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0화 (171/319)

150화

생각이 많아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카루스는 재킷만 걸친 채 기지 밖으로 나와 해안가를 걸었다.

그가 지나는 자리마다 모래가 움푹 파여 둥근 발자국이 남았다. 멀리서 그를 지켜보던 기사들도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파도가 밀려들었다.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를 보고 있자니,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되었다.

“후…….”

카루스는 파도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바다도 마찬가지였다.

단단하게 대지를 디디고 서 있던 두 발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배 위로 올라가 바다에 의지하게 됐을 때, 카루스는 기이한 안도감을 느꼈다.

언제부터였을까.

황제의 곁에서, 혹은 황제의 대리인으로 전장을 누비던 카루스는 어느 날 문득 지독한 타성에 젖어 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전쟁이 터지면 싸우고, 적장의 머리를 베어 황제에게 바쳤다. 정복한 땅이 정상화되기도 전에, 다른 곳에서 전쟁이 터지면 또 그곳으로 가서 싸웠다.

싸우고 이동하고, 싸우고 이동했다. 카루스 란케아의 삶은 온통 전쟁터에 있었다.

‘내겐 황제를 욕할 자격이 없다.’

카루스는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을 해 왔다. 정복당한 자들이 세상의 온갖 증오를 담아 황제를 욕하고, 바이칸의 귀족들이 혼자 모든 것을 차지하려는 황제를 비난할 때마다, 꼭 저를 탓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정복했던 한 왕국의 왕은 비열한 폭군이었다.

자식을 죽이고, 형제를 죽이고, 여자와 술을 탐했다.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 금으로 왕궁을 칠하기도 했다.

카루스는 그의 목을 벨 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을 하는 거라고 여겼다. 그가 왕을 죽이고 나면, 그 땅이 조금 더 살 만한 곳이 될 거라고 믿었다.

한데 그가 그다음 전장으로 떠나려 말에 올랐을 때, 왕국의 백성들이 전장의 하이에나가 되어 몰래 그를 따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들은 죽은 자들의 주머니를 털었고, 정복당한 땅에서 바이칸 제국인 행세를 하며 패전국 백성을 착취했다.

악이 돌고 돌았다.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그는 부상을 핑계로 함대로 돌아갔다. 통일 제국을 부르짖던 황제도 어쩐 일인지 그때부터는 카루스를 찾지 않았다.

육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바다가 편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잠들고 깨면 땅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서 멀어진 기분이 들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배와 자비 없는 바다가 그를 되레 편안하게 했다.

우습게도 황제는 그때부터 카루스를 죽이려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직접 손을 쓰지는 않았으나, 이후 그에게 내려진 명령을 돌이켜 보면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해적왕의 기물을 찾아서 내게 가져오라. 미궁의 위치를 들켜서는 안 되니, 그대 혼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산 마일라의 남편을 죽여라.”

“데네브라의 연회에 나를 대신하여 참석하라.”

해적왕의 기물 같은 건 없었다. 미궁에 처박아 놓고 죽인 뒤에 사고로 처리하려 했을 뿐이다.

산 마일라는 바이칸에서 가장 유명한 암살자였다. 그녀의 남편을 죽이면, 카루스는 산 마일라에게 평생 쫓기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데네브라는 카루스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미쳐 가고 있었다. 황제는 황비의 연회에 카루스를 저 대신 보내, 두 사람의 불륜을 공식화하려고 했다.

그래야 무혈 제독의 완전무결한 위명에 오물을 끼얹을 수 있으니까.

“폐하, 제게 왜 이러십니까.”

“나야말로 묻고 싶구나. 카루스 란케아, 두 번째 기사여. 너는 누구에게 충성하는 것이냐?”

황제는 카루스를 끝없이 의심했다. 충성을 맹세하라고 강요했다. 그가 지금까지 황제를 위해 했던 모든 일은 당연한 거라 말했고, 그보다 더한 증명을 바랐다.

바이칸 제국에 황제보다 카루스를 무서워하는 자들이 더 많아졌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그래서 황제가 그를 질투하며 견제하고 있다는 것도.

카루스 란케아는 부하로 삼기엔 너무 완벽한 사령관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기지에 도착한 율리아가 어느새 그의 뒤로 다가와 서 있었다.

“언제 왔어?”

“조금 전에요.”

“기사들이 알려 줬나 보군.”

“요즘 다들 저한테 묘하게 친절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말수가 워낙 적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율리아가 자연스럽게 그의 곁으로 와서 함께 걸었다. 속도를 맞춘 두 사람이 모래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발자국을 남겼다.

“무슨 문제 있어요?”

“그렇게 보여?”

“멀리서 보는데…… 몇 걸음 걷다가 멈춰 서고, 또 몇 걸음 걷다가 멈춰 서시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심각한 고민이 있는 건가 싶어서 빨리 다가왔어요.”

“별거 아니었어. 네 말대로 북부에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거든. 정복한 지 꽤 오래된 땅이니까, 황제도 안일하게 관리했던 거겠지.”

“심각하대요?”

“황제는 어지간해서는 황도를 떠나지 않아. 한데 이번에는 친정하겠다고 선언했다는군.”

