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문이 열렸다.
죄인처럼 질질 끌려와 만났을 때는 미처 몰랐는데, 왕이 사는 공간에 은은한 약 냄새가 퍼져 있었다. 1왕자가 죽은 뒤부터 연이어 닥친 왕가의 비극에 심약한 왕이 약을 달고 산다더니, 그새 건강이 더 나빠진 것 같았다.
율리아는 알현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입구에서 한 번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하고, 시종의 안내를 따라 왕 앞으로 간 뒤에는 조심스레 무릎을 꿇었다.
“됐으니까 일어나라.”
왕이 한 손을 휘저었다. 율리아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그의 앞에 섰다.
“왜 작위를 받지 않겠다는 것이냐? 성에 차지 않아서 그런 건가? 건방진 평민이라는 말은 여러 차례 들었으나, 네게는 신분이 우스우냐?”
“그렇지 않습니다.”
“말을 해 보아라. 왜 그러는 것인지.”
국왕은 율리아와 길게 말하는 것조차 성가시다는 표정이었다. 빨리 해결하고 내보내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왕의 보좌관도, 하다못해 호위 기사와 시종까지 율리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보았다.
“저는 레위시아 왕자 전하의 시녀입니다.”
“그래, 그게 어떻다는 것이냐.”
“시녀의 첫 번째 덕목은 충성심이라고 배웠습니다. 크리스틴 마조람이 꾸민 흉계로부터 왕자 전하를 지키고자 이번 일의 진상을 밝혀낸 것은 그분의 충성스러운 시녀로서 해야 할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교과서적인 대답이었다. 너무 뻔해서 지루하기까지 한. 그걸 알면서도 율리아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의무를 행했을 뿐인 일에 작위는 가당치 않습니다. 거두어 주소서.”
“허, 입에 발린 소리는 됐으니 본심을 털어놓아라.”
“저는 그분의 시녀로 족합니다, 전하.”
국왕이 율리아를 노려보았다. 이제 고작 20대 초반, 왕궁에 들어온 지 채 1년이 안 된 평민 시녀 주제에 국왕을 앞에 두고도 벌벌 떨지 않는 게 괘씸했다.
“네 말에는 어폐가 있어. 왕궁 시녀의 두 번째 덕목이 품위라는 건 모르느냐? 스스로 드높여야 하지.”
그러니 작위를 받을 기회를 차버리는 것도 모시는 왕족에게 누가 된다고, 국왕이 지적했다.
율리아가 고개를 들어 왕을 바라보았다.
건방진 태도였으나, 왕은 이제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그게 더 궁금했다.
“하면 제가 아니라 레위시아 전하께 주십시오.”
“뭐?”
“제가 아니라, 모시는 분을 드높이는 것이 저의 품위입니다.”
“네 공을 레위시아에게 돌리겠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감히 국왕을 앞에 두고 이토록 양보 없는 발언이라니.
“허…….”
왕이 저도 모르게 긴 감탄을 내뱉었다.
다음 날엔 비가 오고, 그다음 날엔 서리가 내렸다. 추워지는가 했더니 다시 따뜻해지고, 또 비가 내렸다.
남부의 겨울다운 날씨였다.
수리를 마친 왕자궁에서 일꾼들이 만세를 외쳤다. 시녀장 코코가 봉급을 아주 후하게 쳐 주었기 때문이다.
연무장이 생긴 알렉사는 병사들을 훈련시키느라 매일 바빴고, 그녀에게 검을 배우고자 하는 기사들이 연일 왕자궁을 찾았다.
레위시아는 오랜만에 힌치 백작과 오찬을 즐기고 있었다.
거대한 식탁에 두 남자가 거리를 두고 앉았다. 식기 부딪치는 소리를 제외하곤 침묵으로 일관된 식사였다.
답답했던 레위시아가 찬물을 들이켤 때마다 힌치 백작이 붉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그를 지켜보았다.
레위시아는 식사를 다 마치지도 못하고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벌써 그만 드시는 겁니까?”
“속이 좋지 않아서…….”
“왜 속이 좋지 않으십니까.”
“체할 것 같습니다.”
힌치 백작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곤 레위시아의 얼굴과 그가 남긴 음식들을 한 번씩 노려보았다.
음식 남겼다고 잔소리라도 하려는 건가. 식사를 안 하니까 비쩍 말라 허약해 보이는 거라고 혼내려고 그러나. 그게 아니면 왕위를 노리는 자는 멋대로 아파서도 안 된다고 하려는 건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냅킨으로 입을 닦아 낸 레위시아가 다시 물을 들이켜려던 순간이었다.
힌치 백작이 접시 하나를 치우고 그 자리에 다른 접시를 놓았다.
“이건 소화가 잘 되는 거니까 드십시오.”
“예?”
“드시라고 했습니다.”
왜 먹는 것까지 강요하는 거야.
레위시아는 정말 반항하고 싶었다. 음식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조성하는 이 분위기가 불편한 거라고.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는 꼬마 아이처럼, 레위시아가 포크를 손가락 끝으로 잡고 들어 올렸을 때였다.
“카루스 란케아를 만났습니다.”
힌치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가 정말로 전하의 편이 되어 줄 자라면, 그게 남부 함대 전체의 뜻인가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어쨌거나 그들은 황제에게 녹봉을 받은 병사들이니 카루스 란케아가 아무리 대단한 남자라 해도 함대 없이 혼자서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그가 뭐라고 말하던가요?”
“함대는 그의 뜻을 따를 거라고 말하더군요.”
