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화 (172/319)

151화

“처형?”

“예, 공개 처형장에서 태형으로 다스릴 거란 발표가 있었습니다.”

태형이라, 참 샤트린다운 형벌이었다. 귀족 작위를 영구적으로 박탈하는 동시에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매를 치다니.

율리아가 요구한 건 그들에게 반역자의 낙인을 찍는 거였다.

샤트린은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친제국파는 오랫동안 왕가의 지지자였으니까. 마조람이 돌아섰다고 해도 그들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게 과연 옳은 판단인지 혼란스러웠겠지.

죄는 똑같이 지었는데 한쪽 파벌만 치죄한다는 것도 샤트린의 입장에선 몹시 찝찝하고 불쾌했으리라.

그래서 이런 방법을 택한 거였다. 가문 전체를 벌하는 대신 죄지은 자에게만 형벌을 내리는 것. 사형 대신 태형을 내리되, 처형장으로 끌고 나와 죽음보다 더한 수치를 안겨 주는 것.

저들은 영원히 귀족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가문에 남을 수도 없을 것이다. 평범한 백성이 되어 살아갈 수도 없었다.

“제가 원한 방식은 아니지만…….”

샤트린 오르테가.

괜찮은 선택이었다.

공주가 처음부터 마조람의 적이었다면, 레위시아보다 먼저 만났더라면, 어쩌면 율리아는 그녀를 택했을지도 모른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 카루스가 율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구경하러 갈래?”

“좋아요.”

율리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율리아는 카루스와 함께 공개 처형장으로 향했다.

“귀족이 아니게 됐다며? 그럼 뭐야. 이제부터 우리처럼 평민이라는 거야?”

“작위만 박탈하면 뭐 해. 여전히 돈은 많을 거 아냐. 우리네랑은 다르지.”

“그럼 뭐가 형벌이라는 거야? 귀족님네는 반역죄를 저질러도 대충 봐주는 건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기습적인 발표였는데도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형장이 마련되고, 해방군 조직의 주동자들이 끌려 나왔다.

“그러니까 해방군이라는 게…… 저 젊은 양반들이 만든 거였다고? 왜? 부모는 친제국파라며? 왕족을 공격한 것도 저들이래?”

“알 게 뭐야.”

“그럼 그동안 억울하게 끌려가서 고문당했던 불쌍한 청년들은?”

“속은 거지. 저 새끼들한테.”

사람들은 각자의 추측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은 처형장에 끌려 나온 귀족들을 비난하는 내용이었고, 간혹 왕가와 마조람 후작을 거론하는 자들도 있었다.

작위를 박탈당한 여덟 명의 해방군 수뇌부가 나란히 섰다. 태형에 처해 진 건 그중 두 명의 주동자였다.

“죄인은 엎드려라!”

높은 단상 위엔 샤트린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왕실 기사들이 그녀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율리아는 카루스와 함께 조금 떨어진 건물 위에서 처형장을 내려다보았다.

형틀에 묶인 자들의 입에서 울분에 가득 찬 고함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샤트린을 바라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우리한테 왜 이러십니까! 공주 전하께서는 우리가 왕가를 공격한 놈들과 아무 상관없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이러지 마십시오! 우리는 언제나 왕가의 편이었습니다!”

“해방군은 왕가에 도움이 됐으면 됐지, 절대 불필요한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해방군 덕에 친제국파인 국왕께서 명분을 얻은 게 아닙니까!”

“억울합니다!”

그들의 외침이 길어질수록 형장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냉랭해졌다.

“뭐야, 그런 거였어?”

“그럼 마조람 후작은 뭐야? 아니, 애초에 1왕자는 왜 죽었는데?”

“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한 여인이 거짓말하지 말라며 형틀을 향해 작은 돌을 던졌다. 죄인을 때리진 못했으나, 그 순간을 계기로 꽤 많은 사람이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샤트린이 한 손을 들어 올리자, 그녀의 곁에 있던 기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집행하라!”

길고 넓적한 형구를 든 집행인이 죄인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뒤, 형구를 힘껏 치켜들었다가 빠르게 내리쳤다.

퍼억!

“으으으윽!”

샤트린은 주동자 두 명에게 100대의 매를 치라고 명령했다. 중간에 기절하거나 상태가 안 좋아지면 형 집행을 멈추고 며칠간 치료한 뒤에 다시 때린다고 했다.

형장 가득 볼기를 치는 소리와 비명이 번갈아 울려 퍼졌다. 율리아는 건물 난간에 기대어 형장을 내려다보았다.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얼굴.

그 모습을 보면서도 딱히 만족스럽진 않았다. 그들은 율리아에게 복수의 대상은 아니었으나, 그들을 경멸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한때는 그들을 찾아가 왜 나를 배신했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몇 번 더 살고 나니 그 이유조차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원래 그런 놈들이었다.

볼기가 터지면서 옷이 피로 물들었다. 억울하다고 고함을 지르던 입에선 침이 줄줄 흘렀다. 놈들은 이제 울면서 애원하고 있었다.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살려 달라고 빌었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그들을 보면서 율리아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나는 울었던가. 애원했던가. 매달리기라도 했던가.

