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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177/319)

156화

샤트린 공주가 쓰러졌다.

불의의 사고로 발목이 부러지긴 했지만, 건강 하나는 타고난 편이었던 공주가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공주는 몸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자꾸만 흰 거품을 토한다고 했다. 입과 혀가 마비되고 잔 경련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했다.

독이었다.

왕궁이 발칵 뒤집혔다. 중독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들이 달려와 샤트린을 치료했다. 분노한 국왕이 기사들을 대동해 공주궁을 봉쇄하고,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강도 높은 심문을 가했다.

기사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공주궁 식당에서 식재료 손질을 맡았던 한 하녀의 소지품에서 독이 담겨 있는 병을 발견했다.

하녀는 서둘러 달아난다고 달아났으나, 기사들의 추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제가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살려 주세요, 네? 트루디가…… 트루디가 시켰어요. 위험한 약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냥 좀 앓다가 마는 약이라고, 정말이에요!”

“트루디?”

“2왕자궁에서 일하는 하녀예요. 트루디요. 율리아 시녀님의 전속 하녀예요. 그 애가 시켰어요! 저를 막 협박하면서…… 금화를 천 개나 준다고 했어요!”

“뭐라고?”

“그 시녀님이 시킨 걸 거예요. 트루디는 평소에도 그 시녀님한테 엄청 많은 돈을 받는다고 자랑했거든요.”

기사들이 굳은 얼굴로 국왕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비틀거리던 국왕이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기사들이 왕을 대신해 하녀에게 다시 물었다.

“2왕자궁의 하녀가 네게 이 병을 건넸고, 공주의 식사에 섞으라고 시켰다고?”

“네, 정말이에요. 맹세할 수 있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화살의 방향을 틀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은 공주궁의 하녀가 트루디와 율리아를 헐뜯기 시작했다.

“율리아 시녀님은 무서운 분이라고 했어요. 귀족들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사람이라고. 그러려면 왕자님을 후계자로 만들어야 한다고. 트루디는 그 시녀님한테 세뇌당해 있었다고요. 저는 너무 두려워서……!”

공주궁의 하녀는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빌었다. 거짓이라고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절박한 태도였다.

국왕이 핏기 없는 얼굴로 2왕자궁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레위시아의 수석 시녀 율리아 아르테가 그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후계자인 샤트린 공주를 독살하려 했다.

가슴이 서늘했다. 악운의 연속이었다. 올해는 왕가에 악운이 끼었다고밖에는 설명할 말이 없었다.

국왕이 눈을 꽉 감으며 말했다.

“왕실 기사단을 보내 2왕자궁을 전면 봉쇄하고, 한 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

“알겠습니다!”

“수석 시녀 율리아 아르테와 그 하녀의 신병을 확보하고, 두 사람의 거처를 샅샅이 뒤져라. 왕자궁의 시녀와 고용인들을 모두 심문하고, 두 사람의 행적을 낱낱이 보고하라.”

“예, 전하!”

“그리고…….”

마지막 왕의 목소리가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레위시아 2왕자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 * *

왕궁 기사단이 2왕자궁을 포위하고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왕자는 물론이거니와 세 명의 시녀와 고용된 하녀들, 그리고 병사들과 단순 심부름꾼에 이르기까지 안에 있던 자들은 절대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되었다.

바깥에 있는 사람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도 없었다. 심문이 끝날 때까지는 아무도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왕명을 받은 기사들이 왕자궁을 점거하고 트루디와 율리아의 방을 뒤엎었다. 그들은 벽과 바닥을 뜯고, 화분 속에 있는 흙까지 탈탈 털어 가며 증거를 찾았다.

“찾았습니다!”

한 기사가 트루디의 방에서 작은 약병이 든 상자를 발견했다. 그 안엔 상당한 양의 금화도 있었다.

“하녀 트루디를 감옥에 가두고, 심문관을 파견하라!”

트루디는 울지 않았다. 억울하다고 소리를 지르거나 몸부림을 치지도 않았다. 얼굴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끌려 나가면서도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문 채 바닥만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들이야?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너희 눈엔 왕자 전하께서 이 자리에 계시다는 게 보이지 않니? 예의와 절차를 갖춰라! 이거 놔! 놓으라고!”

시녀장 코코의 목소리가 높았다. 기사들은 왕자궁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을 감시하면서 수색이 끝난 방에 차례로 가두었다.

“모함이다. 모함이야! 국왕께 가서 고해. 왕자궁은 모함을 당하고 있는 거라고! 두고 봐라. 우리가 결백하다는 게 밝혀지고 나면, 내 절대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니까!”

코코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창고와도 같은 작은 방에 갇혔고, 레위시아는 자신의 침실에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굳은 얼굴로 자신을 막아선 기사들을 향해 레위시아가 물었다.

“알렉사는?”

“알렉사 콴은 기사단 숙소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기사단 숙소에 갇혀 있다는 말이었다. 그들도 알렉사가 힘으로 탈출할까 두려웠는지, 그녀를 왕자궁으로 데려오지 않고 그곳에 가두었다.

레위시아가 다시 물었다.

“율리아는?”

“율리아 수석 시녀는…… 국왕께.”

