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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화 (189/319)

166화

율리아에게 집중되었던 시선이 이번에는 후작 부인에게 쏟아졌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던 크리스틴도 몸을 움찔거리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후작 부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스치는 소리가 났다.

“존경하는 국왕 전하.”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후작 부인의 목소리가 회의장을 울렸다.

“저는 사랑하는 딸을 위해 신성한 브레웨 아카데미의 이름에 먹칠을 했습니다. 아들이 공주 전하와의 성혼을 앞두고 있었기에, 감히 딴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혼을 내기도 했습니다.”

“죄를 인정하는 것인가?”

“하지만 저 가엾은 평민 아이를 죽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후작 부인이 측은하다는 듯 율리아를 내려다봤다.

“율리아가 자란 보육원은 너무나 가난하여, 아이들이 직접 구걸을 나서거나 도둑질을 해서 주린 배를 채우던 곳입니다. 원장은 다 자란 아이들을 노예선에 팔아넘기기도 했어요.”

귀족들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데려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학비를 지원해 준 것도, 가문에서 일하며 돈 걱정 없이 살게 해 준 것도…… 그저 가엾어서 그런 것입니다. 율리아는 크리스틴과 같은 나이였으니까요.”

율리아가 고개를 들어 후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렸다.

“크리스틴을 지나치게 질투한 나머지, 딸의 것을 모두 빼앗으려고 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어둡게 가라앉은 진한 초록색 눈동자와 축축하게 번들거리는 갈색 눈동자.

후작 부인은 슬픔을 가장해 율리아를 비웃었다.

“그저 너무 가엾어 베푼 호의였는데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 몰랐습니다. 가난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천민은 왕족의 곁에 있어선 안 됩니다. 너무 귀한 것을 보고 만지면 탐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오르테가의 신분제는 신앙과도 같았다. 귀족들은 후작 부인의 말에 공감했다. 국왕도 후작 부인의 말에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전하, 부끄러운 일이지만 율리아는 저희 가문에서 오랫동안 일했습니다. 그 궁내부 관리는 크리스틴보다 율리아와 더 가까웠던 자입니다.”

후작 부인이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저희 가문은 샤트린 전하를 공식적으로 지지해 왔습니다. 한데 저희가 왜 공주 전하를 위험에 빠뜨리겠습니까.”

크리스틴보다 율리아의 동기가 더 강력하다.

후작 부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국왕을 향해 우아하게 절을 올렸다.

* * *

신분은 타고나는 것이다. 인간의 귀천 또한 타고나는 것이다. 귀족이 평민보다 귀하고, 왕족은 그보다 더 귀하다.

이는 진리이자 섭리였다. 그러니 평민이 귀족이 되려면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큰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마저 있었다.

율리아 아르테는 이번 삶에서 귀족이 되기로 했다. 더도 덜도 말고 마조람 후작만큼 높은 곳에 오르겠다고 결심했다.

인간의 몸으로 천지개벽을 이뤄 낼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이 고루한 왕궁에 그 정도의 충격을 던져 줄 수는 있었다.

율리아가 후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우러러봤을 때도 있었어요.”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앳된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이한 카리스마에 국왕조차 입을 다물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당신이 나를 처음 귀족의 마차에 태웠을 때, 그 넓은 저택에 데려갔을 때, 아카데미에 다니게 해 주었을 때, 열심히 노력해서 언젠가는 너도 귀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을 때.”

율리아는 후작 부인을 향해 우아하게 웃었다.

“당신처럼 되고 싶었죠.”

불가능한 꿈이었다는 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알았다. 평민은 귀족이 될 수 없었고, 후작 부인이 율리아에게 베풀었던 건 호의가 아니었다.

“짐승을 길들일 때 쓰는 방식이었어요. 굶주린 배에 먹을 걸 채워 주고, 험한 곳에서 굴린 뒤에는 다정한 척 안아 줬죠. 복종이 습관이 되도록 가르쳤어요. 크리스틴의 그림자가 되어 살다가, 마조람의 노예로 남도록.”

후작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후작이 아내 대신 나서서 율리아에게 역정을 부렸다.

“닥쳐라!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 게냐!”

“후작 부인.”

율리아가 웃으며 물었다.

“제가 아깝지 않으셨어요?”

하이에나에게 내 목을 가져오라고 의뢰했을 때,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율리아 아르테의 가능성을 처음 발견하고 비뚤어진 방법으로 성장시킨 스승이었으니까.

회의장에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율리아와 후작 부인은 다른 귀족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서로만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국왕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했다. 그러곤 율리아를 윽박지르며 훈계했다.

“율리아 아르테, 이곳은 신성한 재판장이다. 네 개인적인 사연을 풀어놓는 장소가 아니야. 평민인 네가 귀족의 방식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는 걸 유념해라.”

“전하.”

“더는 너의 방종을 눈감아주지 않겠다.”

국왕은 모든 걸 포기한 얼굴이었다. 궁내부 관리가 증언을 뒤집고 죽어 버렸으니, 이제는 크리스틴을 몰아세울 수가 없었다.

