부인을 가두고…….”

지친 왕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귀족들을 가리키며 명령을 내리던 때였다. 이 순간을 기다렸던 레위시아가 고개를 번쩍 들고 말했다.

“아버지께 청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냐.”

“이 일에 카루스 란케아의 조력을 구하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무혈 제독 말이냐?”

쓰러지기 직전인 와중에도 왕은 레위시아의 말에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보좌관도, 샤트린도 그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여기서 카루스 란케아의 이름이 왜 튀어나오는 것이며, 어떻게 그의 조력을 구하겠다는 건지, 레위시아 2왕자가 어떤 연유로 카루스 란케아의 손을 잡게 된 건지.

모르는 사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무혈 제독의 도움을 구할 수만 있다면 마조람 후작과 그의 세력이 어떤 반항을 한다 해도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왕이 고심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레위시아가 벌떡 일어나 입구를 바라보았다. 알렉사가 여자와 아기를 데리고 올 때 그들과 함께 회의장 안으로 몰래 들어왔던 맥스웰이 입구 쪽에서 시종인 양 행세하고 있었다.

레위시아가 크게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맥스웰이 씩 웃더니 서둘러 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그러곤 바바슬로프와 함께 왕궁을 빠져나갔다.

왕실 기사들이 들이닥쳐 마조람 후작과 후작 부인, 크리스틴의 신병을 구속했다. 마조람의 가신 가문 중에서 6촌 이내의 혈족도 함께였다.

후작은 몸부림을 치며 반항했으나 기사들의 완력을 당해낼 수 없었고, 후작 부인은 끌려 나가면서도 무섭게 굳은 얼굴로 율리아를 노려보았다.

크리스틴은 기사들이 손을 내밀기도 전에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따랐다.

율리아는 그 세 사람이 회의장 밖으로 끌려 나가는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눈에 새기기라도 할 것처럼 집중했다.

코코가 율리아의 손을 잡았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코코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인형 같은 얼굴엔 표정이 없어 냉정하게만 보였는데.

율리아의 손은 미지근한데 코코의 손만 차가웠다. 율리아는 코코의 손을 꼭 움켜쥐고 자신의 체온을 나누려고 했다. 그런데 같이 차가워질 뿐 온기는 더해지지 않았다.

그 위에 알렉사가 제 손을 덮었다. 알렉사의 따스한 체온이 전해지자, 그제야 두 사람의 손에 온기가 돌았다.

“코코.”

마지막으로 끌려간 후작 부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율리아가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생각해야 하는데…….”

“그만해.”

코코가 화를 내려다 말을 삼키고 이내 울음을 삼켰다.

코코의 숨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다는 걸 눈치챈 율리아가 시선을 내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울어요. 율리아가 눈으로 물었다.

코코는 붉은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입술을 짓씹으며 짜증을 내더니, 율리아를 냅다 껴안아 버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가만히 서 있던 율리아가 천천히 손을 올려 코코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저보다 더 긴장하고, 더 불안해하고, 더 차갑게 굳은 코코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이 축축했다. 왜 축축한지를 몰라 머뭇거리던 율리아가 손가락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자신의 눈에서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상하다. 아직 끝이 아닌데.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자신이 그린 복수의 그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왜 벌써 눈물 따위가 나오는 건지.

“뭐야. 코코 때문에 나도 울잖아요.”

이유를 찾지 못한 율리아가 괜히 코코를 탓했다. 발끈할 줄 알았던 코코가 율리아를 꽉 끌어안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알렉사가 두 사람을 지키듯 그 앞에 섰다.

* * *

제국군이 움직였다.

카루스는 마지막 재판이 열리기 전날 바이칸에서 데려온 기사들과 남부 함대 기사들을 데리고 마조람 후작의 저택과 가장 가까운 부두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율리아는 이번 일을 시간 싸움이라고 표현했다.

맥스웰이 재판이 끝나기 전에 왕가의 후손을 데리고 도착해야 마조람 후작이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바이칸 국경에서 출발한 용병들이 왕가의 후손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후작가에 알리거나, 후작 내외가 반역을 꾀했다는 사실을 왕에게 들킨 뒤에, 누구에게도 저 넓은 저택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증거를 감출 시간을 줘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후작과 후작 부인, 후계자인 크리스틴은 왕궁에 구금될 것이다. 그들은 저택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하지만 마조람의 충실한 종들이 목숨을 걸고 주인을 위해 움직일 수는 있었다.

그러니 카루스는 그들보다도 빨라야 했다.

“부왕이 충격을 받아 정신없는 틈을 타서 이 일에 네 조력이 필요하다고 요청할 거다. 그 사람은 허락할 수밖에 없을 거야.”

“확실한가?”

“왕실 기사단을 데리고 왕궁에서 출발하면 너무 늦어. 그사이 누가 불이라도 지르면 끝이야. 마조람의 기생충이었던 부왕이 그걸 모를 리가 없지.”

“알겠다. 그렇다면 나는 가장 가까운 부두에서 대기하지. 네가 국왕의 허락을 구하자마자 놈들의 저택에 쳐들어갈 수 있도록.”

“부탁한다.”

레위시아가 카루스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카루스는 그가 제법 머리를 잘 숙이는 왕족이라고 생각했다.

밉지 않은 놈이었다. 율리아를 탐내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손을 잡기에 나쁘지 않은 상대.

갈매기 한 쌍이 낮게 날았다. 오르테가에는 잘 내리지 않는다는 함박눈 사이로 갈매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카루스 님!”

한 자리에 서서 부두를 노려보던 카루스의 눈에 말을 타고 달려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맥스웰이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리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가 뭐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숨이 거칠어 뭐라고 하는 건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카루스는 명령을 내렸다.

“출발하라!”

율리아가 실패했을 리가 없으니까.

“마조람 저택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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