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81/319)

159화

* * *

감옥 문이 열렸다.

귀족을 위한 호화로운 감옥이 눈에 들어왔다.

오물 가득한 돌바닥에 차가운 쇠창살을 기대했는데, 그냥 평범한 방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보육원 아이들이 단체로 잠자는 방보다 훨씬 좋은 공간이었다.

침대는 작고 소박했으나 두툼한 이불이 있었고, 안쪽엔 작은 화장실까지 딸려 있었다.

“고맙습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문을 열어 준 병사들이 율리아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문밖에선 알렉사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율리아는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러곤 침대 위에 온몸을 웅크린 채 누워 있는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크리스틴.”

크리스틴은 대답하지 않았다. 방에 들어온 사람이 율리아라는 걸 알 텐데, 고개도 돌리지 않고 시체처럼 누워 있기만 했다.

율리아가 중얼거렸다.

“안쓰럽게 됐네.”

거짓말이다. 안쓰럽지 않았다. 불쌍하지도 않았다. 율리아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그래야 크리스틴이 발작할 거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누워 있던 크리스틴이 이불을 집어 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닥치고 나가.”

“싫은데.”

“나가라고 했어! 너 도대체 여긴 왜 온 거야?”

그야 할 말이 있으니까.

“고마워, 크리스틴. 네 덕분에 난 곧 귀족이 될 것 같거든. 왕께서 내게 작위를 약속하셨어.”

크리스틴이 경악한 얼굴로 율리아를 노려보았다.

“뭐…… 작위? 이 미친…….”

“말조심해. 넌 이제 귀족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는데, 나한테 그렇게 건방지게 굴면 안 되지.”

율리아가 우아하게 걸어와 크리스틴 앞에 섰다. 그러곤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널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봐. 그리고 빌어. 귀하신 분, 제발 도와주세요. 며칠째 굶고 있거든요. 이렇게 말해 봐.”

“미친…… 미친!”

“혹시 모르잖아. 내가 네 목숨을 구해 주고 싶어질지도.”

크리스틴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독약을 쓴 것도, 그걸 들킨 것도, 이렇게 감옥에 갇힌 채 율리아에게 조롱당하고 있다는 것도.

아카데미 졸업 자격이 취소되고 바실리의 생존을 외면했을 때, 크리스틴은 자신에게 더 떨어질 곳은 없으리라 여겼다. 그때 그녀가 서 있는 곳이 지옥의 밑바닥이었다.

그런데 더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도 없는 암흑 속으로.

율리아는 초라해 보이는 크리스틴의 모습을 눈에 새겼다.

비쩍 말라 신경질적인 얼굴, 깊이 그늘진 눈매. 입술의 생기는 다 어디로 갔는지 허연 껍질이 일어나 있고, 자신감 넘치던 목소리엔 우울한 떨림이 느껴졌다.

첫 번째, 두 번째 삶의 율리아도 저랬을까.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반추해 보았다.

바실리의 배신과 끔찍했던 죽음. 동경했던 사람들의 민낯을 목격한 뒤, 율리아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귀족이 되고 싶었다. 저 빛나는 세계에 살고 싶었다.

크리스틴과 바실리, 후작 부부에게만 허락된 세상. 빛과 금, 명예와 아량으로 가득 찬 곳.

하지만 그곳은 율리아가 살던 시궁창보다 더한 지옥이었다.

배신과 죽음이 난무하고, 금이 칼보다 무서우며, 인간은 한낱 도구로 소모되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후작가의 비리 장부를 조작하면서도, 율리아는 언젠가 진짜 명예로운 곳으로 올라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다 착각이었다.

“크리스틴.”

방은 좁았으나 두 사람의 대화가 새어 나갈 걱정은 없어 보였다. 율리아는 크리스틴을 떠올릴 때마다 때때로 궁금했던 점을 이번 기회에 물어보기로 했다.

“너희 가문에서 내게 하이에나를 보냈고 바실리가 날 배신했다는 걸 알았을 때, 기분이 어땠어?”

“뭐? 지금 그런 게 중요해?”

“대답해 봐. 그때 기분이 어땠는지.”

“몰라.”

“안타까웠어? 불쌍했다거나. 혹은…… 기뻤어? 골치 아픈 경쟁자가 사라져서, 언젠가 네 치부를 밝힐지도 모르는 평민이 죽게 돼서 안심했어?”

“몰라! 모른다고 했잖아!”

“왜 몰라. 네 마음인데.”

율리아가 크리스틴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곤 침대에 앉아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난 기뻤는데.”

기뻤다.

크리스틴이 뒤집어쓰고 있던 그 얄팍한 가면을 벗겼을 때, 훈장을 빼앗았을 때, 벼랑 끝으로 몰았을 때, 그리고 이렇게 내려다보게 되었을 때.

율리아는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크리스틴이 괴로워해서 기뻤다. 상처받고 무너져서 즐거웠다. 저 높은 곳에서 공주님처럼 떠받들어져 살았으면서 뭐든지 다 아는 것처럼 건방지게 굴던 걸 생각하면 속이 뒤집혔다.

“크리스틴, 너한텐 지금 이 모습이 딱 어울려.”

율리아가 비웃자, 크리스틴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닥쳐! 넌 천박한 평민이야. 더러운 사기꾼이야! 악랄한 배신자야!”