마조람 측의 귀족들이 율리아를 가리키며 주범이 저기 있는데 왜 잡아 가두지 않느냐고 성화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왕은 율리아의 말을 믿었던 걸 후회했다. 차라리 처음 일이 터졌을 때 율리아를 잡아 가두고, 크리스틴의 일을 빌미로 마조람에 빚을 지워 두는 편이 나았으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모두 들어라. 이번 일은…….”

진상이 모두 밝혀질 때까지 유보해 두겠다. 왕이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국왕 전하.”

율리아가 별안간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 재판장에서 다루어야 할 것은 왕족 시해죄가 아닙니다.”

이 재판장에서 죄인의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도 크리스틴이 아니다.

“반역죄입니다.”

율리아의 말이 회의장을 꿰뚫었다.

“이 자리에 왕가의 후손을 인질 삼아 반역을 꾀하려 한 자가 있습니다.”

국왕이 말을 잃은 채 율리아를 노려보았다. 보좌관도, 샤트린도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은 아예 율리아를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다가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오직 후작 부인만이 율리아를 보며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있었다.

북풍을 타고 오르테가 항구에 도착한 맥스웰은 힘들어하는 여자를 어르고 달래며 마차에 태웠다. 그러곤 직접 고삐를 잡고 마차를 몰았다.

“빨리! 지금 재판 중이라고 한다. 빨리 들어가야 해!”

바바슬로프가 여자와 아이를 지키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그들은 굉음을 내며 거리를 내달렸다. 항구를 떠나 왕성 앞 중앙 광장으로, 그리고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 한 번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알렉사 시녀!”

왕궁 앞에 알렉사가 나와 있었다. 그녀는 맥스웰을 보자마자 찡그렸던 얼굴을 확 펴고 마차를 향해 달려왔다.

“아이는 어딨습니까.”

“마차 안에요. 아직 안 늦었습니까?”

“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알렉사가 마차 문을 열고 여자와 아이를 확인했다. 그러곤 왕궁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왕자궁의 긴한 손님이다. 비켜라.”

맥스웰이 초조해하며 물었다.

“왕궁 안에서는 왕족의 마차가 아닌 이상 속력을 내서 달리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지 않습니까? 차라리 마차를 버리고 저랑 바바슬로프가 하나씩 안고 뛰는 게 나을 수도…….”

알렉사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입가에 미소를 달고 말했다.

“왕족이잖습니까.”

“……아.”

“달려도 됩니다.”

이 갓난아이는 왕족이다. 그러니 이 마차는 왕궁 안에서 전속력으로 달려도 된다.

맥스웰이 알렉사를 옆자리에 태우고 고삐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에라, 모르겠다. 가자! 이랴!”

입구를 지나친 마차가 본궁 회의장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율리아는 제 심장이 기분 좋게 웃고 있음을 알았다.

이 순간을 얼마나 오랫동안 계획하고, 상상하고, 꿈꿔 왔던가.

귀족들이 저 건방진 평민이 헛소리를 지껄인다며, 빨리 처형대에 세우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국왕은 골치 아프게 됐다는 얼굴로 자신을 힐긋거렸다. 어쩌면 그는 별것 아닌 평민 시녀 따위는 저들에게 제물로 던져 주고 이 일을 대충 마무리하려는 중이었는지도 몰랐다.

샤트린은 공주궁 시녀들 사이에 앉아서 허탈한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마조람 후작과 후작 부인이 다급하게 귓속말을 나누었다.

율리아는 그 모든 장면을 두 눈에 담았다. 하나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두고두고 곱씹을 것이다.

만족스러웠다. 이 장면에 후회할 만한 건 하나도 없었다.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암살자가 되어 직접 저들의 목에 칼을 쑤셔 넣을까, 활로 쏴 죽일까, 독을 먹여 볼까. 그런 생각을 수없이 했다. 그러면 이 깊은 원한이 씻은 듯 흘러내릴까 싶어서.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죽음은 고통스럽지만, 한순간이다. 율리아는 그걸 여덟 번이나 겪었다. 저들에게 한 번의 죽음으로 복수를 마무리하는 건 사치였다.

아주 오랫동안 두고두고 후회하며, 지독하게 비참한 삶을 살게 할 것이다. 바실리처럼. 크리스틴처럼. 그래야 조금이나마 만족할 수 있었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가 떠오를 때마다 저들의 고통을 지켜보며 그 천박한 달콤함에 취하고 싶었다.

악마가 되어도 좋고, 지금까지보다 더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된대도 괜찮았다.

이번에도 복수를 이뤄 내지 못하면 율리아 아르테의 지난 삶은 무가치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제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시 시작할 수가 없게 되었다. 율리아는 이번 삶에 제 모든 걸 걸었다.

“전하.”

율리아가 후작 부인을 바라보며 왕에게 말했다.

“마조람 후작 부인이 돌아가신 1왕자 전하의 핏줄을 바이칸의 국경에 감금해 두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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