“저의 지난 삶에서는 언제나 당신이 그곳으로 파견되었어요.”

율리아의 말에 카루스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난 좀 등신이었나.”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황제가 날 죽이려고 갖은 수를 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를 위해 북부로 가서 독립군을 저지했다는 게.”

“저도 처음엔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 채로 황제에게 충성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제 그게 아닌 걸 알잖아요.”

율리아는 카루스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었을 거라고 말했다.

“북부 독립군을 당신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했을 수도 있고, 북부를 청소하는 척하면서 뒤에선 몰래 그들을 지원했을 수도 있죠.”

“네 이전 삶의 나는 북부 독립군을 완벽하게 저지했어?”

“아뇨.”

율리아가 생긋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부에 전해진 소문으로는, 무혈 제독이 북부 독립군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 냈다고 했어요.”

“전멸시킨 게 아니라?”

“네.”

“가짜 항복이었을 수도 있겠군.”

“당신이 남부를 통일한 뒤에 북부 독립군과 함께 위아래로 바이칸을 압박하며 황제의 야욕을 무너뜨리자고 약속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카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바이칸은 거대한 제국이었다. 황제를 저지하려면 남부를 통일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랐을 수도 있다.

“난 아마 북부 독립군뿐만 아니라 해적 세력과도 손을 잡았을 거야. 어쩌면 바이칸 내부에 세력을 키워 내전을 유도했을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황제를 암살하려 했을지도.”

“성공했을 것 같아요.”

“그걸 어떻게 알아?”

“카루스 님이 충성스러운 기사였을 때도 황제는 당신을 견제했어요. 한데 무혈 제독이라는 위명에 대륙 최고의 함대와 기사단, 그리고 남부 통일까지 이루어 냈다면…….”

“밤잠 좀 설쳤겠군.”

“저는 증오의 또 다른 이름은 두려움이라고 생각해요.”

황제는 카루스를 두려워한다. 율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멈췄다.

파도가 높았다. 가까이 다가서니 우르르 밀려와 부서지는 소리가 웅장하게 들렸다.

이리저리 휘날리던 머리카락이 입술에 달라붙었다. 어쩐지 짠맛이 나는 것도 같았다.

카루스는 율리아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대충 떼어 내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다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어릴 때 삼켰다던 보석은 어떤 모양이었어?”

“그냥 평범한 보석이었는데…… 색이 무척 아름다웠다는 것만 기억나요.”

“그 보석의 주인이었던 해적이 누군지는 모르고?”

“몰라요. 그때는 해적의 처형식이 매주 있었으니까요. 이름 높은 선장쯤 되면 기억이 날 텐데…… 아! 그러고 보니.”

오래전의 일을 떠올리던 율리아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다며 카루스를 바라보았다.

“북부인이었어요.”

“북부인이라고?”

“키가 무척 크고, 피부가 희었어요. 해적들은 대부분 피부색이 짙은 편이거든요. 흰 편이었던 사람도 바다에서 한 계절만 지내고 나면 까무잡잡하게 변해요. 그런데 그 사람은 피부가 희고 수염이 노란색이었어요.”

“북부인이 왜 남부에서 해적 노릇을 하고 있었지?”

“모르겠어요. 저도 그게 신기해서 눈여겨봤던 기억이 나요. 아버지가 그와 비슷한 외모를 갖고 있었거든요.”

“네 아버지가 북부인이었을 수도 있다는 거군.”

“어머니는 아니었을 수도 있고, 그가 진짜 제 친아버지가 아니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해적선에 팔린 노예였을 수도 있고…….”

“아버지의 얼굴은 기억해?”

율리아가 발끝으로 모래를 쓱 훑었다. 뾰족한 구두코에 쓸린 모래가 긴 선을 그렸다.

“네, 너무 선명하게 기억나서 이상할 정도로.”

“만약 그를 찾는다면 어떻게 하고 싶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율리아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카루스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새파란 바다 위에 한 무리의 새가 떠돌고 있었다. 먹이를 찾으려는 모양이었다.

“찾고 싶지 않아요.”

“어째서.”

“죽었다는 걸 확인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냥 어딘가 멀리에서 바보처럼 힘들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가난하고 비굴하게, 버린 딸에게 죄책감을 느끼면서 구질구질하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율리아가 다시 카루스를 보며 짓궂게 웃었다.

“해적의 딸이니까 해적이 되었겠죠? 제가 만약 보육원에 버려지지 않았다면, 카루스 님은 처형장에 매달려 있는 제 시신을 보게 되었을 수도 있어요. 오르테가 국법상 해적은 무조건 사형이거든요.”

“그게 무슨…….”

카루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뭐라 반박하려던 순간이었다.

“카루스 님!”

멀리서 그의 부하가 빠르게 달려와 절도 있게 묵례했다. 그러곤 율리아와 카루스를 한 번씩 응시하며 말했다.

“샤트린 공주가 해방군 조직에 가담한 친제국파 귀족 중 여덟 명의 작위를 박탈하고, 주동자 두 명을 처형한다고 합니다.”

0