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응접실 가득 숨 막히는 침묵이 들어찼다. 국왕과 그의 시종,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까지 율리아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왕이 의자에서 일어나 율리아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한낱 평민 시녀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 고작…… 시녀 따위가 어찌! 레위시아를 왕으로 만들고 싶어서 그리하였느냐? 네가 그 천한 신분으로도 왕궁에서 시녀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제는 왕의 자리까지 우스워 보이더냐? 말해 보아라!”
“아닙니다, 전하.”
“아니긴 뭐가 아니란 말이냐! 샤트린은 이 나라의 하나뿐인 공주다. 다음 대의 왕이 될 아이란 말이다! 왕의 후계자는 왕국의 명운을 짊어지는 자다. 한데 어찌, 어찌 너 따위가……!”
“샤트린 공주 전하께서는 무사하실 것입니다.”
“닥쳐라! 사지를 못 박아 화형대에 세워야 이실직고하겠느냐!”
분노에 잠식된 왕은 율리아를 윽박지르며 고함을 치는데, 정작 꿇어앉은 그녀는 한없이 차분해 보였다. 심지어 그녀의 목소리엔 흔들림조차 없었다.
“저는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끌고 나가라! 당장 끌고 나가서 자백을 받아내!”
왕의 시종과 기사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꿇어앉은 율리아를 이대로 감옥으로 끌고 가, 모든 사실을 자백할 때까지 심문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율리아가 국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 제 말을 들어 주세요. 그 잠깐의 시간만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이 자리에서 오늘 일의 주범을 밝혀 드릴 것입니다.”
“닥치라고 하지 않느냐.”
왕의 시종이 율리아를 일으키려 그녀의 팔을 잡았다. 멍든 팔이 아팠다. 긴 소매로 가리고 있지만, 그녀의 몸은 여전히 검붉은 멍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시간이 없었다. 율리아는 이마를 짚은 채 돌아서려는 왕을 후려치듯 큰 소리로 말했다.
“크리스틴 마조람입니다!”
왕의 시종이 팔을 놓쳤다. 기사들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국왕이 다시 율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아주 천천히 일그러졌다.
율리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크리스틴 마조람이 저와 왕자궁을 음해하기 위해 공작한 일입니다. 샤트린 전하는 무고한 피해자이며, 이 일의 주범은 제가 아니라 마조람의 후계자인 크리스틴입니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것이냐?”
“트루디에게 약병을 건넨 자는 궁내부 관리이며, 그는 마조람이 집어넣은 첩자로 수년째 궁내부에 기생하고 있습니다.”
“뭐?”
“전하, 저는 하녀를 이용해 공주 전하의 식사에 약을 섞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마조람의 첩자가 건넨 독약이 아니라, 비슷한 증상을 일으키는 해독제일 뿐입니다.”
그것 또한 죄라는 걸 안다. 그러니 치죄하시겠다면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다. 하지만 이 일의 주범은 크리스틴 마조람이며, 왕께서는 그 사실을 반드시 아셔야만 한다.
율리아의 말이 길어질수록 왕은 혼란스러워졌다.
믿을 수 없었다. 율리아 아르테는 출세하고자 왕궁에 들어온 겁 없는 평민이었다. 그리고 샤트린을 죽여 레위시아를 왕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용의가 있다.
그런 자가 잡혀 와 죽기 전에 내뱉는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왕이 그 사실을 지적하려던 순간이었다. 율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샤트린 전하는 곧 일어나실 겁니다. 지금 당장 의사를 보내 전하의 용태를 보고케 하세요.”
차분하다 못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에 떨림 없이 잔잔한 눈동자. 율리아는 왕국의 왕을 앞에 두고도 흔들림 없이 제 할 말을 다 했다.
“트루디의 방에서 찾은 약병은 궁내부 관리가 건넨 맹독으로, 샤트린 전하께서 드신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또한, 트루디가 공주궁 하녀에게 건넨 주머니엔 오르테가에서 유통이 금지된 해적의 금화가 섞여 있을 것입니다.”
왕이 더는 참지 못하고 짧은 시름을 내뱉었다.
“허.”
율리아가 꿇어앉은 무릎 앞에 두 손을 모았다. 그러곤 국왕을 향해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산호색 허리띠가 흘러내리며 옷감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조람의 야욕이 왕가에 닿아 있습니다. 레위시아 전하께 충성하는 시녀로서, 목숨을 걸고 탄원합니다. 존경하는 국왕 전하. 저들의 죄를 낱낱이 밝히시고, 감히 왕족을 해하려 한 죄를 물어 주십시오.”
“율리아 아르테.”
“감히 왕궁을 혼란에 빠뜨린 죄는 무엇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불규칙하게 오르내리던 왕의 호흡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는 말리는 시종을 손짓으로 물리치고, 머리를 조아린 율리아 앞에 섰다.
“무엇이든?”
“예, 전하.”
“목숨을 걸었다고 했느냐?”
“예, 전하.”
“만약 네가 한 말 중, 사실과 다른 것이 단 하나라도 존재한다면…….”
“제 목숨을 거두소서.”
율리아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목에서 쓴 물이 올라와 가슴이 쓰렸다. 깊게 심호흡한 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와 네 하녀, 너와 뜻을 함께한 자들이 전부 효수될 것이다.”
