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인파를 헤치고 나타난 해방군 청년들이 한꺼번에 형장 위로 올라갔다. 그들은 당황한 집행인을 밀어 떨어뜨리고, 형틀에 묶여 매 맞고 있던 두 명의 주동자에게 다가가 머리채를 잡더니 단칼에 목을 베었다.
율리아는 그 자리에 멈춰선 채 형장 위를 바라보았다.
해방군 청년들은 주동자를 처리한 뒤, 나머지 귀족 수뇌부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이 내뱉는 비명이 귀를 찢듯 파고들었다.
피가 튀고, 또 피가 튀었다.
처형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명이 난무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질서 없이 아무 방향으로나 달아나기 시작했다. 넘어진 자를 밟고, 서로를 밀쳤다.
가만히 서 있던 율리아도 사람들에게 밀려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넘어지면 깔려 죽을 판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녀가 서둘러 몸을 피하려던 순간이었다.
누군가 뒤에서 율리아를 밀었다.
“……!”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율리아는 허우적거리며 인파에 파묻혔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그런 그녀를 마구 밀치며 달려갔다.
그렇게 이리저리 부딪치다 바닥에 쓰러지던 순간, 율리아는 병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재빨리 달아나는 크리스틴의 뒷모습을 보았다.
“하…… 하하!”
율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에게 밟히고 채이면서도, 그녀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켜! 비키라고!”
“사람 살려!”
크리스틴이 율리아를 밀었다. 비겁한 방법이었지만,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손으로 율리아를 죽이려 했다. 병사들에게 시킨 것도 아니고, 후작 부부에게 고자질한 것도 아니었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누군가 쓰러진 율리아의 등을 밟았다. 머리도, 손도, 다리도 밟혔다. 고통스러웠다. 몸부림쳐도 소용없었다. 사람들이 달아나며 그녀를 밟고 또 밟았다.
형장 위에선 아직도 비명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뒤늦게 달려 나온 병사들이 해방군을 상대로 칼을 휘두르며 싸웠다.
율리아는 할 수 없이 최대한 몸을 둥글게 말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고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밟혀 죽는 건 사양이었다.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았다.
복수를 끝마치지 못했다. 레위시아를 왕위에 올리지 못했다. 코코와 알렉사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인 듯 살라던 카루스의 말이 떠올랐다. 네가 가여워서 참을 수 없다던, 너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저주에 걸려도 괜찮을 것 같다던 그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죽고 싶지 않아. 아직은. 이번에는 죽고 싶지 않아.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죽고 싶지 않아.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아.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제발.
살고 싶어.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기도했다.
살고 싶어. 제발.
“율리아!”
그러자 진짜 카루스가 나타났다.
“율리아! 괜찮아?”
카루스가 커다란 몸으로 율리아를 감싸 안았다. 그는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바닥에 엎드려 제 몸으로 율리아를 덮었다.
그러곤 서릿발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당장 비키지 않으면 전부 죽이겠다!”
카루스를 따라 달려온 그의 기사들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두 갈래로 갈라지며 거리를 벌렸다.
율리아는 카루스의 품에서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인파에 밟혀 엉망이 된 그녀가 짧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곱게 묶었던 머리카락은 지저분하게 풀어 헤쳐지고, 깨끗했던 드레스는 온통 흙발에 짓밟혀 오물투성이가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온몸에 멍이 들 게 분명했다.
“율리아.”
“……카루스 님.”
“이리 와.”
카루스가 율리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곤 기사들과 함께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만하길 천만다행입니다.”
끌려오다시피 달려온 의사가 땀을 훔치며 미소 지었다.
“멍이 심하게 들긴 하겠지만, 부러진 데는 없어 보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용케 몸을 보호하셨군요.”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시녀님께서 잘 대처하셨습니다. 오늘은 여기저기 많이 부어서 아프실 겁니다. 수시로 냉찜질하시되, 부기가 가라앉은 뒤에는 몸을 따뜻하게 하세요.”
의사가 몇 가지 약을 지어 주었다.
율리아는 침대에 누운 채 가만히 숨을 몰아쉬었다. 꼼짝없이 압사당하는 줄 알았는데, 별다른 부상조차 없다는 게 그녀도 믿기지 않았다.
이게 다 카루스가 서둘러 달려와 준 덕이었다.
고마운 마음에 고개를 들었더니, 카루스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의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상처가 있잖아. 피가 났다고. 이게 멀쩡한 거라고?”
“예? 제독님, 그…… 그 상황에서 이 정도면.”
의사가 당황해서 눈을 끔벅거렸다. 그는 제국군에 고용된 의사였고, 주로 병사들을 치료해 왔다. 그래서 카루스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낯설었다.
율리아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고맙습니다. 약도 잘 먹을게요.”
