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같은 날 늦은 밤 마조람 후작 부인이 크리스틴이 갇혀 있는 감옥을 찾았다.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왕의 엄명이 있었으나, 병사들은 후작 부인이 내민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보곤 슬그머니 문을 열어 주었다.
후작 부인은 크리스틴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건넸다.
절대 아무것도 자백해서는 안 된다고, 누가 어떤 증거를 들이밀어도 모른다고 잡아떼야 한다고, 가문에서 반드시 널 구해 낼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던 크리스틴이 후작 부인에게 물었다.
“어머니, 왕가의 후손을 넘기기로 했어요?”
“뭐라고? 크리스틴, 그게 무슨 말이니?”
“저를 살려 주실 거죠? 왕가의 후손이 아니라, 저를 선택하실 거잖아요. 저는 어머니의 딸이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가 너한테 그딴 소리를 지껄였어? 왕가의 후손이라니, 거짓말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 크리스틴. 넌 속은 거야.”
후작 부인은 딸에게조차 그 비밀을 공유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곳은 왕궁 감옥이었다. 어디에서 어떻게 말이 새어 나갈지 알 수 없으니 뒤늦게나마 설명해 줄 수도 없었다.
그런데 크리스틴이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어머니가 데려갔잖아요. 그 여자. 그 여자가 낳은 왕가의 후손을 몰래 숨겨 놓고, 아니라고 잡아뗄 셈이에요? 저는 이제 죽게 생겼는데…… 그 아이가 더 중요한 거예요?”
“크리스틴!”
“저는 도대체 뭐예요?”
마조람의 보석, 후작가의 공주님.
크리스틴 마조람은 후작 부부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귀한 딸이었다. 그녀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후작 부부의 묵인 아래 왕족처럼 살았다.
“전 이제…… 버림받는 거예요?”
크리스틴이 울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우는 줄도 모르고 울었다.
감옥이 너무 추웠다. 이곳이 아무리 귀족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 해도, 자신의 침실과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녀는 두 팔로 제 몸을 끌어안았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찬기가 팔다리를 타고 심장까지 올라왔다. 이대로 얼어 죽을 것만 같아, 크리스틴은 제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 * *
왕자궁으로 돌아온 율리아가 트루디를 방으로 불렀다. 감옥에서 풀려나 제자리로 돌아온 트루디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시녀님, 부르셨어요?”
“괜찮아?”
“저는 괜찮아요. 그냥 감옥에 갇혀 있었을 뿐인데요. 고문을 당한 것도 아니고.”
“많이 무서웠을 텐데.”
“그 정도 각오는 했어요.”
트루디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재빨리 대답했다.
그녀는 이제부터 율리아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언젠가 열렬히 첫사랑에 빠진대도 이렇게 심장이 나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긴장한 어깨가 아팠다. 트루디는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자세로 율리아 앞에 섰다.
율리아가 트루디에게 웬 주소가 적힌 종이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여관 주소.”
“여관이요?”
“그래, 네가 공주궁 하녀를 꾀어낼 때 약속 장소로 지목했던 그 여관. 트루디 네 이름으로 방이 예약되어 있을 거야. 가서 침대 밑을 봐.”
거기에 금화가 가득 찬 상자가 있을 것이다.
“국왕 전하께서 한동안 해적의 금화를 강력하게 단속할 예정이니까 당분간은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혹시 환전하고 싶어지면 나나 코코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되고.”
“어…… 정말…… 정말이요?”
“그래, 네 거야.”
트루디가 두 손을 벌벌 떨면서 종이를 받아 쥐었다.
별에 손이 닿았다.
너무 가난해서 부둣가 뒷골목에서 구걸이나 하면서 살았던 소녀. 남의 것을 훔치는 게 왜 나쁜지조차 이해하지 못할 만큼 결핍으로 가득했던 트루디의 영혼이 황금빛에 물들었다.
율리아가 트루디에게 준 건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을 만큼 거액의 돈이었다. 이제부터 평생 놀고먹을 수도 있었다.
“그동안 수고했어.”
율리아가 담백하게 말했다.
이렇게 큰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면서,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어요? 트루디는 쏟아질 것 같은 말을 입에 물고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목숨을 건 도박을 했던 건 사실이다. 무섭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다. 처음 감옥으로 끌려갔을 때, 트루디는 그 안에서 온갖 고문과 사형법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울음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무서웠다.
다만 트루디는 궁내부 관리보다 율리아가 더 무서웠다.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믿었다.
이 싸움의 승자는 우리 시녀님일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제 거예요?”
“그래.”
“저 이제…… 부자예요?”
상상했던 것처럼 웃음이 터지지는 않았다. 미친년처럼 춤이라도 출 줄 알았는데, 심장이 쿵쿵 뛴다는 걸 제외하면 그저 그랬다.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트루디가 종이를 꽉 움켜쥐고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시녀님, 저……!”