다 했던 것 같다. 울면서 애원하고 매달렸다. 하지만 저들은 율리아를 배신하면서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았고, 그러게 왜 별것도 아닌 걸로 일을 크게 만드냐고 되레 화를 냈다.

“살려…… 살려 주세요, 제발……!”

지금이라도 가까이 가서 물어볼까. 저들은 기억 못하겠지만.

그때 왜 나를 마조람 후작에게 넘겼냐고, 너희 때문에 나는 노예선에 팔려 가다가 알렉사를 희생시키고, 그 뒤엔 악귀처럼 살다가 비참하게 죽었는데.

율리아는 난간에 기대선 채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카루스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한참 동안 율리아를 지켜보던 카루스가 소리 없이 몸을 빼, 그들을 지키듯 뒤쪽에 서 있던 덩치 큰 기사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은밀히 명령했다.

“남부에서 활동하던 북부인 해적들에 대해서도 알아봐. 큰 키, 흰 피부에 노란 수염. 하나는 처형당했다고 하니, 기록을 뒤져서라도.”

“알겠습니다.”

“대략 12년 전부터.”

덩치 큰 기사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루스는 그에게서 벗어나 다시 율리아의 곁으로 돌아왔다.

“재미있나?”

“아니요. 괜히 왔다고 생각하는 중이에요.”

“그래?”

“저 형틀에 묶여 있는 사람이 마조람 후작이었으면 좀 더 재밌게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율리아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맞는 걸 보는 것도 지겨워졌다. 그녀의 시선이 형장을 벗어나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향했다.

그때 그녀의 시야에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왔다.

“크리스틴?”

크리스틴이 처형장에 와 있었다.

그녀는 온몸을 가리는 로브를 뒤집어쓴 채, 몸집 큰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눈에 알아봤다. 신기한 일이었다. 시선이 빨려 들어간 기분이었다. 아마도 아홉 번의 삶을 사는 동안 지독하게 얽혔던 두 사람의 악연 때문이리라.

율리아가 카루스에게 속삭였다.

“저 잠시만 내려갔다 올게요.”

크리스틴은 율리아가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홱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어떤 인력이 존재하기라도 하는지, 크리스틴도 이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곳에서 놀랍도록 정확하게 율리아를 인식했다.

크리스틴이 이를 악다문 채 입술만 움직여서 율리아를 불렀다.

“율리아.”

“오랜만이에요. 마조람 영애.”

율리아가 우아하게 웃었다. 말간 얼굴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두문불출하신다고 들었는데, 건강해 보여 다행이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율리아의 목소리는 노래처럼 들렸다. 웅성거리는 소음과 매 맞는 소리,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음악처럼 은근하게 주의를 끌었다.

크리스틴이 형장을 향해 있던 몸을 돌려 율리아를 노려보았다.

“그깟 왕궁 시녀. 그게 뭐 대단한 감투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아직은 내가 네까짓 게 함부로 굴만큼 바닥으로 떨어지진 않았어.”

“그럼요. 제가 감히. 마조람의 후계자이신데.”

후작가의 병사들이 눈짓을 주고받더니 율리아를 위협하듯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비켜서지 않으면 밀어내겠다는 뜻이었다.

율리아가 두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왜들 이러세요. 제가 아가씨를 위협한 것도 아니고. 오랜만에 만나서 안부 정도 여쭌 걸 가지고.”

비아냥대는 솜씨도 일품이었다.

크리스틴이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어 병사들을 물러서게 했다.

그러곤 율리아를 향해 뭐라고 말을 했는데, 형장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입술을 보니 두고 보자는 협박인 것 같았지만, 율리아는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안 들려요. 뭐라고 하셨어요?”

“따라와.”

크리스틴이 앞장서서 걸었다. 그녀는 인파를 헤치고 처형장 밖으로 나가 한 상가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십니까?”

“비켜라.”

병사를 대동하고 나타난 마조람 영애에게 대들 수 있는 상인은 없었다. 상인은 크리스틴이 던져 주는 금화를 손에 쥔 채 굽신거리며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내 문이 닫히고, 소음이 잦아들었다.

“율리아, 마지막 경고야. 이쯤에서 그만둬. 내가 널 죽여 버리기 전에.”

크리스틴이 짐짓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진심이라는 듯, 두 주먹을 꽉 쥐고 차가운 얼굴로 율리아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율리아는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죽여 버리다니, 누가 누구를? 네가 나를? 크리스틴 마조람이 율리아 아르테를? 네 아버지도, 하이에나도, 국왕이나 해방군, 하물며 신조차 죽이지 못한 나를?

네가 어떻게?

할 말은 많았으나, 율리아는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가게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마조람의 병사들 때문이었다.

크리스틴은 율리아가 침묵하자 제 경고가 먹혀들었다고 생각했는지, 한층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가문에서 바실리를 포기했어. 너도 알고 있겠지만, 이제는 내가 마조람의 미래를 책임질 후계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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