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30. 독사
밤새도록 열이 올랐다. 의사가 경고했던 것보다 심한 열이었다. 해열제를 먹고 차가운 수건으로 찜질을 해도 소용없었다.
카루스는 아예 의사를 불러다 옆방에 대기시켜 놓았다. 그러곤 율리아가 열 때문에 잠에서 깨거나 헛소리를 할 때마다 무시무시한 얼굴로 달려와 그녀를 보살폈다.
맥스웰은 왕궁으로 달려가 처형장에서 있었던 일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전달하려 애썼다.
“시녀님이 광장에서 크리스틴 마조람을 발견하곤 잠시 이야기를 나누겠다며 내려가셨습니다. 하필 그때 해방군 청년들이 처형장을 급습했고, 시녀님은 달아나는 인파에 밟혀…….”
“율리아는 어디에 있죠?”
“카루스 님의 관저에서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앞장서세요.”
코코가 벌떡 일어났다. 알렉사도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그 소식을 들은 레위시아는 재킷도 걸치지 않은 채 마차를 향해 달렸다.
큰 부상이 아니라는 데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율리아가 무사하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안심할 수 없다고 우겼다.
맥스웰은 결국 그들을 모두 데리고 카루스의 관저로 돌아왔다.
“율리아는요?”
코코의 얼굴이 창백했다.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바바슬로프가 말했다.
“해열제를 계속 먹이고는 있는데, 열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카루스 님이 안에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들어가게 해 주세요.”
마음 같아서는 다 비키라고 소리 지르고 율리아를 왕궁으로 데려가고 싶었지만, 코코의 목소리는 작고 차분했다. 혹시 잠들어 있는 율리아를 깨울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레위시아와 알렉사가 바바슬로프를 노려보았다. 들여보내 주지 않으면 그를 때려눕힐 기세였다.
“알겠습니다.”
바바슬로프가 헛기침을 하며 문을 열었다.
“카루스 님, 레위시아 왕자 전하와 시녀들이 찾아왔습니다.”
율리아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던 카루스가 몸을 일으켰다. 코코와 알렉사, 레위시아가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와 율리아의 안색을 살폈다.
레위시아가 시녀들을 대신해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크리스틴 마조람과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내려갔다가 일어난 일이다. 서둘러 데려오긴 했는데, 타박상이 심해.”
“우연한 사고인가?”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카루스가 짧게 망설이다 레위시아를 보고 말했다.
“율리아가 잠들기 전에 그런 말을 했어. 크리스틴 마조람이 민 것 같다고.”
“뭐?”
레위시아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율리아를 살펴보면서도 귀로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코코가 벌떡 일어나 물었다.
“율리아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마조람 후작가의 계집애가 자길 밀었다고?”
“그래.”
“쓰레기 같은 게, 진짜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코코가 진심을 가득 담아 뇌까렸다.
율리아는 자신이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이 뿌옇고 몸은 무거웠다. 제 몸이 자꾸만 땅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으나, 실은 반쯤 깨어 있는 상태였다.
열이 내리지 않아 연달아 독한 약을 삼켜야 했다. 잠결에도 몸이 아파 계속 애처로운 신음을 내뱉었다. 율리아는 자신의 이마를 닦아 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 채 그에게 부탁했다.
차라리 깨워 달라고.
그런데 그 사람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시원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면서, 닥치고 잠이나 자라고 혼을 냈다. 그러면서도 손으로는 가슴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율리아는 그가 누군지 궁금했다.
“누구…….”
“얘는 자면서도 왜 이렇게 궁금한 게 많은 거야. 닥치고 좀 자라니까?”
“그게 간호하는 사람의 자세입니까? 차라리 저한테 맡기고 가서 쉬세요.”
누군가 토닥거리며 싸우고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통에 찡그려져 있던 율리아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났다.
“어쭈, 이 계집애가 웃긴 왜 웃어. 징그럽게 진짜.”
“그냥 가세요. 이러다 마음의 병까지 걸리겠습니다.”
“너라고 뭐 다를 줄 알아?”
아, 알겠다. 코코였다. 코코가 제 곁에 있었다. 뾰족한 목소리로 걱정을 가득 담아 투덜거렸다.
율리아는 약에 취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지금이 언제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꿈인지 현실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이번에 죽으면…… 다신 안 찾을 테니까.”
“지금 뭐라는 거야. 이게.”
“나 때문에 죽게 해서 미안…….”
코코가 손을 멈추었다. 그녀의 붉은 눈이 한차례 크게 흔들렸다.
율리아는 웅얼거리면서도 때때로 몸이 아픈지 이맛살을 찡그리고 있었다. 코코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야.”
나 때문에 죽게 해서 미안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지금 물어보면 율리아는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동안 숨겨 왔던 비밀들에 대해서. 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지금 살살 구슬려서 물어보면, 어쩌면.
“골치 아픈 계집애.”