“가 봐.”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졌다. 트루디는 다다닥 발소리가 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율리아의 방에서 뛰쳐나갔다. 복도에서 마주친 하녀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트루디를 바라보았다.
“트루디, 어디 가?”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트루디는 하녀복을 펄럭이며 왕자궁 밖으로 달렸다. 그러곤 이내 왕궁 밖으로 나가 제일 먼저 보이는 마차를 잡아탔다.
“동쪽 부두로 가주세요!”
바닷가 여관으로 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놀러 갈 때는 한없이 짧게 느껴지던 길이, 꼭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아저씨, 빨리요. 빨리!”
“어이구, 요즘 분위기 살벌해서 그렇게 막 달리면 안 돼. 거리에 병사들이 쫙 깔렸다고.”
해적의 금화를 단속하면서 마조람 후작과 그 세력을 압박하기 위해 왕명을 받은 병사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그래도 빨리…… 조금만 더 빨리요.”
트루디는 두 손을 모은 채 발을 동동 굴렀다.
바깥 분위기는 살벌한데, 마차 안의 트루디에겐 웅성거리는 소음조차 천국의 노래처럼 들렸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설렘과 불안이 널뛰듯이 오락가락 마음을 흔들었다.
‘난 이제 부자야.’
여관에 도착했을 때는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트루디는 율리아가 준 종이를 꽉 쥔 채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안에서 문을 잠그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침대 밑에 상자가 있었다.
상자를 여는 느낌이 낯설었다. 묵직한 상자 뚜껑이 오늘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등불도 켜지 않은 컴컴한 방 안에서 달빛에 의지한 채, 트루디는 상자를 가득 채우고 있는 금화를 보았다.
무섭고 기쁘고 가슴 벅찼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런 순간을 운명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트루디가 두 팔을 벌려 상자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곧 그녀는 그 많은 금화를 끌어안고도 감옥에 갇혀 있을 때보다 더 큰 두려움과 마주했다.
그녀는 이 많은 금화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
마조람 후작 부인이 크리스틴이 갇혀 있는 감옥을 다녀갔다. 문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알렉사에게, 알렉사가 율리아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병사들은 마조람 후작 부인과 크리스틴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듣지 못했다고 미안해했다. 다만 감옥을 나서는 후작 부인의 표정이 몹시 굳어 있었고, 안에서 크리스틴이 절규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율리아는 일이 모두 계획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르셨습니까?”
늦은 밤 맥스웰이 왕자궁을 찾았다. 율리아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후작 부인이 미끼를 물었어요.”
“정말입니까?”
“맥스웰, 지금부터가 아주 중요해요.”
크리스틴을 비롯해 마조람 후작 부인, 국왕과 샤트린까지. 율리아는 이번 일을 계획하면서 그 모든 사람을 속였다.
크리스틴은 율리아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샤트린을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 사실을 미리 눈치챈 율리아가 샤트린과 손을 잡고 크리스틴을 역으로 함정에 빠뜨렸다.
크리스틴은 율리아가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이 모든 일을 꾸몄다고 착각했다.
진짜 함정은 거기에 있었다.
“마조람 후작 부인이 왕가의 후손을 감춰 놓은 장소를 옮기려고 할 거예요. 크리스틴을 통해 누군가 그 사실을 알고 있고, 추적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허허, 그럼 이제 후작 부인을 감시하면 됩니까?”
맥스웰이 감탄하며 묻자, 율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집사를 감시하세요.”
“집사요?”
“마조람 후작 부인은 바실리나 크리스틴보다도 그 집사를 신뢰해요. 부인의 그림자로 움직이며 가문의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건 집사의 몫이거든요.”
율리아를 죽이기 위해 하이에나를 불러들인 것도 그 집사였다.
“하……. 진짜 징글징글한 놈들이네요.”
“후작 부인은 혹시 모를 감시의 눈을 피해 후작과 함께 공개적으로 움직일 거예요. 그사이에 집사가 왕가의 후손을 빼돌릴 거고요.”
“집사도 직접 손을 쓰려고 하진 않겠네요?”
“네, 그래서 집사의 행적과 주변 사람을 모두 주시해야 해요. 편지, 심부름꾼, 하다못해 그가 만나고 말을 섞는 모든 사람.”
“그런 거라면 맡겨 두시죠. 제가 오르테가에서 지난 10년간 해 온 일이 바로 그거거든요.”
맥스웰이 호언장담했다.
애초에 이번 사건은 크리스틴을 잡기 위한 함정이 아니었다.
크리스틴은 처형장에서 율리아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널 꼭 죽이고 말 거라고 협박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율리아는 치료를 목적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이 모든 일을 계획했다. 그러니까 이게 다 너 때문이라는 말은 크리스틴이 아니라 율리아가 해야 하는 것이었다.
“부탁해요. 마조람 후작 부인이 왕가의 후손을 빼돌려 감금하고 있다는 증거만 있으면, 크리스틴이 아니라 더 큰 사냥감을 쓰러뜨릴 수 있어요.”
맥스웰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