국왕의 목소리가 웅혼하게 울렸다.
왕실 기사단이 또 한 번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궁내부로 달려가 율리아가 지목한 궁내부 관리를 제압하고, 그의 사무실을 뒤집었다.
트루디가 공주궁 하녀에게 건넸다는 약병과 금화 주머니, 그리고 트루디의 방에서 발견된 약병과 금화, 마지막으로 궁내부 관리의 방에서 압수한 금화. 국왕에게 그 모든 증거가 전해졌다.
왕이 왕궁 의사들을 불러 약병을 하나씩 검사하라 명했을 때였다.
쓰러졌던 샤트린이 일어나, 아버지인 국왕을 찾았다.
* * *
샤트린 오르테가는 율리아 아르테에게 목숨을 빚졌다.
그 맹랑한 시녀는 해방군이 왕족을 습격하리라 예상하여 알렉사를 보내 샤트린을 지키게 했다. 그녀는 그 사실을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는 그 빚을 갚을 것이다. 샤트린은 왕족의 명예를 걸고 약속했다.
레위시아를 위해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압박하거나 왕국에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노라 다짐도 했다.
그게 이런 식이 될 줄은 몰랐지만.
깊은 밤 레위시아와 함께 샤트린의 궁을 찾은 율리아가 말했다.
“샤트린 전하, 저를 한 번만 더 믿어 주시겠어요?”
율리아는 샤트린이 해방군 주동자를 처형하던 광장에 나와 있었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크리스틴 마조람을 만났고, 미쳐 날뛰는 인파 속으로 밀쳐져 몸을 다쳤다.
샤트린은 율리아의 몸을 물들이고 있는 끔찍한 멍 자국을 보면서 몇 번이나 혀를 찼다. 마조람 영애가 그렇게까지 망가져 있을 줄은 몰랐다며, 목숨이 아깝다면 다시는 그렇게 무모하게 굴지 말라고 충고도 했다.
그런데 율리아는 그것으로 끝이 아닐 거라고 추측했다.
“마조람 후작 부인은 독을 잘 쓰기로 유명해요. 부인이 지금까지 식중독으로 위장해 죽인 사람의 수가 열 손가락을 넘죠. 크리스틴은 분명 저와 공주 전하, 둘 중 하나를 독살하려 할 거예요.”
죽이려면 너를 죽이지, 왜 자신이 거기에 껴야 하느냐고 비웃었다. 그런데 율리아는 그런 샤트린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하께서 독을 먹고 쓰러지기만 해도 온 세상이 저희 왕자궁을 의심할 거예요. 크리스틴은 이중으로 덫을 놓을 거고요.”
“이중이라니?”
“첫 번째는 저를 범인으로 몰아넣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진범인 자신을 감추기 위해 중간 연결책을 쓸 거라는 거예요.”
설마설마했다. 설마. 크리스틴 마조람이 아무리 율리아 아르테를 미워하고 열등감에 미쳐 가고 있다고 해도, 왕족인 자신을 이용하려고?
한데 그 순간 마조람 후작 부인의 얼굴이 샤트린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여자의 딸이니까.’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물었다. 뭘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율리아는 상처와 멍을 교묘하게 가리고 서 있었다. 레위시아는 그런 율리아를 지키듯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가 샤트린을 향해 말했다.
“네 도움이 필요해.”
“무슨 도움.”
“처음엔 아픈 척을 좀 해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네 그 끔찍하게 단순한 성격으로는 실감 나는 연기를 할 수가 없으니까…….”
“레위시아, 지금 시비 거는 거야?”
“가짜 독이라도 먹고 잠깐 쓰러져 줘.”
부러진 발목 때문에 아직도 의사를 달고 사는 샤트린이었다. 멋대로 돌아다닐 수가 없어서 가뜩이나 답답해 죽겠는데 이제는 아예 쓰러져 달라고 요구하는 레위시아의 뻔뻔한 얼굴을 보며,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내 앞에서 꺼지라고, 샤트린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율리아의 말에는 같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샤트린 전하, 오랫동안 왕가를 좀먹던 마조람의 그림자를 찢어발기고 싶지 않으세요?”
율리아의 말은 샤트린의 정곡을 쿡 찌르다 못해 후벼 파는 수준의 제안이었다.
그동안 왕가를 쥐락펴락했던, 왕의 머리 꼭대기에서 오만하게 군림하며 살아왔던 마조람 후작가를 찢어발긴다니.
가슴이 뛰었다. 그건 샤트린의 숙원이었으며, 이제는 왕의 소원이기도 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샤트린은 가짜 독보다 더한 것도 삼킬 수 있었다.
마조람. 이제는 왕가의 원수가 된 그 이름.
샤트린은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심정으로 율리아에게 물었다.
“네 말대로 한다고 쳐. 하지만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이번 일로 크리스틴의 머리채를 잡을 수 있다 해도…… 마조람 후작가 전체를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냐. 막말로 후작이 딸을 넘기고 나 몰라라 해 버리면 어쩔 건데?”
“함정을 팔 거예요.”
“함정?”
“제가 노리는 건 크리스틴이 아니거든요.”
율리아가 웃었다. 파리한 얼굴에 드리워진 야수와도 같은 미소가 샤트린의 심장을 콱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