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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188/319)

165화

율리아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따뜻한 물로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트루디가 솜씨 좋은 하녀들과 함께 율리아의 머리카락을 손질해 주었다. 구두는 굽이 낮고 소리가 나지 않는 것으로 고르되, 장갑과 소매 장식은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것으로 맞췄다.

저 대단한 귀족들의 눈에도 마땅히 귀해 보일 만큼.

율리아는 이번 삶에서 귀족이 되려고 마음먹었다. 평민인 채 복수한 뒤에 기분이 어떠냐고 비웃어 줄까 했지만, 처지를 바꾸어 우러러보게 하는 편이 더 재밌을 것 같았다.

그러니 귀족이 될 것이다. 나도 너희처럼 그 더럽고 추악한 자리에 올라 똑같이 해 줄 것이다.

“시녀님, 본성에서 기사님들이 왔어요.”

트루디가 불안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시작인가.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었다.

“율리아 아르테, 재판이 진행되는 회의장으로 데려오라는 왕명입니다.”

기사들이 나타나 손을 내밀었다. 순순히 따라나서지 않으면 강제로 끌고 갈 기세였다.

발끈한 코코가 나서려는 찰나, 율리아가 빙그레 웃으며 걸음을 뗐다.

“물론입니다.”

* * *

누가 더 빠를 것인가.

왕가의 후손을 데려가는 자신인가, 아니면 왕가의 후손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전할 놈들인가.

맥스웰은 불안했다. 율리아는 그에게 무조건 놈들보다 빨리, 재판이 끝나기 전에 왕가의 후손을 데려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마조람 후작가에서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누가 더 일찍 도착할 것인가.

장담할 수 없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자신감 넘치는 맥스웰도 이번만은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다.

“더 빨리, 응? 더 빨리 가자고!”

“아니, 바람이 불어야 빨리 가지요! 배가 말입니까? 재촉한다고 빨리 가게?”

“태풍이라도 좀 불러 봐! 이놈의 바다는 왜 급할 때만 이렇게 잠잠한 거야?”

“뭔 태풍을 불러요? 다 같이 죽자고요? 그렇게 급하면 노잡이 노예를 잔뜩 싣고 있는 대형 선박이라도 섭외하시지! 왜 어중간한 상선에 올라서 이 난리입니까?”

“시끄러워!”

맥스웰이 부하와 싸우는 동안 바바슬로프는 선수에 서서 먼바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역시 마음이 급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군함이라도 끌고 나오는 건데, 극비리에 진행된 일이라서 그러지 못한 게 한이었다.

그때였다. 한 선원이 손바닥을 펼친 채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 눈 온다?”

바다에 눈이 오고 있었다.

맥스웰과 바바슬로프, 선원들이 모두 하늘을 바라보았다. 작은 눈송이가 먼지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아침엔 맑았던 날씨가 점점 흐려지는가 싶더니, 기어이 눈이 내렸다.

“남부에 눈이라니…….”

맥스웰이 얼떨떨해하며 중얼거렸다. 남부엔, 특히 오르테가엔 겨울에도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았다. 티타니아 산맥을 경계로 기온이 확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눈은 사선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먼지에 가까웠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탐스러운 함박눈이 되었다.

“어어, 이거 설마?”

맥스웰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우던 항해사가 주머니에서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나침반과 눈송이가 떨어지는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다 꽥 소리를 질렀다.

“이런 제기랄!”

“아이 씨,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북풍입니다!”

“어?”

“북풍이 분다고요! 저거 티타니아 산맥에서부터 부는 바람이라고! 거긴 겨우내 눈이 오잖아요!”

“어?”

“이 무식한 양반아! 뭐 해? 돛을 펴라고!”

선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돛을 최대한 넓게 펼치고 밧줄을 고정하니, 항해사가 신이 나서 키를 잡았다.

“대장, 걱정하지 마십쇼. 눈보라 헤치면서 산맥을 넘어야 하는 놈들은 북풍을 타고 내려가는 우리를 절대 이길 수가 없어.”

“이 빌어먹을 예쁜 새끼!”

맥스웰이 두 팔을 벌려 항해사를 끌어안았다. 옆에 서 있던 바바슬로프도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회의장에 율리아 아르테가 나타났다.

왕족과 귀족, 원로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율리아는 그 모든 관심을 담담하게 받아 냈다.

회의장 한쪽에 크리스틴이 앉아 있었다. 그사이 또 살이 빠져 드레스가 헐렁해진 모습이었다.

전에는 그래도 율리아가 나타나면 독살스럽게 노려보기라도 했는데, 이제는 그저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율리아는 크리스틴의 맞은편에 앉았다.

국왕의 보좌관이 앞으로 나와 큰 소리로 말했다.

