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화 (183/319)

161화

그가 일을 시작하겠다며 서둘러 돌아간 뒤, 율리아는 달빛 가득한 창가를 거닐었다.

유난히 달이 밝은 밤이었다. 촛불도 없는 방에 그림자가 졌다.

트루디가 없어 등잔불이 꺼져 있는 줄도 몰랐다. 율리아는 방을 돌아다니며 손수 촛불을 켰다.

왕실 기사들이 그녀의 방을 얼마나 공들여 뒤졌는지 멀쩡한 곳이 없었다. 가구는 여기저기 망가졌고, 바닥과 벽지가 뜯어져 흉물스러웠다.

내일은 망가진 가구부터 버리고 방을 새로 단장해야 할 것 같았다. 청소만으론 본래의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겨울이니까 두꺼운 커튼을 달고, 고무나무로 만든 가구를 들여야지. 바닥은 기술자들에게 맡기고 그 위에 카펫을 깔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율리아는 언젠가 마조람 후작 저택에서 봤던 크리스틴의 방을 떠올렸다.

새하얀 가구와 색색의 커튼이 겹겹이 휘날리는 창문. 발코니엔 대리석 조각이 장식되어 있고, 수십 개의 촛불 장식이 방 전체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크리스틴은 그 안에서 왕족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보석이 너무 많아 뭐가 있는지도 몰랐다. 드레스는 한 번 입으면 질린다며 다시 쳐다보지도 않았다.

유행하는 신발은 모두 사 모았으며, 읽지도 않을 고서를 고집스럽게 수집했다. 그게 귀족 영애의 우아한 취미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틴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그건 사실 크리스틴이 아니라 율리아의 취미였다.

가난했던 그녀는 비싼 책을 읽기 위해 크리스틴을 이용했다.

율리아는 보고 싶은 책이 있을 때마다 크리스틴에게 넌지시 속삭였다. 학자들이, 귀족들이 그 책을 구하고 있다더라. 그러면 크리스틴은 명예라고 포장된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그 책을 샀다.

“멍청이.”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으스대던 꼴이 우스웠다.

그러고 보면 크리스틴이 했던 말이 아예 틀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천박한 평민, 더러운 사기꾼, 악랄한 배신자.”

상관없었다. 착하게 살고 싶었으면 복수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다. 용서보다 위대한 복수는 없다는 가식적인 말로 자기 위로나 했겠지.

아홉 번을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고, 의도했던가.

크리스틴, 네 말대로 나는 끔찍하고 사악한 영혼을 가졌을 거야. 그래도 난 너처럼 정의로운 척하면서 역겹게 굴지는 않았어.

나중에 또 단둘이 한 공간에 있게 된다면, 그때는 꼭 말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크리스틴이 얼마나 하찮은 상대였는지.

‘너를 사냥하려고 놓은 덫이 아니라는 걸. 그만한 가치도 없으면서. 넌 그냥 미끼였을 뿐이야.’

후작 부인이라는 괴물을 사로잡기 위한 덫.

크리스틴은 그 위에 놓인 작은 치즈 조각일 뿐이었다.

* * *

맥스웰은 율리아를 만난 뒤 자신이 오르테가에서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인원을 동원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카루스에게 허락을 구한 뒤 바바슬로프와 함께 직접 몸을 움직였다.

“고작 한 놈 감시하는 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바바슬로프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후작가의 집사는 후작 저택 밖으로 나오지 않는 자였다. 그러니 대충 첩자나 두어 명 심어 놓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맥스웰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바보야. 그러니까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집사 놈이 안에서 안 나오니까, 나오는 모든 사람을 감시해야 할 거 아냐.”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저 큰 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는데…….”

거기까지 말했던 바바슬로프가 뭔가를 깨달았는지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맞다! 왕한테 감시당하고 있지!”

“그래, 인마. 평소 같았으면 어려웠을 텐데…… 시녀님이 작전을 기가 막히게 짠 덕분에 후작 저택이 국왕의 감시를 받고 있어. 함부로 외출도 못 한다고.”

그건 저택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왕이 보낸 병사들이 저택을 둘러싸고 철저하게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크리스틴의 재판이 끝날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지금은 첩자를 넣을 수 없는 대신, 안에서 나오는 놈들을 감시하기에도 딱 좋은 시기야.”

어떤 방식이 될지 모른다. 집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연락책이 될 수 있었다. 하녀나 일꾼, 병사, 혹은 귀족일 수도 있었다.

후작 부인은 음흉한 사람이다. 그러니 집사도 비슷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것이다.

맥스웰은 오르테가에서 그림자 정보 상인으로 잔뼈가 굵은 사내였다. 그의 머릿속에 온갖 정보들이 떠다녔다. 후작 부인은, 그녀의 수족인 집사는 어떤 식으로 왕가의 후손을 옮기려 할 것인가.

“맥스웰 님.”

마조람 저택을 감시하던 병사 하나가 은밀히 움직여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맥스웰에게 여러 사람의 인적사항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오늘 출입한 자들의 명단입니다.”

“감시는?”

“모두 붙여 두었는데, 대부분 평소와 다름없었다고 합니다.”

“알았으니까 가 봐. 계속 지켜보고.”

