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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화 (173/319)

152화

크리스틴은 이번에도 자신이 율리아를 흉내 내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우아한 자세와 꼿꼿한 등. 율리아처럼 차분하게 말하려 애썼지만,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왕가를 상대하고 가신들을 챙기느라 바쁘시지. 하지만 난 아냐. 난 얼마든지 널 죽일 수 있어. 마조람 영애는 아무 힘없는 아가씨에 불과했지만, 후계자는 그렇지 않거든. 가문의 힘을 휘두를 수 있지.”

드디어 깨달았구나. 가문의 힘이 없으면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율리아는 웃는 얼굴 그대로 크리스틴을 응시했다.

크리스틴이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왔다. 로브 아래 드러난 머리카락이 짧았다. 마른 얼굴에 이목구비가 앙상하게 드러나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이 모든 일을 네가 꾸몄다는 걸 다 밝혀낼 거야. 바실리와 샤트린 전하의 일부터 국왕 전하와 아버지까지. 다 네 짓이잖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멀리 도망치시지. 이번에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진짜 기사들이 널 추적해서 사형대에 세울 테니까.”

얘는 정말 다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떠보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망상이 커져서 현실인 줄 아는 걸까?

고민하던 율리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가씨.”

언젠가 그들이 서로를 친구라 부르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그때처럼, 친근하고 다정한 말투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무섭게. 저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율리아!”

“정말이에요. 무슨 짓을 한 건 아가씨와 그쪽 사람들이잖아요? 왜 저한테 잘못을 뒤집어씌우세요. 이제는 뭐가 옳고 그른 건지, 뭐가 좋고 나쁜 건지, 뭐가 더 비겁하고 악독한 건지, 그것도 모르시겠어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 난 이제 네가 끔찍하니까. 널 증오해. 미치도록 싫어. 네가 처참하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내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뭐야.”

율리아의 목소리가 작았다. 입구에서 이쪽을 노려보는 병사들에겐 들리지 않을 만큼, 아주 작았다.

“누가 할 소릴.”

“너…….”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어. 몰랐던 모양이구나?”

율리아가 웃었다. 그녀의 눈에 해묵은 광기가 넘실거렸다.

그걸 정면에서 마주한 크리스틴은 지독한 열등감과 공포심에 물들어, 저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 쳤다.

* * *

처형장에서 해방군의 비명이 울려 퍼지던 시각, 블라이스는 데네브라의 심복을 마주하고 있었다.

“‘꿇어라.’”

심복이 감정 없이 말했다. 그는 한 손에 데네브라의 명령서를 들고 있었다. 명령서라고는 하지만 편지에 가까운 글이었다.

블라이스는 토 달지 않고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블라이스, 나를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냐. 얼마나 더 실망케 해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너를 믿고 큰일을 맡겼는데, 너는 아직도 족쇄에 묶인 포로를 자처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구나.’”

데네브라의 심복이 편지를 읽다 말고 블라이스를 내려다보았다.

“황비 전하께서 내게 채찍을 건네셨소.”

“때려라.”

“이 편지를 다 읽을 때까지 온 힘을 다해 치라고도 명령하셨소.”

“괜찮으니까 때려.”

“백작, 당신이 제국으로 돌아갈 날은 아직 멀었으니…… 돌아가 거짓을 고할 수도 있소.”

심복의 목소리엔 감정이 없었으나, 그는 블라이스를 동정하고 있었다.

데네브라는 블라이스를 폭력으로 굴복시킨 여자였다. 그래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일을 좀 더 빨리 진행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심복을 보내 채찍질을 시켰다.

심복은 블라이스를 위해 거짓을 고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블라이스가 말없이 재킷을 벗었다. 꿇어앉은 자세 그대로, 거친 몸짓으로 셔츠까지 연달아 벗어 던졌다. 그러곤 심복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동정하지 말고 때려, 새끼야.”

드러난 몸에 흉터가 가득했다. 채찍과 칼자국, 화상 자국까지 없는 게 없었다. 그 위에 그려진 문신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심복이 채찍을 꺼내 들고 한숨과 함께 말했다.

“얼굴에 상처를 내지 말라고 하셨으니…… 머리를 조아리시오.”

블라이스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키득거리고 웃으면서도 심복의 말대로 몸을 둥글게 말아 엎드렸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싸 보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황제 폐하의 명령을 듣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폐하의 명령을 우선하되, 카루스 란케아가 남부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낱낱이 감시하고 보고하여라.’”