코코가 짜증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들고 있던 수건을 알렉사에게 건넸다.
“난 왕자님하고 대책이나 논의하러 갈 테니까, 네가 간호해.”
“알겠습니다.”
코코가 율리아를 등지고 돌아섰다. 아무래도 여기 계속 있다간 아픈 사람을 꼬치꼬치 심문하게 될 것 같았다.
레위시아는 카루스의 집무실에서 그와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마조람 후작가로 쳐들어가서 크리스틴 마조람을 광장으로 끌고 나와 형틀에 세우고 싶었으나,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가슴에 울화가 쌓였다.
레위시아가 신음과도 같은 한숨을 내뱉자, 카루스가 그에게 찬물 한 컵을 건넸다.
“마셔.”
“묻고 싶은 게 있어.”
“쉬운 질문이었으면 좋겠군. 나도 그다지 머릿속이 여유로운 편이 아니라서.”
카루스가 피식 웃자, 레위시아도 그를 따라 짧게 웃었다. 그러곤 찬물을 단번에 들이켜고 물었다.
“왕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어?”
카루스의 눈썹이 역으로 휘었다. 그가 입술을 씰룩이며 레위시아를 노려보았다.
“난 왕족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내 말은…… 왕족으로 태어나고 싶다거나 왕이 되는 길을 꿈꿔 보지 않았냐고 묻는 거야. 바이칸 황제의 폭정이나 우리 부왕의 우유부단함을 지켜보다 보면 그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해 봤을 것 같아서.”
“없어.”
“한 번도?”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왕자.”
“그냥 레위시아라고 불러.”
레위시아가 가볍게 웃었다. 카루스는 팔짱을 끼고 앉아, 그를 향해 말했다.
“바이칸에 있는 내 영지가 오르테가보다 커.”
“뭐? 지금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잖아.”
“이 작은 왕국의 왕 따위가 되어 봤자, 내가 원하는 그림은 그릴 수 없어.”
“지금 오르테가를 무시하는 거냐?”
“왕좌를 무시하는 거겠지.”
카루스가 비웃음을 터뜨렸다. 레위시아는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왕좌를 비웃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네가 그리는 그림이라는 게 뭔데.”
“흩어져 저들끼리 싸우는 남부를 통일하고, 권력과 병력을 중앙 집권화하는 것. 해적 세력을 이용해서 남부로 향하는 거대 항로를 감시하는 것. 북부 패전국 연합과 손잡고 크세노 황제의 야욕을 견제하는 것.”
“뭐…… 그게 뭐야.”
“마조람 후작과 그 떨거지들을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뜨려 다시는 율리아의 삶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것.”
카루스는 자신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레위시아는 율리아가 왕으로 선택한 남자였다. 그러니 이 정도는 말해 두는 편이 좋았다.
레위시아가 카루스에게 물었다.
“그걸 다 하려면 최소한 왕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더러 너와 너희 가족을 다 죽이고 오르테가를 차지하라는 소린가?”
“차라리 그렇다고 말해. 말하는 걸 보니 남부를 거점으로 크세노 황제와 한판 겨뤄 볼 모양인데, 사람 바보 취급하지 말고.”
레위시아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카루스가 원하는 걸 모두 이루려면 왕가를 섬멸하고 오르테가의 왕좌에 앉는 편이 가장 효율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카루스는 고개를 저으며 그게 아니라고 말했다.
“왕좌엔 네가 앉아야지. 나는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되려는 게 아니야.”
“뭐?”
“그 의자에 앉는 순간,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들이 대부분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거다. 왕은 조율하고 결정하는 사람이지, 나서서 싸우는 자가 아니거든.”
“그러니까 네 말은…… 의자에 앉아서 욕먹는 건 내가 하고, 너는 바깥에서 네 멋대로 적을 무찌르고 다니겠다는 거네.”
“이해가 빠른 녀석이었군.”
카루스가 사납게 웃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위협적인 얼굴이었다.
레위시아는 화내지 않았다.
고함을 치거나 멱살을 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짧은 침묵이 오가고, 레위시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그늘이 졌다. 살이 조금 빠졌는지 얼굴선이 날카로웠다. 한껏 멋을 부리고 다니던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단정한 무채색 옷이 그의 마음을 감추었다.
슬픔 혹은 우울. 레위시아의 색은 비 오는 바다를 연상케 했다.
“난 율리아를 사랑해.”
그래서 그의 고백은 아름답게 들리지 않았다.
카루스의 얼굴에 맴돌던 사나운 기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레위시아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사랑해서 내가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레위시아.”
“가끔은 율리아를 만난 걸 후회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왕자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었으면 좋았으리라고 생각해. 그러면 최소한 죽이고 싶을 만큼 싫은 남자와 손잡지 않아도 되었겠지.”
“그게 나인가.”
“나는.”
레위시아가 웃었다. 슬픔이 침잠하여 너울처럼 드리워진 미소였다.
“카루스 란케아, 네가 거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