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맥스웰이 빠르게 명단을 훑었다. 이름과 나이, 직업, 후작과의 관계, 주소와 출입 기록까지.

“흠.”

그때, 그의 곁에서 머리를 쭉 내밀고 명단을 읽던 바바슬로프가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이거 바이칸에서 쓰는 작명법 아니냐?”

“어?”

“시골에서 아직도 쓰잖아. 애들 이름 지을 때 태어난 장소랑 날짜에 해당하는 글자 섞는 거. 내 이름도 이런 식인데?”

바바슬로프의 이름은 ‘바례프의 집에서 가을에 태어난 사내아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그걸 설명하면서 종이에 적힌 어떤 이의 이름을 지목했다.

맥스웰이 생각지도 못했다며 턱을 매만졌다.

“오호라……. 그러고 보니?”

“넌 인마, 아무리 오르테가에서 오래 살았기로서니 바이칸에 대한 건 다 잊어버렸냐?”

“난 도시에서 태어났거든. 너 같은 촌놈 이름이 어떻게 지어지는지 알게 뭐냐.”

“이 새끼가…….”

바바슬로프가 맥스웰의 눈앞에서 주먹을 휘둘렀다.

이후 두 사람은 매수한 병사가 가져오는 명단을 바탕으로 추적을 이어 나갔다. 대부분은 상인과 일꾼이었으나, 가끔 가까운 귀족들이 방문하기도 했다.

맥스웰은 그들 중 한 상인이 의심스럽다고 했다.

상인이 판매하는 건 각종 사치품이었는데, 크리스틴이 투옥되고 국왕이 눈에 불을 켜고 후작 저택을 감시하고 있는 지금, 철없이 사치나 부릴 사람은 저택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침 그 상인의 이름이 제국식 작명법을 따르고 있었다.

노련한 정보 상인의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맥스웰은 얼마 전 율리아와 대화할 때 마조람 후작 부인이 왕가의 후손을 국경으로 빼돌린 것 같다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바이칸인가.’

그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왕가의 후손이 오르테가 안에 있다면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감출 수 없었으리라.

게다가 지금쯤이면 아이가 태어났을 텐데, 갓 태어난 아이와 산모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자식인 거 같다.”

맥스웰이 중얼거렸다.

그는 바바슬로프와 함께 그 상인을 추적했다. 상인의 주변인과 행적, 그리고 그가 취급하는 물품이 어디로 오가는지 그 모든 경로를 뒤졌다.

그러다 그가 오르테가 북쪽 국경을 통해 값비싼 암염을 들여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벽에 소금을 가져오라며 갑작스레 일꾼을 파견했다는 것도.

“북쪽 국경?”

바바슬로프가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티타니아 산맥을 말하는 건가? 우리가 율리아를 처음 만났던 곳.”

“암염은 귀하니까 배로 들여오지 않거든.”

“국경 어디서 넘어오는데?”

“산맥 너머에 있는 바이칸 국경 도시.”

바바슬로프가 멀리 산맥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그곳에 간다면 얼마나 걸릴지 계산해 보았다.

“얼마나 빨리 찾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국왕이 그동안 버텨 줄까? 그사이에 마조람 후작이 무력으로 왕궁을 치면 어떡하냐.”

“그것도 못 막으면 그냥 왕좌에서 내려오라고 해.”

이날 맥스웰이 부하 몇 명과 바바슬로프를 데리고 국경 산맥으로 떠났다. 얼마나 급하게 출발했는지 율리아에게 직접 보고도 하지 못했다.

율리아는 그들이 단서를 찾았고, 그걸 쫓아 극비리에 움직였다는 사실을 며칠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 * *

이른 아침이었다. 밤사이 난로가 꺼져 공기가 추웠다. 아무래도 더 두꺼운 이불을 덮어야 할 모양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율리아가 가운을 걸치며 슬리퍼를 찾았다.

“일어나셨어요? 제가 장작을 좀 더 넣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내일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싹싹하고 야무진 목소리가 들렸다. 율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트루디가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끼더니, 밤사이 꺼진 난로에 불쏘시개를 올리고 장작을 넣었다. 그러곤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등잔불에 불을 밝혔다.

율리아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트루디를 바라보았다.

“…….”

“해가 이렇게 늦게 뜨는 걸 보니까 겨울은 겨울인가 봐요. 뜨거운 물은 받아 놨는데, 제가 먼저 식당에 내려가서 식사 준비를 부탁할까요?”

“트루디.”

“네, 시녀님!”

율리아가 물었다.

“왜 돌아왔어?”

트루디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장갑을 벗어 손에 쥐고, 꼬물꼬물 움직이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아마도 말을 고르느라 그러는 것 같았다.

일 잘하고 눈치 빠른 하녀였지만 신중함과는 거리가 좀 있었는데. 율리아가 속으로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걸로는 부족해?”

“네?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돌아왔어. 멀리 떠나서 행복하게 사는 편이 좋았을 텐데.”

“저…… 율리아 시녀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그래.”

율리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운을 여미며 트루디가 불씨를 키워 놓은 난로 앞에 섰다.

금방 일어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또렷한 율리아의 눈을 보면서, 트루디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시녀님은 귀족이 되려 하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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