의사가 카루스의 눈치를 슬그머니 보더니, 율리아에게 물었다.
“그…… 시녀님, 제가 직접…… 소독이라도 해 드릴까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놓고 나가.”
카루스가 눈짓으로 의사를 쫓아냈다. 그러곤 침대 옆으로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그는 꼭 화난 것처럼 보였다. 입을 꽉 다물고 앉아선 의사가 놓고 간 소독약을 집어 들었다.
하얗고 보드라운 천이 상처에 닿을 듯 말 듯했다.
“제가 할게요.”
“넌 가만히 있어.”
“이럴 거면 의사한테 맡기지, 왜 쫓아내셨어요?”
율리아가 웃으며 물었다. 상처를 소독해야 하는데, 카루스가 자꾸만 망설여서 시간만 늦어지고 있었다.
그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만지면 더 아플 것 같아.”
“그런 게 어딨어요. 누가 만져도 똑같이 아파요. 그러니까 제가 할게요. 이리 주세요.”
“그냥 있어.”
카루스가 이번에는 제대로 상처를 소독했다. 조심스러운 건 여전했지만, 율리아가 직접 하게 둘 수는 없다고 했다.
“다들 걱정할 텐데…….”
“왕궁엔 맥스웰을 보내 놨어. 다 나을 때까진 여기 있도록 해.”
율리아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괜찮은 척하고 있는데, 온몸이 너무 아팠다. 의사가 지어 준 약에 수면제라도 들어 있는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자꾸만 의식이 멀어졌다.
“널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카루스가 자책하고 있었다. 그의 혼잣말이 자장가처럼 들렸다.
“애초에 거길 데려가는 게 아니었어. 내 생각이 짧았다.”
“거기…… 크리스틴이 있었어요.”
율리아가 잠에 취해 중얼거렸다.
“아마 그 애가 밀었을 거예요.”
“뭐?”
소독을 마치고 상처에 약을 바르던 카루스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율리아가 눈을 느리게 깜박이더니 그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고 말했다.
“구해 주셔서 고마워요.”
“됐어.”
“아까 쓰러졌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고……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다고. 신기하죠. 살고 싶다고…… 제발 살려 달라고 빌었거든요.”
약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몸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처음이었어요.”
“율리아.”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율리아의 목소리가 뚝뚝 끊어졌다. 그녀는 이제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루스가 손바닥으로 그녀의 눈을 가려 주었다.
율리아는 금세 잠들었다.
가슴이 작게 오르내렸다. 카루스는 지쳐 잠든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살고 싶다고 했다.
율리아가 잠결에 취해 내뱉은 말이 그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이렇게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고, 죽고 싶지 않았다고.
가슴이 벅찬데 괴로웠다. 율리아가 또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할 수만 있다면 그 광장에 있던 사람을 모두 죽이고 싶었다.
그 역시 처음이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전쟁 중에도 이 정도로 진한 살의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율리아가 바닥에 쓰러진 채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는 반쯤 미쳐 있었다.
어떻게 해야 널 지킬 수 있을까.
하마터면 그곳에서 학살을 저지를 뻔했다. 율리아가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버려서 다행이었다.
‘살고 싶다고.’
카루스가 손끝으로 율리아의 눈매를 매만졌다. 그녀의 눈썹을, 고운 속눈썹을, 눈꼬리를 훑고 지나갔다. 그러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짝 덮었다.
따스하고 촉촉한 숨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간지러울 만큼 약한 숨이었으나, 유난히 그를 괴롭히는 온기였다.
‘한입에 삼켜.’
카루스는 자신의 심장이 하는 말을 들었다.
달콤할 것이다. 끝없이 갈구하게 되리라. 율리아가 숨 쉴 때마다 그 숨을 조금의 낭비도 없이 온전히 삼키고 싶어 안달하게 되겠지.
그녀는 모질고 사나운 짐승이었다. 그를 사냥하곤, 잡아먹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그는 달아나지 못하게 된 지 오래였다.
어쩌면 이 갈증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카루스 란케아의 심장은 이미 율리아 아르테의 것이었다.
그는 언제인지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나 있었다. 율리아의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치우고 침대에 걸터앉아, 양팔로 그녀를 가두었다.
얼굴을 기울이자 그녀의 숨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미친놈처럼 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비겁하다는 걸 알면서도 수만 가지 이유가 쏟아지며 그를 부추겼다.
카루스가 고개를 기울여 율리아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잠옷 사이 드러난 흰 살결에 입술을 묻고, 가만히 숨을 들이마셨다.
두근. 두근. 두근.
그의 심장이 광기를 머금고 그녀를 탐했다. 아직은 그의 가슴에 있으나, 그녀의 숨으로 살아가는 존재였다.
‘한입에 삼켜.’
심장은 그가 아니라,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