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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176/319)

155화

경고라고 하기엔 너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카루스는 화내지 않았다. 레위시아를 위협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이렇게 말했다.

“왕이 되어라.”

“그래야겠지.”

“그리고 평생 혼자 살아.”

카루스의 말은 가벼운 농담처럼 들렸지만 둘 중 누구도 웃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레위시아의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율리아를 왕비로 만들 수도 없었다. 레위시아는 왕이 되어야 했고, 그래서 율리아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처형장에 침입해 해방군 수뇌부와 주동자를 살해한 범인은, 그들에게 속아 지금까지 자신들이 오르테가의 구원자인 줄로만 알았던 순진한 해방군 청년들이었다.

해방군이 해방군을 죽였다. 급진파로 분류되던 그 청년들은 블라이스를 통해 진짜 전쟁터에서 쓰는 제국산 병장기로 무장했고, 샤트린의 판결에 불복하며 직접 보복에 나선 것이다.

수뇌부는 모두 목이 잘려 죽었다. 그들 나름의 처형이었다.

처형장엔 샤트린을 호위하는 왕실 기사단과 병사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었다. 해방군 청년들은 수뇌부를 죽이는 데는 성공했으나, 일을 마친 뒤 무사히 달아나는 것까진 성공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중엔 사로잡힌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심문을 당하면서도 한결같은 말을 내뱉었다.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배신자를 처단했을 뿐이다!”

“마조람 후작과 친제국파를 모두 죽이지 않으면 왕국에 미래는 없다!”

문제는 그들에게 동조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는 것이었다.

힌치 백작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한 반제국파와 마조람 후작을 배신하고 돌아선 자들까지.

마침내 저울의 추가 반대로 기울었다.

* * *

이틀 동안 열이 올라 고생하던 율리아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이 정도면 가벼운 부상이라고 진단했던 의사가 민망할 정도로, 그녀는 심하게 앓았다.

광장에서 인파에 깔려 죽을 뻔했던 게 직접적인 원인이었으나 갑작스레 찾아온 심리적 변화가 더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율리아는 생각했다.

시퍼런 멍이 온몸을 물들이고 있었다. 얼굴에도 상처가 있었고, 가장 많이 채였던 등과 팔은 멀쩡한 부분이 별로 없었다.

“세상에.”

코코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아무리 무서워도 그렇지, 발밑에 사람이 있는데 무작정 밟고 도망쳤단 말이야? 최소한 피하려고 노력은 해야지.”

“어떻게 그래요. 자기들도 밀리고 밀려서 그랬겠죠.”

“깔려 죽은 사람이 있으니까 하는 소리지.”

“죽은 사람이 있어요?”

“그래.”

코코가 한숨을 내쉬며 율리아의 등에 약을 발랐다. 하녀한테 시키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코코는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카루스의 관저에 남아, 율리아를 직접 간호했다.

“시녀장이 이렇게 자리를 오래 비워도 되는 거예요?”

“어차피 당분간 후계자는 샤트린 공주니까 우리랑은 상관없어. 가뜩이나 혼란스러운데 일이나 실컷 하라지.”

“레위시아 전하랑 알렉사는요?”

“왕궁으로 돌려보냈어. 여기 있으면 너무 눈에 띌 것 같아서.”

코코가 제일 눈에 띌 것 같았지만, 율리아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등을 문지르는 손길이 섬세했다. 조금만 자극해도 통증이 올라올 걸 알기에, 코코는 상처를 세게 누르지 않도록 집중해서 약을 발랐다.

“크리스틴 그 계집애가 널 밀었다며.”

“넘어지면서, 달아나는 뒷모습을 봤어요. 아마 그 애겠죠.”

“왜 만난 거야. 보기만 해도 짜증 나는 애를.”

“그토록 원하던 가주 후계자가 되었으니까, 얼마나 달라졌나 관찰하고 싶어서요.”

“달라졌어?”

“조금?”

코코가 흐응, 하며 콧소리를 냈다.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는데? 열등감 덩어리 계집애가 갑자기 독 오른 독사라도 된 거야?”

“절 죽이려고 시도할 거예요.”

죽으라고 직접 밀기까지 했으니, 앞으로는 좀 더 가까운 위협이 닥칠 가능성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율리아가 코코에게 물었다.

“만약 코코가 크리스틴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걔처럼 멍청하게 행동하진 않겠지.”

약을 다 바른 코코가 율리아의 옷을 여며주었다. 그러면서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더니, 코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크리스틴 그 계집애가 왕궁 안에서 하는 싸움에 대해 뭘 아는지도 모르겠고, 어디까지 독해질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몰라요.”

“응?”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도 몰라요. 전보다 무모해졌을 뿐이죠. 우리가 고려해야 할 점은 그 애가 마조람의 후계자라는 거예요. 가문의 힘을 멋대로 쓸 수 있으니까.”

“뭐야.”

코코의 붉은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그러면 좀 재밌어지지.”

코코의 입에서 몇 가지 계책이 쏟아졌다. 그녀는 만약 자신이 크리스틴 마조람이라면 이렇게 하겠다, 혹은 저렇게 하겠다며 온갖 못된 짓을 구상했다.

율리아는 그중 크리스틴이 쓸법한 것들을 추려냈다. 크리스틴에 대해 잘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예측이었다.

“크리스틴은 그다지 노련하지 않아요. 무모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지금 자신이 가진 걸 잃을까 두려워할 거고.”

“그럼 직접 손쓰지 않으면서 의심도 받지 않으려고 하겠네.”