“뭐라고?”

기사들은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레위시아의 얼굴이 점점 분노로 물들자, 한 기사가 나지막이 한숨과 함께 고했다.

“국왕께서 직접 심문한다 하시어 그쪽으로 끌려갔을 것입니다.”

율리아는 이날 아침 일찍 카루스의 관저를 떠나 왕자궁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며칠 동안 궁을 비워 미안한 마음에 이것저것 간식까지 사 들고, 반갑게 인사하는 하녀들에게 손수 나눠 주었다.

왕자궁에서 제일 늦게 일어나는 코코가 웬일로 율리아를 맞았다. 눈 밑이 까칠한 게, 그녀가 간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도 금세 알 수 있었다.

율리아는 태연했다.

코코에게 장난을 치고, 레위시아에게 걱정시켜 죄송하다면서 인사했다. 기사단으로 출근하는 알렉사를 배웅하기도 했다.

그러곤 자신의 방으로 갔다.

트루디가 그동안 얼마나 정성스레 청소했는지, 전보다 더 깨끗해진 방이 눈에 들어왔다. 율리아는 차분하게 서서 자신의 방을 눈으로 훑었다. 그러곤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엔 드레스룸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카루스의 관저에 머무르는 동안 입었던 옷을 벗고, 우아한 크림색 드레스를 꺼냈다.

부드러운 질감에 도톰한 두께, 소매엔 부풀린 장식이 있었다. 드레스 안엔 목까지 올라오는 흰 블라우스를 입었다.

긴 머리카락은 아무런 장식 없이 땋아 내렸다. 대신, 수석 시녀임을 나타내는 산호색 허리띠에 반짝거리는 장식을 둘렀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율리아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기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살벌한 기세였다. 샤트린이 쓰러졌다는 소식 때문에 가뜩이나 뒤숭숭한 왕자궁에 폭풍이 휘몰아쳤다.

“모두 멈추시오!”

왕실 기사단장이 명령했다. 왕자궁을 지키던 병사들도, 이리저리 오가며 바삐 일하던 하녀들도 깜짝 놀라 머리를 조아렸다.

국왕의 명령이었다. 봉쇄, 감금, 심문. 율리아는 왕실 기사들이 왕자궁으로 쳐들어오는 모습을 창가에 선 채 지켜보았다.

“왜 이러세요! 이거 놔요!”

하녀들이 복도에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눈썹을 움찔한 율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네 명의 왕실 기사가 군화를 신은 채 그녀의 방으로 들어와 칼을 겨누었다.

“국왕 전하의 명령이다. 율리아 아르테! 샤트린 공주 전하를 시해하려 한 죄, 낱낱이 자백해야 할 것이다!”

그녀를 쏘아보는 기사들의 눈빛이 무시무시했다.

율리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억울하다고 소리치고 화를 내는 건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이대로 감옥으로 끌려가게 되는 건가. 아니면 일단 아무 데나 감금해 놓고 조사부터 하려나. 율리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왕의 시종이 기사들을 제치고 나타났다.

“네가 2왕자궁의 수석 시녀 율리아 아르테인가?”

“그렇습니다.”

“국왕께서 부르신다. 따라오도록.”

직접 심문인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겁이 많고 심약한 국왕의 성격을 생각할 때, 원로들이나 기사단에 조사를 일임할 거라고 여겼는데.

왕의 시종을 따라 나가는 율리아의 눈에 이리저리 끌려가고 있는 왕자궁 하녀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하녀들은 잔뜩 겁을 먹긴 했으나 율리아를 의심하거나 원망하는 것 같진 않았다.

되려 걱정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율리아는 하녀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무표정해 보였던 얼굴에 신기하리만치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하녀들이 율리아를 보며 눈동자를 깜박거렸다.

“따라와라.”

왕의 시종이 걸음을 서둘렀다.

율리아는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코코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레위시아 왕자는 어디에 있는지, 알렉사가 탈출하려고 난동을 부리지는 않을지.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하지만 그녀를 압박하듯 사방을 막아선 채 호송하는 기사들 때문에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한 채 왕 앞으로 끌려가야만 했다.

국왕이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왕족을 시해하려 한 죄로 기사들에게 끌려온 시녀라고 하기엔 너무 담담한 얼굴이었다. 우아한 차림새는 흠잡을 데 없고, 초록색 눈동자는 한없이 깊어 속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꿇어라!”

왕의 시종이 율리아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녀는 반항하지 않고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구겨진 치맛자락이나 살짝 내리뜬 눈, 느리게 오르내리는 어깨까지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마치 이 순간을 예상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율리아 아르테.”

왕이 물었다.

“네가 하녀를 이용해 샤트린의 식사에 독을 넣었느냐.”

아니라고 할 것이다. 억울하다고. 공주궁의 하녀가 자신을 모함했다거나, 하녀 트루디가 혼자 저지른 짓이라고.

모두가 그렇게 예상했다.

한데 율리아는 그러지 않았다.

“네.”

그녀는 깔끔하게 자신의 짓임을 인정하고 왕을 바라보았다.

“제가 하녀를 시켜 공주 전하의 식사에 약을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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