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타닥타닥. 마른 장작에 금세 불이 붙었다. 불꽃을 응시하던 율리아의 시선이 트루디를 향했다.
“그게 궁금해?”
“건방진 소리라는 건 알지만…….”
“건방지지 않아. 돌아온 걸 보니 내 전속 하녀 노릇을 계속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럼 궁금할 수도 있지.”
“대답해 주실 거예요?”
“귀족이 될 거야.”
율리아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겁내며 물어본 게 허탈해질 만큼 깔끔한 인정이었다.
귀족이 되겠다는 율리아는 덤덤한데, 트루디가 조급해하며 물었다.
“이번에 국왕 전하께서, 그러니까…… 이번 일로 귀족 작위를 내리시는 거예요? 그럼 얼마 안 있어서 시녀님은 귀족이 되겠네요?”
“아니.”
“네? 하지만 방금…….”
“이번 일이 아니라, 다음 일로 귀족이 될 거야.”
율리아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살짝 고개를 저었다. 더 묻지 말라는 뜻이었다.
입술을 몇 차례 우물거리던 트루디가 조심스레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너무 무서워서 아무 데도 갈 수 없었어요.”
“무서워서?”
“솔직히 저 같은 무지렁이 천민이 그런 돈을 가지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크리스틴 마조람처럼요. 그런 집에서 환생하는 수밖에 없다고.”
“환생을 믿어?”
“그럼요! 바닷가에 사는 사람치고 안 믿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래, 그래서 무서워서 돌아온 거야?”
“저는 하녀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그리고 저한테 돈이 많다고 해서 여기보다 더 안전할 것 같지 않았어요. 시녀님, 저처럼 어린 계집애가 운이 좋아서 부자가 되면…… 그 끝이 행복할까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전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마 소리 소문 없이 살해당할 거예요. 제 주위엔 온통 사기꾼만 득실거리겠죠. 너무 무서워요. 시녀님, 제발 여기서 계속 일하게 해 주세요.”
의외였다. 매사에 온갖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율리아도 트루디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시녀님은 귀족이 될 거잖아요. 그냥 귀족도 아니고, 저 높은 자리로 올라갈 거잖아요. 그런 분의 전속 하녀 자리가 얼마나 귀한데요.”
“난 널 믿지 않아.”
“알아요. 그래도…… 일은 제가 제일 잘해요.”
참 신기한 아이였다. 욕심은 많은데 야망이 없고, 무모한 것 같은데 겁이 많았다.
트루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율리아가 말했다.
“식당에 내려가서 식사 준비를 부탁하고, 오전 중엔 의사를 불러 줘. 내 방과 네 방, 수색하느라 망가진 곳들을 수리해야 하니까 일꾼들한테도 잘 말해 두고.”
“네, 네! 시녀님!”
“옷은 내가 알아서 입을게. 따뜻한 물 받아 줘서 고마워.”
율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욕실로 들어갔다.
트루디가 불러온 의사는 왕궁 의사였다. 그는 율리아의 몸에 있는 멍을 보자마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자초지종을 들은 뒤에는 아예 말을 더듬었다.
“크, 크, 크리스틴…… 마조람 영애가 밀었, 밀었다고요?”
“네.”
“왜 고발하지 않으시고…….”
“제 말을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것 같아서요.”
크리스틴이 감옥에 갇혀 있지 않았다면 율리아의 말을 누가 믿어 주었을까. 그녀는 평민이고, 크리스틴에게 악감정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의사가 피부에 바르는 약을 만들어 주었다. 어차피 중요한 치료는 카루스의 관저에서 다 받았기 때문에 의사도 그것 말고는 딱히 해 줄 게 없었다.
“약을 바르고 환부를 살살 문지르면 된단다. 알았지?”
“네, 의사 선생님! 저만 믿으세요.”
트루디가 달려와 의사가 만들어 준 약을 두 손으로 받았다. 그러곤 조심스러운 손길로 율리아의 몸에 약을 발랐다.
상처는 낫는 중이었다. 멍도 옅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율리아의 몸은 보는 사람이 얼굴을 찡그릴 만큼 심하게 얼룩덜룩했다.
“시녀님, 아…… 안 아파요?”
“괜찮아.”
의사가 가방을 챙기며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는 샤트린이 쓰러졌을 때 공주궁에 불려 갔던 여러 명의 의사 중 하나였다.
가방을 챙기던 그가 힐긋,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이 평민 시녀는 곧 귀족이 된다.
왕궁에 소문이 돌았다. 왕자궁의 수석 시녀 율리아 아르테가 국왕으로부터 조만간 작위를 받게 될 거란 이야기였다.
아마 대단한 작위는 아닐 것이다. 샤트린 공주를 구하고 크리스틴 마조람의 흉계를 밝혀냈지만, 그 과정이 깨끗하거나 정의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남작 혹은 준남작, 아마도 세습 불가능하도록 제한을 두지 않을까. 국왕은 혈통과 권위를 중시하는 사람이니까 평민에게 그 이상의 작위를 약속하진 않으리라.
