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8-2화 (180/319)

31.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율리아는 본궁에 감금돼 있었다.

그녀는 평온해 보이는 얼굴로 구겨진 드레스를 탁탁 털어 펴더니 방 안을 여유롭게 거닐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본궁 앞을 바삐 오가는 기사들이 보였다. 하나 같이 다급하고 살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괜찮아.’

율리아는 멍든 팔을 주무르며 되뇌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율리아가 왕과 대화를 나눈 이후, 해독제를 다 토해 낸 샤트린이 본궁을 찾았다.

애초에 율리아가 샤트린에게 먹인 건 중독 환자에게 급하게 쓰는 해독제였다. 궁내부 관리가 준 진짜 독약은 트루디의 숙소에 잘 보관되어 있다가 왕의 손으로 넘어갔고, 샤트린은 먹은 음식을 다 토한 뒤에 기력을 회복하자마자 왕을 찾았다.

그사이 몇 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공주궁 하녀가 대가로 받은 건 해적의 금화였고, 진짜 독약은 트루디의 숙소에 뜯지도 않은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궁내부 관리의 사무실 금고에선 하녀가 받은 것과 똑같은 해적의 금화가 상당량 발견되기도 했다.

물론 이 모든 건 율리아가 꾸민 일이었다.

트루디는 궁내부 관리가 부르기 전부터 율리아에게 미리 언질을 받은 상태였다. 그녀는 왕자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율리아의 방으로 달려가 금고를 열고, 주머니 속 금화를 해적의 금화로 바꿔치기했다.

코코가 모든 일을 주도했다. 율리아의 금고는 곧바로 치워졌으며, 독약도 해독제로 바꾸었다.

트루디가 공주궁 하녀에게 일을 의뢰하는 사이, 코코는 궁내부 관리의 사무실에 해적의 금화를 가져다 놓았다.

코코가 관리하던 왕궁 내 첩자들이 큰 역할을 했다. 맥스웰이 봄부터 왕궁에 심어 두었던 첩자들이 율리아의 통해 코코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그들은 인심 후한 고용주를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이거 놓으십시오! 억울합니다!”

궁내부 관리가 끌려오고 있었다. 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통에 본궁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율리아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에게 향했다.

트루디는 율리아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 탐욕스러운 아이는 결국 돈을 더 많이 주는 고용주를 위해 일하게 되어 있었다. 율리아는 저 궁내부 관리가 트루디에게 저보다 더 많은 대가를 제시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카루스의 관저에 있던 율리아가 샤트린을 만나기 위해 왕궁에 들어왔던 날이었다.

“시녀님, 이게 도움이 될까요?”

“그게 뭔데?”

“제가 그동안 궁내부에 불려 갈 때마다 날짜와 시간, 했던 이야기를 적어 놓은 수첩이에요. 처음엔 이런 걸 쓸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그 관리가 매번 이만한 수첩을 꺼내 놓고 제가 하는 말을 받아 적더라고요.”

“그래?”

“그래서 저도 최대한 기억하고 있다가 숙소로 돌아와서 똑같이 적었는데…….”

“트루디.”

“네?”

“그 궁내부 관리가 가지고 있다던 수첩, 그걸 찾게 해 줄래?”

“제가요?”

“그래, 그럼 내가 전에 약속했던 걸 줄게.”

트루디는 숨도 쉬지 못하고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전에 했던 약속. 그건 율리아의 침대 밑에 있는 금화로 가득 찬 상자였다. 트루디에겐 저 하늘의 별처럼 느껴지던, 손 닿을 수 없는 꿈.

율리아가 그걸 주겠다고 했다.

트루디는 바보가 아니었다. 일이 잘못되면 하녀인 자신의 목숨이 파리처럼 짓이겨질 거란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것도 알았다.

율리아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도.

궁내부 관리에게 독약을 건네받았던 날, 트루디는 그가 금화 주머니를 꺼내던 서랍을 눈여겨보았다. 수상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덥석 받지 않고 머뭇거리는 척하기도 했다.

궁내부 관리가 트루디의 손에 주머니를 억지로 쥐여 주려 몸을 숙인 순간, 그녀는 원하는 걸 찾을 수 있었다.

서랍 안에 수첩이 있었다. 끄트머리만 보였지만, 그가 늘 무언가를 받아 적던 그 수첩이었다.

그걸 확인하고 돌아온 뒤에는 코코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코코는 궁내부 관리의 사무실에 해적의 금화를 가져다 놓으면서 그 수첩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건 그가 자백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한 보험이었으며, 이 일을 마조람 후작가와 연결 지을 증거이기도 했다.

크리스틴은 반드시 제가 판 함정에 빠지게 되어 있었다.

‘빠져나갈 수 없을걸.’

이제부터는 왕의 역량에 맡겨야 한다.

사실 이건 도박이나 다름없는 계획이었다. 코코도 반대할 만큼 변수가 많았다.

크리스틴이 정말로 궁내부 관리를 이용할지, 트루디가 배신하지는 않을지, 공주궁 하녀가 뜻대로 움직여 줄지, 마조람 후작가에서 크리스틴을 버리는 패로 사용하지는 않을지.

그 모든 걸 감수하고도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실패해도 상관없었다.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샤트린에게 빚을 지워 두었으니까.

문제는 국왕이 얼마나 마음을 굳게 먹느냐였다.

해적의 금화는 결정적 증거로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건 오르테가의 귀족과 상인이라면 개나 소나 만지는 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을 벌어 줄 수는 있었다.

심문관이 진실을 밝혀낼 시간. 그리고 마조람 후작이 궁내부 관리를 죽여 이 일을 덮지 못하게 발목을 붙잡고 있을 시간.

“출발하라!”

왕의 기사들이 왕궁 밖으로 달려 나갔다. 오늘 아주 많은 병사가 동원될 것이다.

왕의 명령으로 마조람 후작가가 봉쇄되었다. 병사들이 거대한 저택을 둘러싸고 삼엄한 경계를 이어 갔다. 후작의 창고에서 발견된 해적의 금화가 샤트린을 독살하는 데 쓰였다는 게 이유였다.

마조람 후작은 거세게 반발했다. 그의 가신과 파벌 귀족들이 전부 들고일어나 국왕을 비난했다.

해적의 금화라니. 고작 그게 이유냐며, 이는 마조람을 쳐내려는 미친 왕의 폭정이라고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국왕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었던 적극적이고 강인한 왕의 모습을 보였다.

왕은 독약을 건넨 궁내부 관리가 수년간 마조람의 첩자로 왕궁 내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더욱 거세게 후작을 몰아붙였다. 그의 사무실에서 발견된 금화와 수첩, 그게 증거였다.

마조람 후작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후작가에 충성하는 누군가 저지른 일일 거라 발뺌했다.

국왕과 후작의 살벌한 기세 싸움이 이어졌다. 이는 어느 쪽도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었다. 왕가와 가문의 존속이 걸린 문제였으니까.

그리고 며칠 뒤, 지독한 고문 끝에 궁내부 관리가 독살을 사주한 자의 정체를 털어놓았다.

“크리스틴 마조람입니다.”

국왕은 곧바로 율리아와 왕자궁 모두에게 내려진 감금 명령을 거두었다.

왕이 선언했다. 앞으로 오르테가에서 해적의 금화를 유통하는 자는 해적과 내통한 죄를 물어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이는 암암리에 퍼져 있던 검은돈의 흐름을 막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반역자를 잡아 들여라!”

같은 날, 크리스틴 마조람이 반역자의 낙인을 쓴 채 투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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