“율리아 아르테, 왕자궁의 수석 시녀. 이 재판은 왕족 시해 사주라는 중대한 범죄를 다루고 있기에, 단 한마디의 거짓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대는 국왕 전하와 귀족 참여인, 왕가의 원로 앞에서 진실만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참형에 처하리라. 뒷부분엔 그런 말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국왕의 보좌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 말을 어렵게 삼키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냥 평민이면 아무렇지도 않게 참형에 처하리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율리아는 레위시아 2왕자의 수석 시녀이면서 국왕에게서 작위를 주겠다는 제안까지 받았다.

귀족을 대하듯 해야 하나, 아니면 평민을 대하듯 해야 하나.

율리아는 그 짧은 문서를 읽으면서도 고민이 많았을 보좌관을 보며 생긋 웃었다.

국왕이 무거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율리아 아르테.”

“예, 전하.”

“독살을 지시한 궁내부 관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유서를 남겼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네가 있다는 내용이었지.”

범인은 크리스틴 마조람이 아니라 율리아 아르테다.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두 사람의 악연이 워낙 유명한 이야기였기에, 어느 쪽에도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겨졌다.

“묻겠다, 율리아.”

“네, 전하.”

“샤트린 공주를 독살해 크리스틴 마조람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면 궁내부 관리가 남긴 유서는 무엇이란 말이냐.”

“조작되었거나, 협박당해서 썼다고 생각합니다.”

“뭐라? 감히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마조람 후작 부인입니다.”

율리아는 아주 담백하고 깔끔하게 말했다.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어 경쾌하게까지 느껴지는 그녀의 답변에 어안이 벙벙해진 귀족들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누구나 의심하고 있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 않았던 이름.

마조람 후작 뒤에 숨어 후작가를 좌지우지하던 후작 부인의 이름이 한낱 평민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국왕이 다시 물었다.

“그렇게 주장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얼마 전까진 국왕 전하께 동조하며 마조람 후작 가문에서 저지른 범죄를 추궁하고 크리스틴을 벌해야 한다고 소리치던 몇몇 가문이, 요 며칠 사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었을 것입니다.”

왕의 시선이 왕비의 친정 가문과 그 주변인들에게 향했다.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단 한 사람. 그리고 그분의 치부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어, 그걸 무기 삼아 협박할 수 있는 한 사람.”

왕비와 후작 부인이었다.

“그 두 사람의 권력이면 철통같던 왕궁 지하 감옥의 경비도 손쉽게 뚫을 수 있었겠지요.”

“무엄하다!”

“그러니 유서를 조작하고 사람 하나 죽이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율리아의 맑은 목소리가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목소리가 크거나 특이하지도 않은데, 신기하게 주의를 끄는 말투였다.

“마조람 후작 부인은 오래전부터 저를 죽이려 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브레웨 아카데미에서 크리스틴의 시험을 대신 쳐 주고 과제를 대신 해 준 것도 모자라, 바실리와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고작 1년 전의 일인데, 꼭 수십 년은 지난 일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남의 일인 것처럼 건조하게 늘어놓았다.

“학비를 대가로 대리 시험을 치게 해 놓고 그 사실을 발설할까 봐, 후계자였던 아들이 평민이랑 결혼하겠다며 가문의 명예에 먹칠할까 봐, 아무리 후려치고 짓밟아도 고분고분해지지 않던 건방진 평민이…… 적이 될까 두려워서.”

그래서 죽이려고 했다. 몇 번이나. 계속해서.

“전하, 저는 살기 위해 왕궁에 들어왔습니다.”

국왕의 시선이 회의장 맨 끝에 모여 앉은 왕자궁 사람들에게 향했다. 레위시아를 중심으로 코코와 힌치 백작이 양옆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마조람 후작 부인은 왕족을 협박하고 이용하면서까지 저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교묘하면서 교활했다. 국왕은 분명 네가 범인인가 물었는데, 율리아는 크리스틴도 아닌 후작 부인을 물고 늘어졌다.

진실 속에 거짓을 조금 보태고, 왕비를 직접 거론하지 않음으로써 적의 범위를 좁혔다.

국왕이 이번에는 마조람 후작과 그의 부인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후작 부인은 평소처럼 우아한 자태로 앉아 그저 가만히 율리아를 노려보았다. 후작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국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를 어쩐다.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이 회의장에 있는 모든 사람 중에서 국왕의 머릿속이 가장 복잡했다.

율리아의 말을 믿어 주고 싶지만, 증거도 없이 평민의 편을 들어 귀족을 핍박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마조람 후작 부인의 간계에 속아 넘어가 줄 수도 없었다.

이 모든 게 왕비 때문이었다. 왕이 짜증스레 물었다.

“후작 부인도 할 말이 있으면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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