그래도 귀족인 게 어디인가. 보육원 출신 평민이 왕궁에 들어와 시녀가 된 것도 왕궁 역사에 기록될만한 일인데, 국왕으로부터 귀족 작위까지 받게 된다면?
어쩌면 ‘율리아 아르테’라는 이름은 평민들에게 출세와 신분 상승의 상징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 외에도 아픈 곳이 있거나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왕궁 의사는 왕궁에서 일하는 분들을 위해 존재하니까요.”
의사가 친절하게 말했다.
율리아가 고개만 돌려 의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의례적인 미소가 드리워졌다.
“고맙습니다.”
“그럼 또.”
의사가 가볍게 묵례하며 방을 나섰다.
율리아의 시선이 멀어지는 의사의 뒷모습을 관찰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트루디가 입술을 비틀며 웃고 있었다.
“웃기지 않아요? 왕궁 의사들이 무슨 왕궁에서 일하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대? 왕궁에서 일하는 귀족님네를 위해 존재하는 거지.”
“그러게.”
“시녀님이 귀족이 될 것 같으니까 태도가 아주 그냥…….”
트루디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율리아는 저 의사가 얼마나 입이 가벼울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 민들레 홀씨 정도 되지 않을까.
의사는 크리스틴 마조람이 율리아 아르테를 죽이려고 했다가 실패하고, 또 죽이려고 했다가 실패했다고 말하고 다닐 것이다. 율리아 아르테는 어쩔 수 없이 방어한 거라고.
온몸에 멍이 들어, 보기 안쓰러웠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광장에서 그 많은 인파에 밟히고도 용케 살아남았다고.
가엾고 불쌍한 사람이 고생 끝에 성공하고 행복해지는 결말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율리아는 의사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꾸며질지 상상해 보다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세요?”
“웃겨서.”
“뭐가요?”
“아무것도 아니야.”
국왕은 율리아에게 준남작 작위를 준다고 했다.
의사의 추측은 정확했다. 세습 불가능한 반쪽짜리 귀족 작위. 국왕과 샤트린은 그 정도면 괜찮은 대가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우스웠다. 고작 그 정도로 자신이 만족하리라고 생각했다는 게.
“트루디.”
“네?”
“왕궁 마차를 불러 줄래. 국왕께 갈 거라고.”
“국왕께…… 본궁이요?”
“그래.”
트루디가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아무 말 없이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인데, 어차피 곧 알게 될 것이다.
율리아는 지난번 국왕에게 끌려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아한 드레스에 허리띠를 매고, 머리카락을 땋아 내렸다.
“시녀님, 마차가 준비됐어요!”
“다녀올게.”
왕자궁을 나서는 율리아의 뒤로 많은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녀를 믿고 의지하는 왕자궁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국왕은 율리아의 알현 신청을 무시했다.
이번 일에 큰 공을 세웠다고는 하나, 국왕은 일개 평민 시녀가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조람 후작과의 신경전으로 아프지 않은 날이 없다더니, 어쩌면 몸져누웠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율리아는 예상했다는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었던지라.”
“전하께서는 몹시 바쁘십니다.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보좌관을 통해 전해 드리기는 하겠습니다.”
율리아를 상대하고 있는 건 보좌관도 아니고, 일개 시종이었다. 율리아는 그에게조차 공손히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국왕 전하께서 약속해 주신 모든 호의에 감읍하고 있으나, 감히 귀족의 작위만은 받을 수 없다고 아뢰어 주세요.”
“예?”
“저는 레위시아 왕자 전하의 시녀입니다.”
시종은 율리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더 설명해 주지 않고 담백하게 등을 돌렸다.
본궁을 떠나는 율리아의 발걸음이 빨랐다. 그녀는 마차에 오르자마자 마부에게 왕자궁으로 돌아가 달라고 말했다. 그러곤 마차 의자에 기대앉아 주의를 기울였다.
“잠시만요!”
마차가 방향을 돌려 왕자궁으로 출발하려던 순간, 아까 그 시종이 달려 나와 율리아를 잡았다.
“율리아 시녀!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당황한 마부가 다급하게 고삐를 잡아당겼다.
마차 문이 열렸다.
“시녀님, 내리시지요. 전하께서 특별히 시간을 내주시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가실까요?”
율리아는 시종이 내민 손을 잡고 다시 본궁 정원에 발을 내디뎠다.
정원을 지나 복도를 걷는 동안 시종은 국왕이 바쁜 와중에도 알현을 허락해 준 게 얼마나 감격할 만한 일인지 떠들었다.
율리아는 그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면서 걸었다. 알현실이 가까워질수록 기세 삼엄한 왕실 기사와 늙은 보좌관들의 모습이 보였다.
“전하, 왕자궁의 수석 시녀입니다.”
“들어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