그런 게 뭐가 있을까. 멍든 몸을 주무르던 율리아가 쟁반 위에 담긴 약 그릇을 바라보았다.

은을 입힌 식기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율리아가 카루스의 관저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트루디는 주인이 없는 방을 열심히 청소하며 지냈다.

전속 하녀는 모시는 시녀님이 자리를 비우면 딱히 할 일이랄 게 없었다. 심심해진 트루디는 율리아에게 받은 금화를 주머니에 넣고 왕궁에서 사귄 친구들을 만나러 돌아다녔다.

율리아가 궁을 비운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트루디는 이날도 아침 청소를 마치자마자 공주궁에서 일하는 하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금화를 챙기고 있었다.

그런데 한 심부름꾼이 찾아와 궁내부 관리가 급하게 찾는다고 알려 주었다.

“또?”

요즘 궁내부 관리가 트루디를 찾는 일이 잦았다. 전에는 한 달에 한 번만 보고하면 된다고 하더니, 그 횟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트루디는 싫은 마음을 애써 감추고 궁내부로 갔다.

“찾으셨어요?”

안으로 들어갔더니 평소보다 더 굳은 얼굴을 한 궁내부 관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앉아라.”

“무슨 일이세요? 보고드린 지 며칠 안 된 것 같은데…….”

“후우. 이번에는 정말 중요한 일이야.”

“뭔데 그러세요?”

궁내부 관리가 못마땅해하는 얼굴로 트루디를 흘깃거리더니 서랍에서 웬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그동안 내가 널 소홀히 대하는 것 같아 서운해했다는 거 안다.”

“네?”

“널 시험했던 거야. 하녀들은 대체로 돈을 많이 주는 사람을 따르게 되어 있으니까. 충성스러운 녀석인지 아닌지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트루디가 입을 살짝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그러곤 궁내부 관리가 내민 주머니를 받지 않고 망설였다.

“받아라.”

“이게…… 뭔데요.”

“받으라면 받아.”

그가 트루디의 손에 억지로 주머니를 쥐여 주었다. 묵직했다. 살짝 벌어진 입구에서 번쩍이는 금화가 눈에 띄었다.

“백 개다.”

“네?”

트루디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둥근 눈을 크게 뜨고, 주머니를 손에 든 채 어색하게 만지작거렸다. 생각지도 못하게 큰돈을 받아 당황한 모습이었다.

“트루디, 이번에는 네게 아주 중요한 일을 맡길 생각이다. 만약 시키는 대로 잘만 해 준다면…… 열 배의 보상을 받을 수 있어.”

10배면 금화가 1천 개였다. 트루디의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뭘 하면 되는데요?”

“공주궁에서 일하는 식당 하녀에게 이걸 건네줘라.”

궁내부 관리가 이번에는 작은 병을 몇 개 건넸다. 그 안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공주가 먹는 음식에 쓰는 거다.”

“네? 도대체 이게 뭔데요?”

“그건 알 것 없다. 알겠지? 식당 하녀에게 주고, 아무 음식에나 적당히 넣으면 된다. 네가 일을 잘했다는 것만 확인하고 나면 곧바로 보상을 해 주마. 멀리 도망칠 수 있게 새 이름과 신분도 마련해 주겠다.”

“그러다 들키면요?”

“들키지 않게 해야지. 만약 누가 널 의심하거나 캐묻거든…… 네가 모시는 사람의 이름을 대.”

모시는 사람의 이름. 트루디가 주머니를 두 손으로 꽉 쥐고 중얼거렸다.

“율리아 아르테.”

트루디는 그날 바로 공주궁 하녀를 만났다. 평소 친하게 지내기도 했거니와, 트루디가 건네주는 금화로 쏠쏠한 재미를 보던 친구였다.

트루디는 그 하녀에게 작은 병을 건넸다. 그러곤 샤트린 공주가 먹는 음식에 넣으라고 시켰다.

“싫어! 그런 위험한 짓은 절대 안 해.”

“이거 보고 말해.”

트루디가 하녀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그 안엔 궁내부 관리가 준 1백 개의 금화가 번쩍거리는 빛을 뽐내고 있었다.

“그냥 넣기만 하면 돼. 그렇게 위험한 약도 아니야. 좀 앓기야 하겠지만, 멀쩡하게 일어나실 거라고.”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그걸 우리 같은 무지렁이가 어떻게 알아. 그냥 시키는 대로 하고, 돈이나 받아서 튀면 되는 거지.”

“그건 그렇지만…….”

“성공하면 천 개를 준댔어.”

“어?”

“금화 천 개. 너 다 줄게. 약만 넣고 바로 도망쳐. 그럼 내가 금화를 받아서 너한테 갖다 줄 테니까.”

“정말?”

“우리 전에 놀러 갔던 바닷가 기억하지? 그 여관에 가 있어. 금화 천 개면 그 정도 되는 여관도 살 수 있어. 왕궁에서 하녀 노릇 평생 하는 것보다 낫잖아.”

“그래도 좀 무서운데…….”

공주궁 하녀는 선뜻 그러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무서운 게 당연했다.

어떻게 설득할까 고민하던 트루디가 율리아를 떠올렸다.

협박과 회유. 그녀는 공주궁 하녀를 흘깃 노려보며 말했다.

“내 부탁 안 들어주면 그동안 네가 나한테 돈 받아먹은 거랑 공주궁에서 있었던 일 떠벌리고 다닌 거 다 고발할 거야.”

“뭐어?”

“처맞고 빈손으로 쫓겨날래, 금화 천 개 들고 떵떵거리며 살래?”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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