율리아도 그대로 돌려주었다.

“넌 추잡한 위선자야. 오만한데 멍청하기까지 한 계집애고. 이제는 간사한 반역자이기도 해.”

“뭐…… 뭐?”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어 본 적 없던 크리스틴이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목 아래 깊은 곳에서 뜨겁고 미끌미끌한 기운이 울컥울컥 솟아올랐다. 토악질이 나서 괴로웠다.

할 수만 있다면 율리아를 죽이고 싶었다. 정말로 죽이고 싶었다.

아니, 그들은 애초에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 비루한 보육원과 굶주린 율리아를 보면서 불쌍하다고 연민을 느꼈던 과거의 자신이 미웠다.

“널 진작…….”

“죽였어야 했지.”

하지만 실패했다.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크리스틴,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말이야. 너 같은 애가 나 같은 애를 죽이려다 실패하잖아? 그럼 죽지 않고 살아난 나는 사력을 다해서 너를 죽여야만 하는 거야.”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공정하지 않은 싸움을 했지.”

마조람 후작 가문의 귀한 아가씨와 평민 고아. 두 사람의 위치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크리스틴을 내려다보던 율리아가 노래하듯 속삭였다.

“내가 이제 공정하게 만들어 줄게.”

내가 올라가거나, 너를 끌어내려서.

국왕은 율리아에게 작위를 제안했다. 샤트린의 입김이 닿은 결과일 것이다. 그녀가 원한다면 누군가의 양녀가 되거나 결혼하지 않아도 ‘아르테’라는 성을 오르테가 귀족 계보에 올릴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반역을 저지른 것으로 최종 판결이 나면 크리스틴은 작위는커녕 신분을 박탈당하고 목숨까지 잃게 될 것이다.

“뭐가 공정해.”

“공정하지. 처지가 바뀌는 건데.”

율리아가 몸을 숙여 크리스틴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러곤 평소 크리스틴이 자주 쓰던 말투를 똑같이 흉내 내며 말했다.

“세상에, 불쌍한 것 좀 봐. 굶었나 봐. 왜 이렇게 마른 거야? 보기 흉해라. 이 애들은 부모가 없어? 왜 이러고 살아? 평민은 다 이런 거야?”

“닥쳐……. 닥쳐, 율리아.”

“넌 이런 거 먹어 본 적 없지? 음, 어디 가서 자랑하고 다니지는 마. 평민들은 질투심이 심하다고 들었거든. 넌 못 먹고 살아서 그런가, 왜 그렇게 식탐이 많니? 음식을 그렇게 빨리 먹으면 어떡해.”

“닥쳐! 닥치라고!”

“어머니가 너한테 내 대리 시험을 맡겼다고 들었어. 그렇다고 너무 기고만장하지 않는 게 좋을걸? 난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너처럼 공부만 하고 있을 수 없거든. 귀족의 의무지. 넌 모르겠지만.”

“시끄러워!”

크리스틴이 율리아를 거세게 밀었다. 광장에서처럼, 두 손으로 있는 힘껏 밀치고 벌떡 일어섰다.

“그만해! 이제 끝난 싸움 아냐? 내가 졌어, 내가 졌다고! 사형장까지 따라와서 옛날 얘길 늘어놓을 거야? 어차피 난 너 때문에 반역자가 됐는데!”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당연히 너 때문이지.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겠어. 난 샤트린 공주를 미워하지도 않았는데. 그러니까…… 이건 다…… 너 때문이잖아. 네 탓이야. 네 탓이라고! 네가 아니었으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야!”

중얼거리다가 소리치기를 반복하는 크리스틴을 응시하며, 율리아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크리스틴, 난 후작 부인에게 말할 거야.”

율리아의 목소리가 좁은 방에 가득했다. 크리스틴의 앞에서, 뒤에서, 머리 위에서 들렸다.

“딸을 살리고 싶거든 왕가의 후손을 내놓으라고.”

“뭐……?”

“하나뿐인 딸과 왕가의 후손. 마조람의 실세인 후작 부인은 누구를 선택할까? 크리스틴, 넌 어떻게 생각해?”

“왕가의 후손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모르는 척하지 마. 죽은 1왕자의 아이, 너희 가문에서 숨기고 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그런…… 억지가 어딨어. 난 모르는 일이야.”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지 마. 후작 부인이 그럴 거라는 걸 딸인 네가 예상하지 못했으면 그것도 죄야.”

크리스틴은 대답하지 못했다. 율리아의 말에 휘둘리고 싶지 않은데, 그럴 수 없으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쪽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굳은 얼굴과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율리아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넌 졌어.”

그러곤 등을 돌려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긴 적도 없고.”

크리스틴은 반박하지 못했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이제 어떻게 하나. 율리아가 귀족이 되어 버리면, 뭐 하나 잘난 것 없는 자신이 신분으로도 우월감을 느낄 수 없게 되면.

그땐 어떡하나.

“아…… 아아!”

혼자 남은 크리스틴이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밖으로 나온 율리아가 알렉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알렉사가 병사들에게 잘 부탁한다며 몇 마디 귓속말을 건넸다.

병사들은 별것도 아닌 일이라며 호탕하게 웃었고, 두 사람은 왔던 길을 걸어 왕자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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