힌치 백작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레위시아는 그가 이런 식으로 웃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소문이란 과장되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가 남부 함대 제독으로 부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뭔지 아십니까?”
“모르겠습니다.”
“병사들이 뭍에 발을 내리지 못하게 하는 거였습니다. 그 많은 해군이 모두 바다 위에서만 살게 했죠. 선임 사령관과 함께 간접적으로나마 범죄에 가담했으니, 그 벌을 받으라면서 말입니다.”
“바다 위에선 선상 반란이 자주 일어난다고 들었는데, 괜찮을까요?”
“그게 참 대단한 점입니다.”
힌치 백작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카루스와 만났던 날의 일을 이야기하며,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고 말했다.
“배에서 내리지 못하면 정보로부터 차단됩니다. 그 말은, 황제로부터 차단했다는 말과도 같죠. 카루스 란케아는 남부 함대 전체를 길들여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게 가능하다고요?”
“도주로가 없는 곳에 갇힌 자에게 승리를 반복시켜 주면 그렇게 됩니다.”
남부 함대는 해적의 금화를 유통하면서부터 전투다운 전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사령관이 적과 동침을 종용했으니 오죽했으랴.
한데 카루스 란케아가 부임한 뒤부터는 해적들이 바람난 마누라 추궁하는 남편처럼 발작하며 그들을 괴롭혔다.
그들은 싸울 수밖에 없었고, 카루스가 없는 곳에선 몇 번 패배하기도 했다.
“그는 무혈 제독입니다. 바다에선 진 적이 없다더니, 그가 손을 대기만 해도 승리가 잇따랐습니다. 해적에게 굽실거리며 금화 상자나 나르던 병사들이, 짐승 같은 군함을 조종하며 대포에 불을 붙이게 된 거죠.”
“가슴이 부풀었겠군요.”
“드추바 섬에서 일어난 전투가 결정적이었다고 합니다.”
“드추바?”
“해적 놈들이 그 섬을 정말 갖고 싶었던지, 여태까지와는 달리 저들끼리 연합을 만들어 대규모 해상 전투를 계획했다는데…….”
카루스 란케아가 나타나 그들을 파리 쫓듯이 쫓아 버렸다.
“전하, 그를 반드시 아군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힌치 백작이 강하게 말했다. 그게 바로 레위시아의 할 일이라는 듯, 카루스가 없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
진짜 체할 것 같았다.
레위시아가 들었던 포크를 다시 내려놓았다. 힌치 백작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의 손을 노려보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카루스를 찬양하는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여태까지 자신에게는 없는 줄 알았던 뒤틀린 반항심까지 고개를 들었다.
레위시아가 툭 진심을 내뱉었다.
“백작 때문에 체할 것 같습니다.”
“제가 왜요.”
“밥 먹을 때는 날씨 얘기나 서로의 안부, 소소하고 기분 좋은 주제로 대화하는 게 좋다고 알고 있는데…….”
“제가 뭘 잘못 말했습니까?”
“백작이 저를 도마 위에 올려놓은 생선처럼 쳐다봤지 않습니까. 대가리부터 칠지 내장을 발라낼지 고민하는 어부처럼.”
“예?”
“카루스 란케아와는 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 남자는 사실 제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태이긴 합니다만…….”
그게 그가 율리아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말은 차마 꺼낼 수 없어서, 레위시아가 대충 말을 얼버무리려던 순간이었다.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힌치 백작이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전하께서 식사하시는데 저런 소란이라니. 왕자궁의 기강이 도대체 왜 이렇습니까?”
“기강은 시녀장이 잡는 겁니다.”
제가 아니라.
힌치 백작이 처음으로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레위시아가 떨리는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렸다.
어쩐지 코코를 연상케 하는 미소였다.
“전하!”
때마침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두 사람이 제 이야기를 하는 줄도 모르고, 코코가 나타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레위시아 전하! 이리 나와 보세요. 지금 아빠랑 식사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어서요!”
“코코…… 코델리아 시녀장, 이게 무슨 무례한 행동인가!”
“아빠도 빨리요. 국왕 전하께서 사자를 보냈단 말이에요.”
“부왕께서?”
레위시아의 분위기가 갑자기 착 가라앉았다.
“별일 아닐 겁니다.”
힌치 백작이 재빨리 레위시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왕의 사자는 공식적인 왕의 의사를 전달하는 사람이었다. 소식을 전하는 전령과 비슷하지만 이미 결정된 왕의 의견을 전한다는 점에서 조금 더 강제성이 있었다.
“알현실로 가죠.”
레위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왕의 사자는 그가 나타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국왕 전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레위시아 오르테가 2왕자 전하를 왕국의 수호자로 임명하며, 북부 왕국령의 주인으로 발표하신다고 합니다.”
북부 왕국령. 티타니아 산맥.
“뭐?”
레위시아가 코코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왕위 후계자가 아닌 자식에게는 권력을 주지 않는다. 있는 권력도 빼앗아 왕위에 도전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이 정설이었다.
레위시아가 이대로 샤트린에게 패배한다면 그는 죽거나, 왕궁에서 추방당하거나, 타국으로 팔려갈 게 뻔했다.
그런데 국왕이 그를 왕국의 수호자로 삼았다. 북부 변방이라고는 하나, 왕국령까지 선사했다.
이는 지금까지 차별 속에 살아왔던 레위시아를 진짜 왕족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으며, 샤트린이 왕이 된 뒤에도 그에게 정착할 곳을 마련해 준 것과 다르지 않았다.
율리아가 준남작 작위를 거절했던 일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덩치를 불리고 거대한 땅이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