채찍이 허공을 날았다. 데네브라가 즐겨 쓰던 뱀 가죽 채찍이었다. 철썩, 블라이스의 살갗을 파고들 듯 달라붙은 채찍이 끔찍한 마찰음을 냈다.

블라이스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겨울이 지나기 전에 오르테가에 내전을 일으켜라. 내가 직접 폐하를 대신하여 남부를 토벌할 것이다.’”

채찍이 한 번, 두 번, 세 번 연달아 휘둘러졌다. 블라이스의 등과 어깨, 팔뚝에 뱀이 지나간 것처럼 긴 상처가 남았다.

심복은 편지를 빠르게 읽었다. 블라이스의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데네브라는 유희하듯 쓸데없이 긴 내용의 편지를 썼고, 채찍질이 끝났을 때 블라이스는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심복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블라이스가 바닥에 쓰러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서 의사를…….”

“데네브라 님께 가서 고해. 대규모 병력을 준비해야 할 거라고.”

“백작, 지금 뭐라고 하셨소?”

“내전이건 폭동이건,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황비께 가서 이렇게 말해. 카루스 란케아가 변절하여 제국을 배신하고 오르테가를 수호하려 하니, 황비 전하의 병력을 모두 동원해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내내 무표정했던 심복의 얼굴에 커다란 동요가 일어났다. 카루스 란케아가 변절하다니. 그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해 몇 번이나 되물었고, 그때마다 블라이스는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은 채 같은 말을 반복했다.

“황제는 카루스 란케아를 죽일 거야. 황비께서 서둘러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른 사람의 손에 죽겠지.”

묘한 말이었다. 블라이스는 황비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조만간 그의 죽음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도대체 그가 왜…….”

“여자 때문에.”

“뭐라고 말하셨소?”

심복이 놀라 되물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가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블라이스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곤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 황비의 심복에게 건넸다.

“이 반지를 전해. 지난겨울 데네브라 님의 명령으로 국경 산맥에 잠복해 있을 때, 카루스의 목숨을 구한 여자가 이 반지를 끼고 있었다고. 그 여자 때문에 제독은 바이칸을 배신할 거야.”

진실 섞인 거짓이었다. 거짓을 입힌 진실이기도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한시가 급하오. 서둘러 돌아가야겠소.”

블라이스가 씩 웃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혹독한 채찍질을 당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진한 미소였다.

데네브라 황비는 상당수의 병력을 거느린 권력가였다. 그 병력을 모두 데려올 수만 있다면, 남부를 북부처럼 초토화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카루스는 그때 죽이면 된다.

블라이스는 언젠가부터 율리아 아르테를 향한 굶주린 욕망을 절제할 수 없었다. 붓으로 그린 듯한 그 미소가 떠오를 때마다 눈 가린 경주마처럼 몸이 달았다. 심장을 빼앗긴 사람처럼 가슴에서 무언가가 줄줄 흘렀다.

율리아를 갈망한다. 카루스 란케아의 곁이 아니라 제 곁으로 오게 만들고 싶다.

아니, 저가 직접 그녀의 곁으로 가서 그 아래 똬리를 틀고 싶다. 늪을 닮은 그 눈동자에 들어가고 싶다. 손목에, 발목에 감겨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카루스 란케아를 없애야만 했다.

* * *

율리아는 크리스틴의 경고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크리스틴을 비웃거나 비아냥거릴 때도 그녀의 눈동자는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더 섬뜩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호수처럼 멈춰 있는 저 눈 속에 지독한 광기가 감춰져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크리스틴이 애써 동요를 감추며 말했다.

“후회하게 될 거야.”

“만나서 반가웠어요. 마조람 영애.”

율리아가 천천히 움직였다. 상가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이 꺼림칙한 얼굴로 그녀를 지켜보다 문 앞에서 비켜섰다.

문을 열자, 바깥의 소음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아까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여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율리아는 그들 사이로 걸어갔다.

“죽여라!”

“죽여 버려! 이게 다 저놈들 때문이야!”

뜨거운 열기가 처형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분노했지만, 내뱉는 말은 하나같았다.

“사형을 집행하라! 저들을 죽여라!”

그때였다. 처형장 한쪽에서 기이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부자연스러운 물결이 번졌다. 섬찟함을 느낀 율리아가 그쪽을 바라보았다.

무기를 든 해방군이 인파를 헤치며 달려 나오고 있었다.

율리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아, 그녀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저들은 형장에 서 있는 주동자들에게 이용당한 진짜 해방군이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붉게 충혈된 눈, 손에는 날이 번쩍이는 칼이 들려 있었다.

“죽여라!”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게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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